29화. Episode. 11 아델가르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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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보라, 이 잔에 사흉(四凶)을 담으니
14. 하늘 아래 모든 흉이 모여들리라
15. 하여 성녀에게 이르되 성스러운 피를 담아 정화를 명하노라
…….
20. 흉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성유물이 탄생했나니
21. 이를 성배라 칭하라
창세신화 제5장, 성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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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천금보다도 귀한 보물이 있는 법.
그중에서도 성유물은 어떠한 것으로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다.
고대에 활약한 용사의 성검이 그러했고, 성창과 성부를 비롯한 신물들이 그러했다.
그 앞에 탐욕에 눈 먼 자들로 얼마나 많은 전쟁이 벌어졌던가.
성유물이라 불리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것들은 피를 몰고 오는 요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지만.’
이 모든 건 내가 ‘리하르트’에게 빙의되기 전, 게임을 플레이할 적의 이야기다.
영문도 모른 채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버린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신이란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하나 나는 그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혹여 성유물이 존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당장 일희일비할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신이니까.
……비록 신도 수 12명의 잡신이라 해도 말이다.
“어째서 트롤만 노리시는 겁니까?”
서른 개째 트롤의 마석을 품 안에 넣을 때였다.
아론이 지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 땟물이 말라붙은 것이, 그간의 고달픔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벌써 5일째 트롤만 주구장창 사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굳이 이 위험한 마경에서 말입니다.”
5일이나 지났던가?
그러고 보니 해가 다섯 번쯤 떨어졌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마경이 왜 마경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독충을 비롯해 밤낮없이 습격해 오는 마물과 짐승들은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그나마 트롤이 주로 서식하는 구역은 마경 중에서도 바깥쪽에 속해 다행이었다.
나는 뻐근한 팔다리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엘프들이랑 거래를 틀 거야. 그러니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물건을 준비해야지.”
엘프들과의 거래.
내가 알던 게임 속 미래에, ‘마르크스의 그놈’이 행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성유물 중 하나를 엘프들에게 대여해 주었다.
그 대가로 엘프들은 마르크스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본인은 세계수의 요정과 계약을 맺었다.
‘그 시점부터 마법사들의 전력은 수직 상승했지.’
북부와 남부의 균형을 깨트린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멍청이나 할 짓이다.
“난 성유물을 만들 거야.”
“……?”
다시 말하지만, 없으면 만들면 된다.
◈ ◈ ◈
“찾았다.”
우리는 수풀에 숨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트롤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놈은 두 개의 머리와 네 개의 팔을 지니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녀석은 근방을 주름잡는 우두머리 트롤이자 돌연변이 개체라는 것이다.
“저게…… 트롤이 맞습니까?”
아론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지막을 장식할 놈이지. 일단 지켜보자.”
놈은 한창 식사 중이었다.
그런데 그 식사거리가 무려 오우거였다.
촤악-!
질기디질긴 오우거 가죽이 종잇장처럼 찢기는 광경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심장은 하나란 거지.”
“……참 다행이군요.”
냉정하게 판단해서 저놈과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악수다. 절호의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곧 찾아왔다.
“쿠워어억!”
식사 중이던 트롤을 향해 또 다른 마물이 달려든 것이다.
오우거의 피 냄새를 맡고 온 짐승형 마물이었다.
“아론, 투창 좀 할 줄 아냐?”
“이 정도 거리에서 빗맞힌 적은 없습니다.”
“좋아.”
나는 침착하게 두 마물의 싸움을 지켜봤다.
짐승형 마물이 트롤의 몸뚱어리에 몇 번이나 이빨을 박아 넣었다. 하나 트롤에게 그깟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될 뿐이었다.
쾅!
트롤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네 개의 팔이 짐승형 마물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크워어어!”
제 식사 시간이 방해받은 게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마물을 향한 트롤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쾅, 쾅!
주먹질 하나하나에 땅이 울리고 숲이 몸을 떨었다.
등골을 서늘케 하는 흉폭함, 과연 우두머리다웠다.
“준비.”
내 신호에 아론이 창대에 힘을 주었다.
쿠구국-
보라색 오러가 창대를 타고 뱀처럼 기어올랐다.
“목표는 심장. 전력으로 던져.”
“예.”
나는 자세를 잡으며 펼친 세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셋, 둘, 하나.
쐐액-!
아론이 창을 던진 것과 내가 땅을 박찬 것은 동시였다.
보랏빛 궤적을 남기며 트롤을 향해 날아가는 창의 뒤를 쫓았다.
“쿠억!”
놈의 두 머리통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재빨리 치켜든 팔이 심장을 보호한 것 또한 동시였다.
