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24화 (24/216)

24화. Episode. 09 루드비히의 오른팔 (1)

예의를 차린 듯, 안 차린 말투가 들려온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레오의 실실 웃는 낯이 보였다.

이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린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대련,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눈앞의 기사, 레오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이 틀림없다.

이건 어른이 어린애한테 스파링 하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왜입니까? 레오 경께서 얻을 건 전혀 없을 텐데.”

“도련님의 마나 특성, 그리고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모습. 또…….”

레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대련을 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나한테 호기심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과하게 눈을 반짝이는 레오의 모습에 반응한 것은 오히려 아론이었다.

입을 떡 벌린 그를 보고 왜 저러나 싶다가, 이내 떠오른 것이 있었다.

저 웃음이 헤픈 사내는 가주의 오른팔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그리고 자제들의 숱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켜 오던 자였다.

만약 그가 자제 중 한 명에게 힘을 실어 준다면, 잠잠해졌던 후계자 쟁탈전은 또다시 과열되리라.

“죄송하지만, 저는 수련을 해야 해서.”

“도, 도련님……!”

단호하게 거절하자, 되려 아론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지금이 레오를 포섭할 엄청난 기회라는 듯이.

물론 그럴 일은 없다.

그는 앞으로도 쭉 루드비히의 충신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게 비치는 저 관심은 정말 호기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후계자 같은 건 관심 없어.’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후계자야.

“그만 가 주시겠습니까, 레오 경.”

“에이, 왜 그러십니까. 수련도 좋지만, 대련만큼 경험을 쌓기에 탁월한 것이 없습니다.”

정녕 이 사람이 바텐가의 기사단장이 맞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치근덕거리는 것이 썩 위엄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것도 실력이 얼추 비슷해야 하지. 괜히 레오 경과 대련했다가 부상만 입으면, 해야 할 수련도 못합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그와 대련해서 얻을 것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아론과 자웅을 겨루는 게 백배 나았다.

그러나 레오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나 보다.

“제가 누구입니까! 그 정도 힘 조절도 못할 실력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애가 탔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진심으로 나와 대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저와 대련을 하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럼 그들과 대련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난 관심 없으니 빨리 가 줬으면 좋겠다.

그런 내 마음을 그가 알았던 것일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저에게 단 한 번의 유효타라도 성공하신다면, 제가 며칠간이나마 수련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때문에 부상을 입게 되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레오가 덧붙였다.

‘……이건 구미가 당기는데.’

그 같은 초고수가 수련을 도와준다는 말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옆에서 아론이 헛숨을 들이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러나 문제는 레오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느냐 없느냐다.

길고 짧은 건 대 보기 전까진 모른다고들 하나, 뱀과 용은 천 리 밖에서 보아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흠…….”

나는 손에 쥔 수련검을 내려다보았다.

검날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실금.

모리츠와의 대련 때, 언뜻 불길한 소리가 난다 싶었더니 금이 갔었나 보다.

슬쩍 수련검을 몸 뒤로 숨겼다.

“하아. 레오 경이 그렇게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오! 승낙하신 겁니까?”

해맑게 웃는 레오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레오 경, 지금 바로 시작하시겠습니까?”

◈          ◈          ◈

“그럼 잘 부탁합니다.”

꾸벅-

한 차례 고개를 꾸벅인 레오의 눈에 흥분이 감돈다. 어서 마나를 꺼내 보라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바람대로 신성력을 검에 둘렀다.

“오오!”

잔뜩 신이 난 레오를 무시하곤 땅을 박찼다.

카앙-!

선공은 손쉽게 가로막혔다.

키긱, 마주 댄 양 검 사이로 불똥이 튀겼다.

“단련된 근육에 비해 강한 근력이군요. 이것이 도련님의 마나 특성입니까?”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쉬질 않았다.

검보다 입을 더 많이 움직이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나는 몇 번 더 검을 휘두르다가, 로우킥을 날렸다.

“어이쿠! 그런 뻔한 수는 안 통합니다.”

뒤로 훌쩍 피해 낸 레오가 입방정을 떨어 댔다.

나는 가만히 검을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예?”

“대련을 신청한 것은 레오 경인데, 어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까?”

이건 대련이 아니라 저급한 조롱에 불과했다. 그도 아니면 제 호기심만 채우기에 급급하던가.

아무튼 의와 예를 중요시하는 기사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그것을 날카롭게 꼬집어 주자 레오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대로 상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마나를 끌어올리는 레오.

이제 구색은 갖춰졌다.

카강! 카가강!

양 검이 수십 번 씩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 수준에 완벽하게 맞춘 실력.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답게 자신의 검을 오롯이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생각보다 더 놀랍군요. 기초 검술의 성취가 상상 이상입니다.”

레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숙련도가 S급에 들어선 기초 검술은 내가 봐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슬슬 끝내죠. 연달아 대련하려니 힘에 부칩니다.”

고오오-

나는 그 말과 함께 모든 신성력을 검에 다 끌어모았다.

밝은 빛무리가 검날을 타고 내달렸다.

마나 하트가 비명을 질렀다.

애초에 내 마나량은 결코 많지 않다. 이것도 크게 무리를 한 상황이었다.

“제 마지막 일격. 제대로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력을 다해 보십시오.”

좋다.

