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Episode. 07 신성력 (1)
마나 루트.
그것은 마나가 체내를 순환하는 경로다. 종족마다 그 경로와 특징이 상이한데, 예를 들어 오크의 루트는 굵고 단단해 몸을 쓰는 투사로서의 적성은 최고였다.
마법의 종족인 엘프는 루트가 얇은 대신에 굉장히 탄력적이었다. 복잡한 마법을 엮어 내는 데 최적화된 케이스다.
인간은 그들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뭘 하든 제한이 적고, 나쁘게 말하면 어중간하다는 평을 듣는 종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대륙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武)와 마법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강인한 투사인 오크도 마법 앞에선 큰 힘을 쓸 수 없었으며, 마법의 대가인 엘프도 기사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건…….’
나는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 마나 루트가 변했다.
오크보다 훨씬 더 굵으면서도 엘프보다 탄성이 뛰어나도록.
인간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루트.
발락이 개발해 낸 그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손을 쓴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시험의 각인을 개방시키면 루트도 전수해 달라고 떼를 쓸 셈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선물을 주다니.
활성화된 마나는 새로운 루트를 타고 빠르게 순환했다.
처음 마나를 접했을 때처럼 느낌이 새로웠다.
“새로운 루트에 신앙을 순환시킨다면…….”
나는 아직 신앙을 사용하는 방법이 미숙했다.
그저 무식하게 끄집어내는 것이 전부였으니.
이제 해결할 방법이 보였다.
“도착하면 연습을 좀 해 봐야겠어.”
◈ ◈ ◈
스노우폴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가 떨어진 탓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하기로 했다.
벌써 내일이면 바텐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따듯한 차를 건네며 묻는 아론에게 고개를 저었다.
화르륵- 피어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아 상태창을 열람했다.
[호르(리하르트)] [최하급 신격]
▶ [교단 레벨 - 1]
□ 신도 수 - 12 □ 신앙 - 5,136
□ 권능 [신도 임명] [기도 받기]
□ 해금된 직위 - [최하급 전도사] [최하급 성기사] [최하급 사제]
스노우폴의 신도들이 기도를 잘 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틀 만에 신앙이 두둑해졌다.
며칠 전만 해도 하루에 180 정도씩 들어오던 신앙이 이젠 1,400~1,600씩은 들어오고 있었다.
‘신도 수가 깡패로군.’
마음 같아선 대륙을 돌아다니며 신도들만 모으고 싶을 정도였다.
신앙 수치에서 눈을 돌려 이번엔 ‘해금된 직위’ 목록을 살폈다.
최하급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아 그 윗단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
손가락을 들어 글자들을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세부 사항이 눈앞에 나타났다.
[최하급 전도사 1/5], [최하급 성기사 0/3], [최하급 사제 0/2]
“흐음.”
난 슬쩍 아론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성기사가 되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오러만 다룰 줄 알게 되면 날아다닐 텐데.’
오러 자체가 기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것의 유무가 중급과 상급의 격차라고 봐야 했다.
특히 아론의 경우엔 더더욱 차이가 컸다.
‘오러를 다루고 나선 못 뚫어 내는 게 없었지.’
그가 품고 있는 마나는 무척 특별하기 때문이다.
극히 희박한 확률로 타고나는 마나 특성 보유자. 그게 아론이었다.
후에 기사들은 아론의 오러를 보고 ‘피어싱 오러’라고 불렀다. 상대의 오러마저 비집고 파고들어가 꿰뚫는 기괴한 특성 때문이다.
워낙 특이한 능력인 탓에 컨트롤이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왜 그러십니까?”
이제야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아론이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싶어서.”
아론은 오늘 하루종일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는 듯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데스나이트와의 일전 이후부터 그랬다.
내 물음에 가만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마나 루트가 변해 있습니다.”
“……뭐라고?”
지금 얘가 뭐라 한 거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설마 발락이 아론에게도 손을 썼던 걸까.
“훨씬 더 굵어졌다거나, 탄력이 강해졌다거나?”
“엇,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황당함이 몰려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발락, 이 양반!’
이렇게 통이 클 줄은 몰랐다.
아마 나와 아론이 쓰러져 있을 때 같이 해 준 것 같은데.
아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른 수련을 해 보고 싶어 근질거리는 것을 참느라……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창귀가 아니라 창신이 되겠는데…….’
어쩌면 아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상급의 경지에 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지겠지.
‘잡아야 한다.’
