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Episode. 07 신성력 (3)
“하.”
루드비히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마법가들의 기습을 받았을 때에도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제 아들이 당돌하게 그의 몸으로 흘려보낸 마나.
성스러운 기운을 한껏 품은 그것은 루드비히에게 활력을 주고 있었다.
아니, 활력 정도가 아니라 신체 능력을 증가시키기까지 했다.
‘힘이…… 솟는다.’
주먹을 꽈악 말아 쥔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천지를 울릴 힘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더 강한 힘이 솟았다.
이는 루드비히에게 엄청난 놀라움을 주었다.
대륙 최고의 기사, 루드비히 바텐베르크.
정상에 오른 이후, 어지간한 영약이나 아티팩트 따위는 그의 무력을 키울 순 없었다.
그릇에 담긴 물을 바다에 부어 봤자 티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
그러나 지금 그의 몸속을 맴돌고 있는 신성력은 달랐다.
분명 큰 차이는 아니었으나, 분명 눈에 띌 정도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게 너의 특성인가.”
극히 희박한 확률로 발견된다는 마나 특성.
그게 여태껏 제 골치를 썩이던 아들, 리하르트가 지니고 있었다니.
루드비히의 시선을 받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신성력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라고 덧붙인 리하르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신체 능력의 증가가 느껴지십니까?”
“그렇다. 확실하게 증가했군.”
가주의 대답에 리하르트는 확신을 굳혔다.
신성력의 버프 효과.
그것은 대상의 능력을 일정 비율로 상승시켜 주는 것이었다.
대상이 얼마나 하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든, 아니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일정한 상승률을 보여 주는 힘.
무력의 격이 높아질수록 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알면 알수록 굉장한 특성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루드비히는 리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제 아들이 품고 있는 마나, 아니 신성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확실히 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양.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사실 마나 불감증이 완치된 것은 오늘입니다. 그동안은 조금씩 증상이 완화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저주와 같은 불치병을 완치시켰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군.’
그저 의심할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아들이다. 그런 만큼 그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수많은 영약을 탐하면서까지 치료하고 싶어 했던 마나 불감증.
그것이 완화되어 마나를 느끼게 되었는데도 여태껏 말을 하지 않았다니.
아무리 지금 리하르트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해도 가주로서는 절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마나 둔감증이었지만, 마나 불감증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
애초부터 리하르트가 자신의 성격을 꾸며 낸 것이라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랬다면.
그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기사들의 보고를 통해 들었던 리하르트의 수련 내용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마나 불감증이란 불치병이 어느 날 갑자기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해도, 없던 재능이 생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날 수 없는 새가 아니라 날지 않고 있던 새였다는 걸까.
그것도 아주 커다란 날개를 숨긴 채.
“큭!”
기드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목숨을 걸고 드래곤을 잡으러 갔건만.
루드비히는 지금껏 자기 자신을 숨겨 온 아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재밌어지겠구나.”
그저 후계자를 결정짓는 것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리하르트의 손등에 새겨진 각인.
기이하게 비틀려 있는 그것이 결정을 굳혀 주었다.
“아버지.”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똘망똘망 뜬 눈을 깜빡이는 것이, 척 봐도 뭔가를 바라고 있는 모양새였다.
“제가 이제야 남들과 같은 조건을 얻었습니다만…… 시작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조건이라…….”
되도 않는 소리에 루드비히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의 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감정 표현이 다양했다.
“특성 보유자인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리하르트가 뭘 원하는지는 그도 대충 예상이 갔다.
이제야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으니 영약이라도 구해 달라는 것일 터.
그래도 그렇지. 같은 조건이라는 말은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은가.
특성이라는 것은 겨우 그 정도로 표현될 만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리하르트의 신성력이라는 것은 더욱이.
“불감증이 완치되고 나서야 느꼈습니다. 제 마나 하트에 쌓여 있는 마나가 얼마나 보잘것없을 정도로 적은지…….”
“말이 길구나.”
루드비히는 발락처럼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리하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영약 좀 구해 주십시오. 덤으로 좋은 무구도 말입니다. 아, 그리고 스노우폴에서의 전투로 제 호위 기사인 아론의 애창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 낸 후 멋쩍게 웃음을 터트리는 리하르트.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주의 앞에서 이런 예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러나 리하르트는 지금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솔직히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너무 늦은 상황이니까.’
