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Episode. 08 못난이 모리츠 (3)
카앙-!
연무장의 중심. 모리츠가 난폭한 검술을 선보인다.
그것을 막아서는 것은 리하르트의 기초 검술이었다.
누가 저 모습을 수련 3개월 차라고 볼 수 있을까.
“모리츠 도련님이 이성을 잃으셨어.”
리하르트의 도발에 모리츠가 제대로 넘어갔다.
이미 대련의 구색은 지워진 지 오래였고, 목숨을 두고싸우듯 팽팽한 압박감이 줄다리기했다.
스윽-
둘을 지켜보던 상급 기사 하나가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면 곧바로 둘을 막아설 셈이었다.
지금은 리하르트가 잘 견디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일.
까딱 잘못하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수가 있었다.
“그냥 지켜보십시오.”
“음?”
그런 상급 기사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 아론이었다.
그는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다들 알게 될 겁니다. 리하르트 도련님의 본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는 아론.
그의 얼굴엔 달뜬 희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자, 모두에게 보여 주십시오!’
오늘의 대련 이후, 망나니라는 오명을 벗고, 천재라는 명성을 입을 리하르트를 생각하노라니, 아론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어느새 대련이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평온해 보이는 리하르트에 비해, 모리츠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줄곧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더니, 끝내 체력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적지 않은 구경꾼들의 시선 속에서, 리하르트는 모리츠만을 눈에 담았다.
그는 이 구도를 노리고 모리츠를 도발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반격을 가할 차례.
모리츠가 숨을 들이 마실 때.
파앗-!
리하르트의 다리가 땅을 박찼다.
대련이 시작된 이후 리하르트의 첫 번째 선공이었다.
“헉!”
모리츠의 호흡이 턱, 하고 막혔다.
들숨과 날숨의 틈을 찌르고 들어가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캉, 카강!
다시 한번 연무장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하나 대련의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공격 일변도였던 모리츠의 신형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검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갔다.
그에 모리츠가 발작하듯 검을 휘저었으나, 그의 검술은 이미 리하르트의 머릿속에 각인된 채였다.
“크아악!”
제대로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턱턱 막히는 검로.
그리고 쉴 틈 없이 호흡을 가르고 들어오는 리하르트의 수련검.
‘어째서지?’
모리츠는 자신의 사지가 묶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왜 자신이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거지?
그렇게나 무시하고 얕잡아 보았던 머저리에게?
왜? 왜 내가?
“이건 말도 안돼!”
모리츠의 눈빛이 점점 위험한 기색을 띠었다.
이대로 리하르트에게 패배하면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는 뻔했다.
그 압박감은 모리츠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고오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 불감증인 리하르트와의 대련에서 사용하기엔, 도를 넘어선 행위였다.
이제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리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눈앞의 리하르트에게서 승리하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모리츠 도련님!”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그중에서도 모리츠의 충신인 헨드릭이 특히 심했다.
모리츠가 패배하게 되는 것도 큰일이지만, 마나를 사용해 리하르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그에게 줄을 댄 자신까지 불이익이 미칠지 몰랐다.
판단을 마친 헨드릭은 당장에라도 땅을 박찰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기사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서 리하르트는 저리도 여유로운가.
제 코앞에 마나를 휘감은 검이 들이닥치고 있는 와중에도.
그 순간, 빛이 폭사했다.
카가가강-!
연무장에서 지독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형제는 검을 맞대고 서 있었다.
푸른 마나가 흐르는 모리츠의 검과 신성력을 품은 리하르트 검이 뒤엉켰다.
잠시 힘겨루기를 하던 양 검이 한쪽으로 급격히 치우치기 시작했다.
콰드득-
흙바닥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모리츠의 신형이 사정없이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긴 자국을 만들었다.
신성력은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신성력 자체가 다방면에서 일반적인 마나보다 상격이었다.
발락에 의해 개발된 마나 루트에 그러한 신성력이 질주하자, 리하르트는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이, 이건 대체 뭐야!”
모리츠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저 하얀 빛은 뭐란 말인가.
마나 불감증인 리하르트에게 어째서 저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그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사고조차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꽈악 말아 쥔 리하르트의 주먹이 모리츠의 얼굴에 틀어박힌 것이다.
뻐어억!
마치 고무공을 차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그가 땅을 굴렀다.
이내 연무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연무장.
목석같이 서 있는 기사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검을 늘어트린 채 숨을 고르는 리하르트.
“방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 건가?”
“마나 특성……!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적은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뒤바뀌었다.
누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또 누구는 감탄과 존경을 담아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아론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리하르트의 진면모가 드디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그에게 ‘망나니’라는 수식어는 따라오지 않으리라.