콰드득-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던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론의 피어싱 오러를 머금은 창은 두터운 팔을 손쉽게 뚫어 내며 전진했다.
이에 다급히 들어 올린 두 번째, 세 번째 팔도 마찬가지.
창은 네 번째 팔까지 꿰뚫고 나서야 기세를 잃고 멈춰 섰다.
『특기 - 홀리 오러 발동.』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놈의 앞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이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트롤이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어깨를 내 보였음에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서걱-
목 위에 달려 있던 머리 중 하나가 공중에 떠올랐다.
“쿠아아악!”
트롤의 남은 머리통이 위협스럽게 울부짖었다.
“다른 마물이 나타나기 전에 서둘러서 끝내야겠습니다.”
미리 건네준 아이스 크레센도를 꼬나 쥔 아론이 수풀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
마경이 위험한 점은 마물 분포도가 너무나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팔이 묶인 놈에게 붙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트롤이 짐승형 마물에게 폭력을 가했듯, 이제 놈 또한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쿡, 쿠어억!”
깔끔하게 마석을 뽑아 주려 했건만, 놈은 온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구차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쿠웅-
돌연변이 트롤은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렇게 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6성급 이상의 마물이었는데…….”
“팔 묶어 놓고 다굴 놓았으니 장사 없지.”
일등 공신은 역시 아론의 기습 공격이었다.
이 흉악한 트롤의 팔뚝 네 개를 투창으로 꿸 수 있는 창기사가 이 대륙에 몇이나 될까.
“역시 도련님은 굉장하십니다.”
“응?”
그런데 아론이 난데없이 존경 가득한 시선을 보내 왔다.
그의 손엔 트롤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이놈 머리가 두 개라 그런지, 목 부위가 유난히 발달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격에 날려 버리시다니, 웬만한 상급 기사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팔 네 개를 꿰뚫은 네가 할 소리는 아닌데.”
“베어 내는 것과 꿰뚫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가자고.”
돌연변이 트롤의 마석을 품에 넣곤, 자리를 옮겼다.
목적지는 그동안 은신처로 삼았던 동굴.
그나마 주변에 마물이 적고, 수풀이 무성해 몸을 숨기기엔 좋은 장소였다.
“이제 트롤 사냥은 끝이야.”
“정말입니까?”
내 말에 아론이 반색하고 되물었다.
하긴, 영문도 모른 채 마경에서 고생해야 했던 그로서는 달가운 일이었다.
“재료는 얼추 모았으니까. 얼른 만들어야지.”
더 이상 마경에 볼일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 ◈ ◈
은신처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짐을 풀었다. 트롤의 마석 서른 개와 돌연변이 트롤 마석 한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내든 것은 나무잔이었다.
바텐베르크를 떠나기 전, 근처의 잡화상에 들러 사 온 잔이었다.
언뜻 보면 작은 트로피처럼 생긴 그것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콰득-
마석 하나를 집곤 나무잔에 통째로 박아 넣었다.
본래 성배는 사흉(四凶)이라 불리던 악명 높은 마물들의 마석으로 장식해 만든다.
‘그만한 마물은 지금 나한테 턱도 없고.’
꿩 대신 닭, 아니 참새라 해야 하나. 다른 마물의 마석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트롤의 마석만을 고집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트롤의 탁월한 재생력은 마석에서 비롯된다.
재생력은 곧 생명력. 적어도 잡다한 마물의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다.
“됐다.”
“성배…… 라는 이름에 어울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아론이 아픈 곳을 찔렀다.
딴엔 제법 멋을 부린다고 노력했건만, 아무래도 내게 손재주라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잔에 검은 돌기가 돋아났군요.”
“시끄러워.”
커다란 돌연변이 마석을 중심으로 손톱만 한 마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잔.
아론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 돌기가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부디 엘프가 외적인 것보다 그 효과를 중히 여기기를 바랄 뿐이다.
『마석 돌기 나무잔에 5만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어두컴컴한 동굴에 빛이 폭사했다.
『성배의 최하급 모조품을 제작합니다.』
시스템 창이 떠오르고, 변화는 그 후부터 시작되었다. 나무 잔 표면에 박힌 마석들 사이로 가느다란 홈이 파였다.
그리고 그 홈을 따라 빛줄기가 내달렸다.
『매개체의 격이 터무니없이 낮습니다. 재현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성배의 최하급 모조품이 제작되었습니다.』
“……된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찌르던 빛이 멎었다.
그러나 그 여파가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북쪽 세계수, 아델가르텐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챕니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델가르텐이 당신을 애타게…….』
『아델가르텐이 당신…….』
『아델가르텐이…….』
“……뭐지?”
눈앞을 한가득 메우는 시스템 창.
단지 글자일 뿐인데도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