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Episode. 09 루드비히의 오른팔 (3)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제 방으로.”
나는 레오와 함께 개인 연무장을 벗어났다.
어차피 내 마나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으니, 사실상 오늘 수련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론은 오늘도 연무장에서 밤을 지새울 거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고 수련에 매진하는 그였다.
“아론의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뒤에서 따라오던 레오가 내게 물어 왔다.
“그런 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씩이지만, 그 또한 확실히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별로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론을 믿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래의 창귀를 걱정한다니. 그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을 것이다.
“드시지요.”
레오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멀뚱멀뚱 서 있는 그를 의자에 앉히곤, 책장 옆의 책상에 다가갔다.
분명 여기에 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책상의 서랍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치를 즐기던 예전의 리하르트가 비싼 돈 주고 경매에서 낙찰받은 공예품.
아티팩트가 아닌, 정말 예쁘기만 한 쓰레기였다.
“으음?”
난데없이 반지를 꺼내 든 모습에 의아해하는 레오를 뒤로하고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슬슬 이야기를 해 볼까.
“삼 주…… 아니, 이 주 뒤에 일이 있으시다고.”
“그렇습니다만.”
“혹, 제1기사단이 리치 추적에 나서는 겁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시기에 기사들과 세 리치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
레오는 말이 없었다.
툭, 툭-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둥그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제 임무를 발설하고 다니는 기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뭐가 그리 비밀스러운 거라고. 저도 놈들의 수하에게 습격을 받았던 입장입니다.”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리며 레오를 빤히 응시했다.
입을 꾹 다물었던 그가 한숨을 내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역시.
마계에서 넘어온 리치들과의 전쟁은 머지않아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게 큰 기회였다.
“설마, 임무에 동참하시려는 겁니까?”
레오가 질색하듯이 물어 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몸이다.
굳이 결전도 아닌, 추적에 낄 이유는 없었다.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상태창을 펼쳐 보였다.
[호르]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12 □ 신앙 - 12,832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남은 신앙이 1만 2천이라…….’
일일 평균 1,500의 신앙이 적립되니, 마나 불감증이 완치된 이후론 신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이젠 마나 컨트롤의 숙련도에도 투자해야 하고, 여행길에 올랐을 때를 대비해 비축도 해야 했다.
물 쓰듯이 펑펑 쓸 수는 없는 노릇.
“흐음…….”
손에 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얼마큼이 적당하려나.
“왜 그러십니까?”
“반지, 좋아하십니까?”
“예?”
그의 시선이 반지를 향했다.
“뭐…… 아티팩트라면 착용하겠지만, 일반 장신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제 비밀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비밀 말입니까?”
레오의 눈빛이 삽시간에 반짝였다.
나한테 궁금한 것이 그렇게나 많았던 걸까.
“마나 불감증을 완치시킨 비결이라도 알려주시는 겁니까?”
“…….”
“아니면, 그 망나니 같은 성정이 변한 이유라도?”
말실수를 아주 부담 없이 하는군.
“……둘 다 포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나는 레오의 몸에 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미량의 신앙을 밀어 넣었다.
“제 성격이 변한 것, 마나 불감증을 치료한 것. 모두 이 힘과 관련이 있습니다.”
“……!”
레오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몸에 흘러들어간 신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마나는 아니군요. 대체 뭡니까?”
‘설마, 새로운 이능입니까?’ 라고 레오가 쉴 틈 없이 물어 왔다.
이능이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물음에 지금 당장 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한 결정이랄까.
기사라는 놈들이 얼마나 꽉 막혔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을 믿는 건 나약하단 증거니, 뭐니.
참으로 웃기지도 않지만, 종교를 향한 이들의 거부감을 줄이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감화시켜야 했다.
나는 반지를 쥔 손에 신앙을 끌어올렸다.
그것도 아주 듬뿍.
『해당 물체에 1만 포인트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지이잉-!
빛을 한 움큼 머금은 반지가 부르르 떨었다.
한순간에 커다란 지출을 해 버렸다.
그래도 이게 전부 미래를 위한 투자 아니겠는가.
“앞으로 이 반지를 매일, 빠짐없이 착용하십시오.”
빛나는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는 레오에게 말을 건넸다.
“제1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할 때에도, 리치의 추적에 나설 때에도.”
신앙을 줄기차게 흘려 대는 반지는 착용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불어 리치들의 이목을 끌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미끼겠지.
“다시 만나는 날까지 그리하신다면, 그때 이 힘에 관련된 것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땐, 정말 많은 것이 바뀔 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답은 없었으나 나는 확신을 가졌다.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호기심에 물들어 있었으니까.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삼 주가 지났다.
정말 쏜살같다는 말이 어울리는 나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눈을 뜨면 실을 쥐었고, 눈을 감았을 때에도 실을 쥐고 낑낑대는 꿈을 꾸었으니. 하루하루 밤낮없이 지새운 기분이었다.
“집중하십시오, 집중.”
아마 이 삼 주 동안 레오가 가장 많이 내뱉은 단어는 집중일 것이다.
정작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바로 그거였는데.
『특기 - 초집중 발동.』
양손에 쥔 새까만 실 가닥들.
하도 많이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이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그것들이 꿈틀거렸다.
‘아직이야.’
신성력이 조심스레 마나 루트를 타고 올라왔다.
