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Episode. 10 마경으로 (2)
끼익-
“허.”
그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론도 제 목함은 열어 보지도 못한 채 내 검에 시선을 빼앗겼다.
- 꽤 좋은 검을 보냈더구나.
가주가 목함을 건네주며 한 말이 떠올랐다.
이게 고작 ‘꽤 좋은 검’이라니.
그럼 대체 무엇이 명검이고 걸작이란 말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인데.”
알 수 없는 재질의 가죽으로 마감된 검자루.
그 위로 묵빛의 검날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보였다.
기다란 검신에 비해 그 무게감은 결코 과하지 않아, 한 손으로 쓰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아론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드워프가 제작한 무구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더니…….”
직접 쥐어 보니 알겠다.
어째서 기사들이 그토록 좋은 무구에 목을 매는지.
빛을 흡수할 듯, 어두운 검신에 새겨진 음각이 눈에 띄었다.
드래곤 투스(Dragon Tooth).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함께 보관되어 있던 검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마치 영혼의 짝을 만난 듯 마음이 든든해졌다.
내가 검 하나에 이렇게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축하드립니다. 아무래도 인연을 찾으신 듯 보입니다.”
아론이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들어 보니, 무릇 기사들은 한 번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무구를 만나게 된다고.
“그래. 용의 심장을 뽑는 데엔, 용의 이빨이 제격이겠지.”
물론 그전에 엘프의 숲으로 가야겠지만.
숲을 둘러싼 마경을 뚫는 게 불가능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오히려 엘프들과의 만남이 기대될 뿐이었다.
“어서 시험해 보고 싶군.”
앞으로 나와 함께 할 어금니를 그러쥐었다.
◈ ◈ ◈
날이 밝자마자 나와 아론은 애병을 꼭 끌어안고 바텐가의 정문을 나섰다.
“도련님, 정말 이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팔에 단단히 둘러싸인 아론이 걱정스레 물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바텐가에서 마경까지 가는 길은 하루 이틀 거리가 아니다.
몇 달을 내리 걷기만 할 셈이 아니라면 말은 필수로 타고 가야 했다.
문제는 내가 말을 전혀 탈 줄 모른다는 것이다.
뭐, 말이란 동물을 만져 본 적도 없는데 승마를 배웠을 리가.
“일단 그냥 출발해.”
결국 승마에 능숙한 아론의 뒤에 같이 타는 수밖에 없었다.
다그닥-
힘센 발길질로 땅을 박차는 말에 떨어질세라, 아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처음엔 나름 편했다.
아론이 배려라도 해 준 건지, 생각보다 승마감은 나쁘지 않았다.
“윽!”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엉덩이가 얼얼해지는 것이…….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는데.’
말 타는 게 이렇게 고된 일일 줄이야.
아직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는데.
“조금 쉬고 갈까요?”
“……됐어.”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한 시간 가고 찔끔찔끔 쉬어 버리면, 어느 세월에 마경에 도착하나.
“며칠만 버티면 될 거야.”
물론 나도 쭉 이렇게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아론의 넓은 등짝을 보며, 그가 어떻게 말을 모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험난한 나날이 며칠간 반복되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 나갔다.
『특기 - 승마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숙련도 - F』
드디어.
나는 아릿한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눈앞의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거 빨리 좀 나타날 것이지.
“다음 마을에선 말 한 필 더 구하자.”
그 뒤부턴 엉덩이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제법 큰 마을에서 구해 온 말에 박차를 가했다.
“……승마를 할 줄 아셨던 겁니까?”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아론이 묘한 눈을 하곤 물었다.
설마, 내가 일부러 자기랑 합석하고 싶어 했던 걸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
“네가 하는 거 보고 배웠다, 왜.”
내 대답에도 아론의 눈빛은 여전히 게슴츠레했다.
직속 기사라는 놈이 이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그렇게 또다시 몇 날 며칠을 달렸다. 북대륙의 밑동네는 언데드로 사달이 났는데, 그 위쪽은 정말 평화로웠다.
흔한 마물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라니.
“평소엔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만, 이번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군요.”
아론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창을 써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봐?”
드워프가 제작한 아론의 창의 이름은 ‘혼테일’.
별다른 장식 없이 날카롭게 창날을 세운 게, 아론의 평소 성격과 잘 어울리는 실용적인 창이었다.