금수저를 물고 있으니 금을 떠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아론의 창까지 구해 달라는 건 반쯤은 무리수였다.
그래도 리하르트는 될 수 있으면 그에게 좋은 창을 구해 주고 싶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가주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루드비히는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쾌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슬하에 네 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흘러나오는 기세에 겁을 먹기 일쑤.
아무리 그가 냉정한 철혈의 기사라지만, 가끔은 씁쓸할 때가 있었다.
“건방지구나. 감히 호위 기사의 것까지 부탁하다니.”
그래서 그렇게 말을 할 때에도 그의 말투는 그리 딱딱하지 않았다.
“아론도 제 사람입니다. 최대한 좋은 것을 구해 주고 싶은 욕심에 그랬습니다.”
“흠. 좋다. 드워프들에게 연락을 보내지.”
흔쾌히 떨어진 수락에 리하르트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단, 영약은 구해 주지 않겠다.”
“예?”
잘나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영약을 구해 주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리하르트는 의문을 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약만큼은 구해 주리라 예상했는데?’
마나 불감증이 완치된 아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영약이 아닌가.
오히려 안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 무구는 수락했는데, 정작 영약이 안 된단다.
가주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기드가 너를 위해 드래곤 하트를 구하러 갔다.”
그 탓에 리하르트에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좀 전보다 훨씬 큰 의문이.
“드래곤 하트를 말입니까? 그게 무슨…….”
단번에 섭취할 수 없어, 수차례에 걸쳐 나눠 먹어야 할 정도로 순도 높은 마나를 품고 있는 지고의 영약을?
갑작스레 떠난 기드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나갔다니. 그것도 자신을 위해?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놈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결심을 한 모양이지. 대뜸 찾아와서 드래곤을 사냥하고 오겠다더군.”
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말이다, 라고 루드비히가 덧붙였다.
리하르트는 하마터면 가주 앞에서 이마를 부여잡을 뻔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 그 노인네가 나이 생각을 못하고…….’
리하르트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어디 동네 똥개인가. 그 이름에 걸맞은 최강의 종족인 괴물을 어떻게 사냥하겠다고.
“어째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것은 그의 선택이고 각오다. 나는 그것을 임무라는 명분으로 존중해 준 것이다.”
“……알려 주십시오. 기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기드와 제3기사단은 홉슨 산맥으로 향했다.”
홉슨 산맥.
바텐가에서 북동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홉슨 산맥이라면…….’
가주의 말에 리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에 따르면 그곳엔 어린 드래곤이 살고 있다.
그래도 드래곤쯤 되면 갓 태어나도 상급 기사를 잡아먹을 정도로 강력한 괴물.
리하르트는 기드를 찾아가 뜯어말릴 생각이었다.
“그를 말릴 셈인가.”
“그렇습니다.”
가주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늦었다. 이미 기드는 담금질에 들어섰다. 네 달 간의 준비 기간을 갖기로 했다.”
“…….”
리하르트가 입술을 짓씹었다.
‘담금질까지 하다니.’
물론 그것을 끝마치면 드래곤이라도 승산이 있다.
‘그래도 그 노인네 나이가 몇인데.’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도 수명이 크게 깎일 것이다.
최소한 기사로서의 생활은 불가능하겠지. 더 나아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담금질은 생명을 대가로 큰 힘을 얻는 수단이었다.
마법가에선 이 행위를 ‘무식한 쇠질’이라고도 불렀다.
‘말 그대로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수련을 거듭하는 거지.’
보존식을 씹으며 잠도 자지 않고, 한 번, 한 번의 휘두름에 온 정신을 담아 수련을 거듭한다.
애초에 보통 정신력으론 꿈도 못 꿀 일.
그런 고행을 끝마치면 단기간 동안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단계 더 높은 격에 억지로 발을 들이미는 꼴이었다.
그만큼 강한 부작용과 함께.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담금질에서 억지로 깨우면 정신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가주의 말에도 리하르트는 눈을 빛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드래곤 하트도 얻고, 기드도 잃지 않을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