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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7화 (17/216)

17화. Episode. 06 스노우폴의 위기 (3)

“으음…….”

얼머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촌장의 집이었다. 밖이 조용한 것을 보니 상황은 전부 정리된 모양이었다.

『최하급 전도사 - 메리…….』

『로먼으로부터…….』

『프리아로부터…….』

『기도를 올린 자들에게 활력과 행운이 감돕니다.』

시스템 창이 눈앞을 한가득 메웠다.

이틀이나 누워 있던 건지 신앙이 총 두 번씩 들어왔다.

다 합해서 약 1,800정도 되는 신앙.

성스러운 기운이 온몸에 가득 충만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뻐근하면서도 개운한 게, 무언가 변한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디가 변한지를 모르겠다.

한참 동안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 성자님! 깨어나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촌장, 로먼이 나를 보곤 호들갑을 떨어 댔다.

방금 저 할배가 뭐라 한 거지?

“성자라니?”

로먼은 내 말에 답도 않곤,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보게들! 성자님께서 깨어나셨다네!”

집 안에 있는데도 밖에서 그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들려 왔다.

이렇게 있다가는 이 좁은 집에 사람으로 가득 찰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입었던 상처는 전부 나은 상태였다.

분명 발락이 포션이라도 뿌려 준 거겠지.

덕분에 약간의 근육통만이 느껴졌다.

“성자님이시다!”

문을 열고 나오니 역시나 온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손에는 각각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무사히 쾌유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 이건 저희들이 성자님께 바치는 헌금입니다!”

촌장이 깡마른 몸으로 넙죽 엎드리곤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말린 육포였다.

“가난한 마을이지만…… 이렇게라도 성자님과 신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주민들이 갖고 온 것도 땔감이나 헤진 천 옷 등 내겐 별 필요 없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 이 마을에 내가 뜯어 갈 것이 뭐 있다고.

황당함이 몰려 왔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바라 마지않던 신자들 아닌가.

“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건 물질로 대체할 수 없어.”

말린 육포를 밀어내며 말했다.

굳이 소중한 신자들에게 부담을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아! 역시 성자님……!”

“성자님 만세! 호르 신님 만세!”

“호르! 호-르!”

연신 호르를 외치는 주민들.

촌장의 집 앞이 소란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구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메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뺨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 메리!”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난 분명 보았다.

헤센 남작이 고함을 지르며 메리의 뺨을 후려치고 욕을 하는 것까지도.

“성자, 아니…… 도련님!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그녀는 제 뺨이 부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저 다행이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말 굉장히 멋있으셨습니다! 빛나는 검으로 그 해골을 아주 그냥……!”

잔뜩 흥분한 메리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평소 소심한 그녀는 뭔가에 꽂히면 꽤나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덕에 전도사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헤헤, 많이 놀라셨나요? 로먼 촌장님께서 도련님을 성자님이라 칭하라고 하셨어요.”

슬쩍 로먼을 바라보자 그가 수줍게 두 손을 모았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메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민들께서 신도가 되길 원하고 있어요! 어서 신도 의식을 거행하시죠!”

“신도 의식?”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신도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그냥 신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면 되는 거니까.

가만 보니 메리는 신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창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스노우폴의 인구수는 31명.

자, 과연 여기서 몇 명이 신도가 될 수 있을까.

줄 맞춰 서 있는 주민들의 면면을 바라보니 하나같이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신도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진심으로 신앙을 품은 자만이 신과 함께할 수 있다.”

내 말에도 그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신도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듯한 기색이었다.

언데드로부터 구해 준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신을 믿는 척하기만 하던 그들이 이렇게나 변하다니.

아니면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메리가 열심히 전도해 준 걸까.

“그럼 시작한다.”

첫 번째는 로먼이었다.

줄의 선두에 선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신도 임명.”

『로먼이 신도가 되었습니다.』

『어린 양에게 당신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축하한다. 넌 이제부터 신도가 되었다.”

“아아!”

감격스러워하는 로먼을 뒤로하고 다음 주민을 맞이했다.

순번을 기다리는 이들이 31명이나 되다 보니, 일일이 격려해 주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대상의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안타깝게도 마을 주민 전부가 신도가 될 수는 없었다.

“너는 신앙심이 부족하군.”

“예, 예!? 아닙니다!”

절망 어린 표정을 짓는 젊은 청년에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정말 슬프지만 어쩌겠는가. 신앙심이 부족하다는데.

신도가 된 주민은 딱 10명. 메리와 멜라인까지 포함하면 12명의 신도가 탄생했다.

그나저나 31명 중에 10명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이 사람들, 기도 제대로 안 했군.

◈          ◈          ◈

“메리, 스승님께선 돌아가셨나?”

“네. 상황을 정리하시곤 곧바로 가셨습니다.”

“참 바쁘시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만약 발락이 내 기억과는 다르게 로펀에 있지 않았었다면…….

‘스노우폴 앞마당에 두 동강이 난 채로 굴러다니고 있겠지.’

끔찍한 상상에 고개를 저을 때, 아론이 다가왔다.

붕대를 감은 오른팔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제법 멀쩡해 보였다.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너도 정신 차렸구나.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그가 보란 듯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아론도 발락에게 치료를 받은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오른팔도 며칠만 푹 쉬면 나을 것 같다고 한다.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몸을 날려 만들어 준 몇 초가 나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메리가 귀띔했다.

“아론 경은 어젯밤에 깨어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도련님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다른 기사님들도 그렇고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기사들의 얼굴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야.”

큰 전투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아무도 없었다.