기드가 지금의 리하르트를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종종 리하르트를 아픈 손가락이라 칭하며 짙은 염려를 내보이던 기드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저도 하루 빨리 상급의 격에 도달하겠습니다!’
아론이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 ◈ ◈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아론의 곁에 있던 상급 기사가 중얼거렸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아론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리하르트의 진면모를 알고 있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앞으로 리하르트 도련님은 더욱 거침없이 성장하실 겁니다.”
“하, 하하! 이거 정말 한 방 먹었군. 저분께서 저런 송곳니를 숨기고 계셨을 줄이야!”
상급 기사의 걸걸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마나 불감증이 치료되신 건가?”
“아니, 어쩌면 마나 특성을 숨기기 위해 연기를 하셨던 걸지도 모르지. 아까 그 모습을 떠올려 봐!”
“맙소사! 바텐가의 혈통에게 마나 특성까지 주어지다니!”
“마나도 마나지만 무척 완숙한 검술이군.”
한편 리하르트는 귓가를 울리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들이 기사가 아닌 호사가 같았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특기 - 기초 검술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현재 숙련도 A → S』
‘잘 가. 넌 좋은 제물이었어.’
리하르트는 바닥에 널브러진 모리츠를 내려보며 묵념했다.
사실 검술로만 놓고 보자면 리하르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승패를 좌우한 것은 냉정한 판단력과 집중력.
모리츠는 이성을 잃었고, 리하르트는 집중했다.
그게 다였고, 그게 가장 중요했다.
리하르트는 승자의 여운을 한껏 만끽했다.
짝짝-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리하르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사들 또한 화들짝 놀라 하고 있었다.
“레오 경?”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
루드비히의 오른팔이자, 수많은 업적을 세운 믿음직한 전장의 사령관.
그런 대단한 인물이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껏 박수를 치는 그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가주의 오른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레오는 원체 호기심이 많은 사내다.
그런 그에게 바텐가의 핏덩이들이 대련을 한다는 소식은 참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안 그래도 요새 관심이 가던 리하르트가 그 주역이라니, 레오는 결국 소검궁의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록 가주로부터 받은 업무까지 뒤로 미뤄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아주 훌륭하십니다, 리하르트 도련님.”
짝짝-
손뼉을 치는 레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리하르트가 모리츠에게서 승리할 줄이야.
여태까지 모리츠는 고양이, 리하르트는 쥐의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보니 리하르트가 고양이…… 아니 호랑이었다.
“도련님께서 마나를 사용할 수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불치라 불렸던 마나 불감증이 치료되었다니?
그 새하얀 마나는 대체 무엇일까?
강렬한 호기심이 레오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리하르트를 파헤치고 싶었다.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레오는 들끓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자신은 늘 이게 문제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루드비히도 언제나 이것을 꾸짖지 않았는가.
표정을 가다듬는 그에게 리하르트가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던졌다.
“레오 경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야 도련님들의 대련을 견식하러 왔지요. 덕분에 아주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애들 싸움에 헐레벌떡 달려오기엔, 레오는 너무나 높은 위치에 있는 거물이었다.
바텐베르크 제1기사단의 단장.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서려 하는 자.
바텐베르크의 자제들이 가장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사내.
그게 레오였다.
“그렇습니까.”
덤덤히 대답한 리하르트의 시선이 연무장을 훑었다.
주변의 기사들은 눈만 데구르르 굴리며,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리츠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자들이었다.
레오까지 온 마당에 괜히 이곳에 더 있다간, 어떤 덜미가 잡힐지 몰랐다.
어찌 됐든 지금 이 상황은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대련이었으니까.
그들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이지? 여긴 내 개인 연무장인데.”
동시에 들어 올린 손가락은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모두에게 잊혔던 모리츠가 널브러져 있었다.
“저 형, 저대로 두면 골병들지도 몰라. 얼른 데리고 가라고.”
그제야 기사들이 잡힐세라, 연무장을 다급히 빠져나갔다.
코뼈가 주저앉은 모리츠는 헨드릭의 등에 업힌 채로 퇴장했다.
이윽고 소검궁의 개인 연무장에는 리하르트와 아론, 그리고 레오만이 남았다.
그에 레오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썹이 까딱였다.
마치 너는 왜 안 나가냐, 라는 듯한 태도로.
“하하! 너무 눈치 주지 마십시오!”
레오는 병적일 정도의 호기심을 제외하면 상당히 유하고 능글맞은 성격이다.
지금도 그는 넉살 좋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리하르트의 눈짓을 언짢아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레오가 리하르트의 몸을 훑었다.
“아까 전의 대련에서 크게 다치진 않으신 것 같군요.”
“뭐, 그렇지요. 조금 지치긴 했지만.”
“역시! 그러시면…… 저와 대련을 해 보시지 않으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