금세 손끝까지 도달한 힘은 제 짝을 찾듯 수십 갈래로 나뉘어, 실 한 가닥 한 가닥에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휘릭-
처음엔 열 가닥, 다음엔 서른 가닥.
그리고 그다음엔 손에 쥔 실들 전부.
양손 도합 백팔십 가닥의 실이 허공을 수놓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중간에 엉킨 것들도 많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레오가 말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공중에서 실이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컨트롤이 미숙하다는 겁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솟구쳤던 실들이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합격점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보란 듯이 오러를 들이밀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아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 이 개망나니 같은 마나를 다루는 데에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일주일 전, 아론이 대뜸 눈을 빛내며 했던 말이었다. 과연 그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그 이후로 성장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휘릭-!
몇 가닥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실을 허공에 띄울 정도였다.
수련 초반에 현저하게 벌어졌던 나와의 격차를 순식간에 좁힌 것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마나 부족으로 피를 토해 가며 수련한 결과였다.
마나 루트가 개발된 덕도 컸지만, 그만의 근성과 재능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리라.
“좋습니다. 좋아요.”
레오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손뼉을 쳤다.
“그래도 제가 떠나기 전에 두 번째 단계를 알려 드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진심이라는 듯 활짝 웃던 그가 내게서 실을 받아 갔다. 하도 쥐어 대서 닳고 닳은 실의 끝자락을 내려다본 레오가 마나를 일으켰다.
“잘 보십시오.”
그가 쥔 실 가닥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새까만 가시 수십 개를 쥐고 있는 듯한 모양새.
대체 얼마나 정순한 마나, 얼마나 굉장한 컨트롤을 갖고 있어야 저런 기행이 가능한 걸까.
과연 기사단장이라는 감투를 허투루 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허공에 솟구쳤던 실가닥이 몸을 뒤틀었다.
순간 그의 마나가 흐트러진 걸까 싶었는데,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마나 수십, 수백 가닥을 엮어 날을 벼리는 것이 오러입니다.”
서로 엉키고, 서로 엮인다.
양손의 실들이 한데 엉켜 기다란 실 뭉치를 만들어 냈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뭉쳐진 것 같지만,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두 번째 단계, 실 엮기입니다. 크리프의 실로 이 정도가 가능하다면, 기초적인 오러는 엮어 낼 수 있다고 봐도 되겠지요.”
보는 입장에선 그저 신기하고 특이한 묘기였다.
그런데 저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속이 쓰려 왔다.
그냥 신앙으로 무식하게 숙련도를 올릴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앙에만 의존하는 건 효율이 안 좋아.’
직접 몸으로 하는 수련이 병행되어야만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레오가 빙긋 웃으며 은근히 도발하는 어조로 물어 왔다.
“도련님.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이 호기심의 화신은 상당히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슬아슬하게 사람 속을 긁어 놓는 재주가 있었다.
헤실헤실 웃는 그를 바라보다가, 아론의 반응이 궁금해 시선을 옮겼다.
“오오. 아주 불타오르는구먼.”
레오의 실 뭉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모습에서, 기필코 해내고 말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엘프의 숲으로 향하기로 한 날이 앞으로 한 달.
그 안에 저 단계까지 오르지 못하면 오러를 다룰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 없던 의지라도 불태워야 할 것이다.
나도 놀 수만은 없지.
“하하, 반년은 실을 붙잡고 있어야 몇 가닥 꼬기라도 할 겁니다!”
그 모습에 레오가 방정맞게 웃으며 말했다. 콧대가 한껏 높아진 게 어지간히 우쭐해진 모습이었다.
“반드시! 한 달 안에 해 보이고 말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아론이었다.
아론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곧바로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잠시 아론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레오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앞으로 당분간 뵙지 못하겠군요.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도련님.”
“다음에 만났을 땐 훨씬 더 즐거울 겁니다.”
연무장 벽에 등을 기댄 레오가 씨익 웃었다. 꽤 기대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궁금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그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투박한 손가락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반지가 꿰여 있었다.
이 주 전, 그는 내가 내민 반지를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에 끼우고만 있으면 될 일이니까.
부정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반지를 찬 이후로 달라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몸에 활력이 넘친다든가, 운이 좋아졌다던가,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고 있다고.
“아, 그렇습니까.”
과연 1만 신앙을 투자한 게 헛된 일은 아니었는지, 레오는 반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중간에 단 한 번이라도 반지를 빼면 안 됩니다.”
제1기사단이 맡은 임무는 세 리치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
어쩌면 반지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지도 몰랐다. 고유 이름을 가질 정도의 리치들이라면, 반지 안에 담긴 신앙을 똑똑히 느낄 테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바였다.
“제1기사단의 앞길에 언데드가 수없이 들이닥쳐도 말이죠.”
“하하! 임무를 나가는 사람한테 불길한 소리를 하십니다?”
레오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 내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봤다.
레오는 그제야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깟 언데드 따위, 바텐베르크의 검 앞에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지요.”
“좋습니다.”
리치들이 신앙을 느끼고 달아날 일은 없다. 그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까.
“그럼 다음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레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연무장을 나섰다.
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론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엘프의 숲으로 떠나기까지 대략 한 달.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비단 아론뿐이 아니다.
숲을 둘러싼 마경을 뚫기 위해선 나 또한 최대한 아등바등 강해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