욕심이 생겼다.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직 재능이 개화하지 못한 지금 잡을 기회였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도련님.”
“으응?”
아론의 눈빛이 어쩐지 뜨거웠다.
“도련님께 드릴 말도, 들을 말도 많습니다. 하나 지금은 이 사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상급 기사가 된다면…… 저를 도련님의 직속 기사로 받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마치 짝사랑하던 상대한테 고백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아서 내 곁으로 와 주겠다니.
나야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지금 당장도 받아 줄 수 있어.”
내 말에 아론이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웃는 건 오늘 처음 봤다.
“아직은 저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장 어림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날 탐탁지 않아 하던 그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충신이 되었다.
흐뭇한 감정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어색했다.
물론 그간의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친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속 기사가 되겠다고 할 정도는 아닐 텐데.’
다른 바텐가의 핏줄에 비하면 아직 나는 약해 빠졌다. 특히 후계자로 확정되다시피 한 둘째 형은 5년 전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셋째인 모리츠는 뭐…… 그냥 그렇다 치고.
‘굳이 이유를 묻지는 말자.’
괜히 말을 꺼냈다가 마음이 변하면 어쩌겠는가.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두말은 없어. 네가 상급 기사가 되면 내 직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다만 단단히 못 박아 둘 뿐.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이기에, 이렇게 다짐을 받아 두면 뒤통수 맞을 일은 없겠지.
아론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런 걸 두고 겹경사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 ◈ ◈
이튿날 오후.
바텐가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일주일의 외출이었을 뿐인데 침대가 왜 이리도 반가운지.
늘어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자, 이제 연습을 해 볼까.”
눈을 감고 신앙을 움직였다.
굵게 확장된 마나 루트를 따라 순환시키자 온몸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이게 훨씬 더 효율이 좋아.’
무식하게 끄집어내 사용하는 것보다 루트를 따라 순환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10의 신앙으로 12, 13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것으론 부족했다.
체내에서 순환시킬 뿐일진대, 몸 바깥으로 빛이 새어 나온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마에 물든 이라면 누구든지 감지할 수 있을 터.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끊임없이 신앙을 순환시키며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마나 하트에 신앙이 닿았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10의 신앙이 심장에 먹혔다.
현재 보유하고 신앙은 오늘 들어온 것까지 합해 6,500 정도.
이 정도면 마나 둔감증을 완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일단 이 족쇄부터 푸는 거다.’
우선 100의 신앙을 마나 하트에 투입했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아직 변화가 느껴지진 않았다.
“……이번엔 일천!”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많은 신앙을 한 번에 때려 박았다.
설마 이렇게 해도 안 되려고?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완치가 아니라고……?”
뭔가 이상했다. 조금만 투자하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신앙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그냥 완치 수준 아닌가?’
눈을 감고 주변의 마나를 느꼈다.
마나 둔감증 치고는 선명한 감각이었다.
아니, 솔직히 마나를 감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둔감증’ 꼬리를 달고 다니는 것은 영 찝찝한 일.
“후…… 다시 일천 투자.”
어차피 이젠 하루에 1,400 이상의 신앙이 들어오고 있는 상태.
눈을 딱 감고 다시 한번 질렀다.
『마나 둔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
대체 이게 뭔지. 고개를 숙여 가슴을 쳐다보았다.
“하, 좋아. 어디까지 처먹나 두고 보자.”
신앙이 눈물 나게 아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치료를 안 하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먹이고 먹여 2,000의 신앙을 마나 하트에 투자할 때였다.
이변이 일어났다.
“뭐, 뭐야!”
일으켰던 2,000의 신앙을 먹어치운 마나 하트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던 마나가 루트를 타고 미친 듯이 순환했고, 동시에 제멋대로 신앙이 활성화되었다.
그것도 내게 남아 있는 것 전부.
“스톱! 안 돼!”
그러나 마나 하트가 내 말을 듣는 일은 없었다.
남아 있던 모든 신앙이 순식간에 마나 하트에 먹혀 사라졌다.
황당한 결과에 눈만 끔뻑일 때,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마나 둔감증이 완치되었습니다.』
『마나 하트와 마나 루트가 신앙을 품습니다.』
『특성 - 신성력을 획득하였습니다.』
“…….”
멍하니 손을 들어 올려 마나를 뽑아 보았다.
하얀 빛무리가 반짝인다.
대륙에 몇 없는 특성 보유자.
“하…… 하하.”
이제는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