검을 꼬나 쥐곤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와 그의 사이는 순식간에 좁혀들어, 서로의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레오를 향해 휘둘러졌다. 레오 또한 제 검을 마주 휘둘렀다.

그 순간, 신성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 하얀빛에 가려졌던 검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거미줄을 친 듯, 금이 쩍쩍 갈라진 검날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다.

모리츠와의 대련에서 생겼던 실금이, 연달아 이뤄진 대련에 감당 못할 정도로 커진 것이다.

“어……?”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가 다급히 검을 멈춰 보려고 하지만, 글쎄.

‘늦었어!’

콰득-

내 수련검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고.

“커억……!”

그러고도 모자라 레오의 검이 내 빗장뼈를 강타했다.

우당탕-, 하는 소음과 함께 하늘과 땅이 몇 번이나 뒤집혔다.

그나마 레오가 검을 멈추지 않았다면 중상을 입었을 일격이었다.

“도, 도련님!”

거리를 두고 관전하던 아론이 화들짝 놀라며 뛰어왔다.

“으윽!”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강렬한 통증이 찌르르 울렸다.

“리하르트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잠깐 넋을 놓고 있던 레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물론 이게 그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수련검이 부러져 부상을 입는 경우는 대련에서 종종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또 이야기가 다르다.

“아악! 뼈가 부러진 것 같아! 이래서 대련을 하기 싫다는 거였는데!”

부상을 입을 일은 없을 겁니다-, 라던 레오에겐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일 테지.

최대한 울상을 지으며,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호기심은 온데간데없고 당혹만이 남은 레오의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후…… 레오 경, 대련의 내기 조건이 뭐였습니까?”

“제, 제게 공격을 성공할 시에…….”

“에헤이. 그거 말고.”

잠깐의 침묵.

왠지 그가 잊은 것 같아, 친절히 알려 주기로 했다.

“이런 불상사가 생겼을 때에도 책임진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윽……!”

문득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그러게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괴롭지만, 어째선지 웃음이 나왔다.

“아론, 너도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똑똑히 들었지 말입니다.”

제1기사단장인 레오의 눈치가 보일 법도 하건만, 아론은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반대로 레오의 눈빛은 잔뜩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사고였을 뿐입니다.”

정답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상처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잘 부탁합니다. 레오 경.”

엘프의 숲으로 떠나기까지 앞으로 두 달.

아주 좋은 가정 교사가 생겼다.

◈          ◈          ◈

툭, 툭-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 앞에 시립한 레오는 가만히 주군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리하르트 도련님의 성취에 감복한 바, 그분의 수련에 짧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레오 자신도 떨떠름한 속내는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허기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내걸었던 내기.

그것에 의도치 않게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부러진 빗장뼈를 부여잡고 히죽-, 웃던 리하르트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약속인 것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

루드비히의 진중한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직위는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고작 적지 않다고 표현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바텐가의 자제들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럼에도 줄곧 중립을 지켜 오던 레오가 리하르트에게 가르침을 주겠단다.

“이는 곧, 리하르트의 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아, 아닙니다. 후계자 구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의사입니다.”

단호하게 부정하는 말에 루드비히는 눈썹을 까딱였다.

그럼 어째서 리하르트에게 지도를 자처한단 말인가.

그것이 어떤 여파를 일으킬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설마 그놈의 호기심이 또 도진 것이냐.”

30년 전. 막 성인식을 끝마쳤던 루드비히는 구석진 왕국의 빈민촌에서 원석을 발견했다.

한눈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제 사람으로 거둬들였다.

밥을 먹이고, 검을 쥐어 주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자신은 바텐베르크의 가주가 되었고, 거둬들였던 원석은 보석이 되어 여전히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만큼 루드비히는 레오의 성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너는 변하지를 않는군.”

정말 변하지를 않았다.

특히나 그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은 더더욱.

무인은 무에 죽고 무에 산다고 하던가.

눈앞의 레오는 호기심에 죽고 호기심에 산다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릴 정도였다.

“하하, 저도 이놈의 호기심을 좀 죽여 보려 했습니다만. 어째 관심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더랍니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 레오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리하르트와 모리츠의 대련. 그 후에 직접 맞대어 보았던 검격.

리하르트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비록 수련을 도와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내기 때문이었지만, 리하르트를 향한 레오의 흥미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조금 귀찮고 번거롭게 되었어도.

“고작 호기심으로 행동하기엔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을 터.”

북대륙을 지배하는 바텐베르크. 그 가문의 정예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제1기사단.

그런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직책은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만약 레오가 리하르트와 엮이게 된다면, 가신들 사이에선 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 제1 기사단장 레오가 리하르트를 차기 후계자로 지지한다!

더욱이 중립을 지키던 그였기에, 그 파장은 상당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레오는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리하르트 도련님은 저의 지도를 필요로 하셨고, 저는 그분께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저 그것뿐입니다-, 라고 덧붙인 레오가 눈을 반짝였다.

툭, 툭-

루드비히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그가 곧 입을 열었다.

“허가한다.”

막을 이유가 없다.

바텐베르크의 주인은 그렇게 판단했다.

헛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세력 싸움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그로 인해 제 집안이 소란스러워진다고 해도.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바텐베르크는 끝없는 경쟁에 내쫓기는 전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또, 앞날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레오가 정말로 리하르트를 지지하게 될 수도 있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