아론은 정곡을 찔렸는지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데 나도 얼른 새 검을 휘둘러 보고 싶던 터라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 ◈ ◈
마물이 나타나 우리의 앞길을 막은 건, 보르헴 왕국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내가 처리…….”
“도련님,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론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눈을 희번덕 뜨며 창대를 그러쥐는 게, 언뜻 창귀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미친놈 같다는 말이었다.
나도 드래곤 투스를 휘두르고 싶었는데.
가엾은 마물은 어찌 말릴 새도 없이 아론의 돌격에 꼬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게 진짜! 직속 기사라는 게 내 말도 안 듣고!”
내 말에 아론은 ‘어찌 주군이 포악한 마물을 상대하도록 냅두겠습니까-’ 하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 우직한 기사도 새로운 애병 앞에선 애나 다름없었다.
헝겊으로 창을 닦아 낸 아론이 물어왔다.
“그건 그렇고, 보르헴 왕국에 들리실 겁니까?”
“아니. 그냥 바로 마경으로 향한다.”
보르헴 왕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경에서 내려오는 마수들과 싸워 왔다.
보르헴 왕국과 가까워졌다는 건,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말 엘프의 숲이 마경 중심부에 있습니까?”
“그렇다니까.”
이미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아론의 표정엔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당연한 생태계의 순리야.”
생명의 정기로 가득 찬 엘프의 숲.
그리고 그곳을 둘러싼 마경.
언뜻 보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실은 정말이지 당연한 인과 관계로 짜여져 있었다.
본능에 충실한 마물들은 세계수가 뿜어내는 생명력에 이끌렸고.
그 포악한 짐승들이 모이고 모여, 종내에는 마경, 마물의 숲이라고 불리게 된 거니까.
엘프들에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생태계였다. 저들의 안식처를 숨기기에 마경만큼 탁월한 가림막은 없으니.
“저기 보이는군.”
한참을 말을 타고 달리자, 저 멀리 울창한 대수림(大樹林)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이어진 녹빛의 물결을 보아하니, 과연 평범한 숲은 아니란 게 느껴졌다.
◈ ◈ ◈
“하암…… 으음?”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보르헴 왕국의 병사, 왈슨.
그의 눈에 저 멀리 무언가가 보였다.
눈을 좁혀 자세히 바라보니, 두 인영이 말을 타고 마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왈슨을 봤는지, 곧바로 말머리를 틀었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코앞까지 다가온 둘을 향해 왈슨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의 낯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수고가 많군. 보르헴의 병사인가?”
머리에는 웬 관을 쓰고, 두툼한 망토를 몸에 두른 소년이 입을 열었다.
왈슨은 그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얇고 긴 눈매에 새까만 머리카락의 미남.
척 봐도 귀티 나게 생긴 얼굴에 왕관을 쓴 것을 보니, 어느 왕국의 왕자인 걸까.
‘우리나라에 타국의 왕족이 방문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왈슨은 조심스레 말을 높였다.
“가시던 방향은 마경입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이분은 바텐베르크의 혈통,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도련님이시다.”
정작 입을 연 것은 소년의 옆에 있던 기사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바텐베르크의 자제는 왕족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하고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제야 왈슨은 왜 소년의 얼굴이 낯이 익었는지 깨달았다.
언젠가 그의 초상화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소문도 함께.
“바, 바텐베르크의 자제,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도련님을 뵙습니다!”
왈슨이 냅다 허리를 숙였다.
신원 확인이고 뭐고, 북대륙에서 바텐베르크의 자제를 사칭할 만큼 간 큰 놈은 없다.
게다가 저만큼 잘생긴 얼굴도 흔치 않다.
“잘되었군. 우리 말 좀 맡아 줘. 나중에 찾으러 가지.”
“예, 예?”
리하르트와 아론이 말 위에서 훌쩍 내리며 고삐를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쥔 왈슨은 황망히 눈을 끔뻑였다.
눈앞의 도련님이 하는 모양새가 꼭 마경에 들어갈 것 같은 건 그만의 착각일까.
“저, 저어……!”
“고맙다. 그럼 수고하도록.”
리하르트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곧바로 지나쳤다.
그러다가 돌연 뒤를 돌아 왈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나를 본 건 비밀이다. 행여, 나를 찾는답시고 너희 왕국의 병력이 마경을 들쑤시는 일은 없길 바라. 진심으로.”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매서웠다.