안부를 묻는 그들에게 답을 해 주곤, 곧바로 헤센 남작의 막사로 향했다.

메리의 얼굴을 이렇게 만든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절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도련님…… 혹시 저 때문에…….”

그녀도 그걸 깨달았는지 불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헤센 남작님께서도 제게…….”

“가만히 따라와. 아론, 너도.”

허둥지둥 입을 여는 그녀를 무시하곤 아론까지 대동해 막사에 도착했다.

휙!

“히, 히익!”

입구를 힘껏 제치자 안에 있던 헤센이 화들짝 놀라했다.

분명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나한테 찔리는 게 많아서 그랬겠지.

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증거였다.

“내가 뭐 빠지게 싸울 때, 뒤에서 내 욕이나 지껄이던 헤센이구나.”

“그, 그게……! 오해십니다!”

“아냐. 그건 참을 수 있어.”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근데 이 자식이 내 시녀를 건드려?”

“아악! 살려 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나 이전에 바텐가에 대한 반항이나 마찬가지였다.

바텐가가 어떤 가문인가. 이 변방 왕국의 남작 따위는 감히 비빌 수도 없는 최고의 명문가인 것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성을 잃었던 바람에……!”

그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빌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메리에게까지 고개를 조아렸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깨어나기 전에 그녀에게 입막음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놈은 정말 안 되겠다.

“오늘부로 스노우폴은 너희 영지가 아닌, 바텐가의 소유다.”

순간 남작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저놈이 스노우폴에 미련을 갖을 만한 이유는 딱 하나.

저 설산에 세워진 빙궁을 잃기가 아까운 기색이었다.

‘멍청한 놈.’

나도 웬만하면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다.

“거기에 내 시녀에게 손을 댄 대가로 10만 골드를 청구하겠다. 이의가 있다면…….”

쩌적-

서리 망토의 효과를 발동시키자 헤센 남작의 피부 위로 서리가 내려앉았다.

“끄아악!”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는 헤센.

그럼에도 그의 호위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놈들이 움직이는 순간, 빼도 박도 못하게 바텐가에 반기를 드는 것이니까.

“아, 아게씁니다! 제바 사려 주시씨오!”

남작이 얼어붙은 입으로 싹싹 빌었다.

비루한 남작에게 10만 골드는 뼈아픈 손실이다.

거기에 헤센이 스노우폴에 보낸 지원품 또한 전부 내 소유가 되었다.

“이 땅에서 당장 꺼졌으면 좋겠군. 골드는 내 본가로 보내고.”

그날, 헤센과 병사들은 곧바로 스노우폴을 떠났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다는 듯, 참 다급한 모습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떠날 채비를 갖추곤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 주변엔 신도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특히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로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열었다.

“이곳이 관광지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 저 궁전은 그럴 가치가 있거든.”

사실 다른 용도로 쓰이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터다.

빙궁의 가치는 아름다운 외관뿐만이 아니다.

신비의 존재인 요정이 저 성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 귀족들 사이에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들은 희귀하고 특별한 것에 환장하니까.

비록 변질된 요정이지만, 그건 비밀로 하면 되는 일이다.

“아무튼 너희 마을이 우리 가문의 소유가 된 이상, 그에 걸맞은 모습을 갖춰야겠지.”

“그 말씀은…….”

한마디로 마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 가문의 사람 중에 한 명이 맡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성자님!”

“감사는 무슨. 너희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스노우폴의 주민들의 임무는 아주 막중한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호르교를 전파하기!

“이 마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신자로 만들어라. 귀족들은 건드리지 말고, 낮은 신분의 수행원들을 중심으로 말이야.”

대게 귀족들은 평민을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놈들을 건드렸다간 귀찮은 일만 생길 게 뻔했다.

역시 답은 아래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아주 믿음직스러운 신도가 하나 있었다.

“메리. 네가 잘해 줘야 해.”

“네!”

메리가 힘차게 답했다. 그녀는 마차에 탑승하지 않은 상태였다.

“신께서 제게 맡기신 일…… 하늘이 두 쪽 나도 따르겠습니다!”

어젯밤, 나는 메리에게 이곳에 남아 전도 활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최하급 전도사가 된 그녀야말로 이 일에 적합한 인재였다.

아직 신도가 되지 못한 주민들도 메리와 함께 있다 보면 신앙심이 투철해지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고.

‘신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하니 좋아 죽는군.’

메리는 처음엔 곤란해하던 기색이었지만, 신의 이름을 꺼낸 이후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전도 활동을 펼칠 기세였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성자님!”

“또 오세요!”

마차는 그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겨우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는데, 참 다사다난한 외출이었다.

“씁.”

초장부터 미래가 틀어졌다.

지금은 습격 한 번으로 끝났지만,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는 아무도 몰랐다.

역시 최선의 방안은 무슨 일이 생겨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

이번에 마나 둔감증을 완치시키면, 가주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영약을 왕창 뜯어낼 셈이다.

‘설마 아들의 불치병이 나았다는데 영약 몇 개를 안 사 주겠어?’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부정하고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바텐가에 도착하려면 삼 일이나 걸린다. 그동안은 수련도 불가능하니 마나 호흡이라도 하려 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곤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육안으론 확인할 수 없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껏 활성화된 마나가 생전 처음 보는 길로 흐르고 있는 것이.

그것은 기존보다 훨씬 더 빠르고, 은밀한 운용 방식이었다.

마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온몸 이곳저곳을 활개치고 다녔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충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었다.

설마, 이런 선물을 주고 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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