수틀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태도.
과연 소문대로였다.
“리, 리하르트 도련님! 안 됩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왈슨이 애타게 부르짖는데도 불구하고, 리하르트의 걸음걸이엔 거침이 없었다.
“도련님, 여독을 풀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뒤를 따르는 아론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경은 하나의 왕국이 틀어막고 있어야 할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들이 그곳으로 곧바로 향하기엔, 몸에 쌓인 피로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리하르트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마경에 간다는 걸 알면, 보르헴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럼 곤란하지.”
◈ ◈ ◈
“긴장을 늦추지 마.”
마경의 초입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울창하고 고요한 숲속.
언뜻, 평화로운 풍경 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숲에 맴돌고 있는 고요는 평화가 아닌, 명백한 긴장이었으니까.
리하르트와 아론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돌기가 이곳저곳 난 흉측한 녹색 피부. 다리 굵기가 성인 남성의 허리보다 굵은 괴물.
보르헴 왕국의 속을 썩이는 단골 중 하나인 트롤이었다.
“아론, 너는 끼어들지 마.”
여느 중급 기사도 상대하길 버거워하는 트롤을 보며 리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등에 차고 있던 드래곤 투스를 뽑아 든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혹한의 한기가 몰아쳤다.
-쿠워어어!
트롤이 휘두른 주먹을 피해 낸 리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단 한 번.
한 번의 휘두름으로 트롤의 목덜미가 쩍 벌어져, 두터운 목뼈를 내 보였다. 그리고 진득한 녹색 핏물이 흐르기도 전에, 상처 부위가 얼어붙었다.
-쿠, 쿠헥!
목을 부여잡는 트롤에게 무자비한 참격이 이어졌고, 설왕과 동급인 4성의 마물이 금세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에 낭자한 상처 위에는 얼음 꽃이 피어난 채로.
“이거 완전…….”
무기빨 아닌가?
리하르트가 검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휘둘러 본 드래곤 투스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고, 기대했던 것보다 몇 배는 손에 맞았다.
오러도, 신앙도, 심지어는 신성력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휘둘렀을 뿐인데, 질기디 질긴 트롤의 가죽을 손쉽게 갈라 냈다.
“그 정도의 검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명품이라 불릴 겁니다.”
“그렇지?”
감탄하는 아론에게 리하르트가 동조했다. 만약 드워프가 이런 검을 찍어 내듯 만들 수 있었다면, 대륙은 그들의 세상이 되었으리라.
‘그들이 바텐베르크와 동맹을 맺었다지만, 턱하고 내놓을 만한 검은 아닌데.’
샘솟는 의구심은 뒤로하고, 리하르트는 트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르륵!
녹색 괴물이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느새 온몸의 상처는 대부분 아문 뒤였다.
아무리 드래곤 투스의 예기가 대단하다고 한들, 그저 휘두른 것만으로는 가죽과 근육을 가르는 데 그친 것이다.
“트롤은 마석을 부숴야 죽습니다.”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마석을 부수기 위해선, 단단한 뼈부터 갈라 내야 했다.
쿠우우-
빛줄기가 어금니를 타고 올랐다.
리하르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트롤을 보며 웃어 보였다.
쿵!
트롤의 오른팔이 말끔하게 잘려 저만치 날아갔다.
그것이 일검(一劍)이었다.
쿵-!
재차 검을 휘두르자, 이번엔 트롤의 왼팔이 떨어졌다.
오러. 그것도 일반적인 오러가 아닌, 홀리 오러는 그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 날카로움은 완숙한 상급 기사의 것보다 매서웠고, 육체에 전해지는 버프는 왕가의 가보급 아티팩트보다 탁월했다.
-그워어억!
사지가 잘린 트롤이 흙바닥에 몸을 뉘였다. 놈은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오로지 리하르트만 노려보며 이빨을 딱딱거렸다.
“운이 좋았어. 바로 트롤이 나타나다니.”
중얼거린 리하르트가 연신 손을 움직였다.
“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트롤을 죽이기 위해선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 마석을 파괴해야 하는데, 리하르트는 대뜸 손을 박아 넣은 것이다.
“마석을 채취하려고.”
이윽고 트롤의 가슴팍에서 손을 빼낸 그가 씨익 웃었다.
그의 손에 달려 나온 마석에선 짙은 생명력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