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Episode. 06 스노우폴의 위기 (1)
“키에엑!”
썩어 문드러진 살덩어리를 베어 넘겼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불쾌한 감촉. 그리고 역한 냄새가 연신 나를 괴롭혔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설왕 세트를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머저리같이 겁에 질려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전장을 지켜보고 있는 마을 주민들도 속을 게워 내기 바빴으니까.
“마을을 지켜라! 놈들을 한 마리도 보내지 마!”
아론이 창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바텐가의 기사들이 이런 언데드들에게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기사들에 대한 걱정을 지우곤 눈앞의 적들에게 집중했다.
쩌저적-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설왕의 한기가 내 마나를 연료로 삼고선 휘몰아쳤다.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언데드의 몸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놈들은 잔챙이다.’
시체의 목을 베어 내며 숲 쪽을 노려보았다.
그곳에서부터 아주 불쾌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변질된 요정인 설왕의 것보다 훨씬 더 진득한 느낌.
‘고위 언데드이거나, 최악의 상황으론 마족일지도 모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둘 중 하나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이 정도의 마기는 ‘변질된’ 놈들 따위가 품을 수준이 아니었으니.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지금 시점에선 스노우폴에 사건이 일어날 일은 없어야 했다.
있어 봐야 몇몇 약해 빠진 마물이 습격하는 정도일 터.
‘일단은 상황 해결부터.’
자꾸만 들고 일어서는 잡념을 털어 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뀌이익……!
덤벼드는 돼지 머리의 시체. 오크 언데드를 베었다.
잘린 단면이 콰드득- 하고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전장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는 중이었다. 아론을 제외하더라도 바텐가의 기사는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 실력자니까.
그러나 그들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흉악한 마기를 느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부상자들 있냐!”
첫 번째 웨이브라고 할까.
30여 마리의 시체들은 이미 정리가 되었다. 숨을 고르며 혹시라도 부상을 입은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우리가 상대한 하급 언데드들은 좀비와 같았다. 물리기라도 하는 순간 똑같은 언데드가 되어 버리고 만다.
다행히 기사들의 활약으로 감염된 이는 없었다.
“와아아!”
그 순간 주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 저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모든 사태가 끝났다는 것처럼.
개중에는 선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
그때 아론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저들과 함께 대피하십시오.”
“아니. 이 주변에 존재하는 마을은 이곳뿐이다. 저들을 이끌고 도망쳤다간 낙오될 거야.”
그들을 두고 퇴각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차분해진 머릿속이 어떻게든 해결책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바텐가의 하급 기사 넷과 중급 기사 하나.
남은 신앙은?
오늘 들어온 것을 합해도, 절망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부족한 상황이다.
‘그나마 가망이 있는 선택지는…….’
짧은 시간.
그 몇십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수많은 선택지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판단을 마쳤다.
“메리!”
“네, 네!”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느낀 것이다. 자신들을 옥죄어 오는 마기를.
진득하고 음습한. 새까만 안개 같은 것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쿵-!
반듯하게 잘려 쓰러지는 거목들 사이로 무언가가 형체를 드러냈다.
“거물이네, 젠장.”
나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피를 덕지덕지 묻힌 묵갑의 기사였다.
그의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까만 두개골이 자리했다.
“……데스나이트.”
6성급의 무력을 갖춘 상급 언데드.
그나마 마족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놈의 뒤로 열다섯 구의 언데드가 매서운 마기를 흘려 대고 있었다. 놈들 또한 중급 언데드였다.
하급 기사 넷과 중급 기사 하나로는 턱도 없는 수적 열세였다.
쿵-, 하고 발을 구른 데스나이트의 안광이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놈이 풍기는 마기가 어찌나 흉한지, 그가 밟고 있는 땅 주변이 거뭇하게 물들었다.
“더러운 기운을 풍기던 것이 네놈인가! 크롬벨 님의 명을 받아, 네놈의 목을 치러 왔다!”
크롬벨.
데스나이트가 지껄인 그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마계에서 넘어온 세 마리의 리치 중 하나였다.
놈들은 일반적인 리치가 아니라, 마계에서도 한 축을 담당하는 마족이다.
나직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언데드의 습격을 받은 이유. 그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신앙과 마기는 서로 상성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마족들은 신앙에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설왕과의 전투에서 뿜어낸 신앙이 놈들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꽈앙-!
데스나이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긴장을 놓지 않았던 덕에 가까스로 막을 수는 있었지만.
“큭!”
몸 내부가 진탕 흔들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놈과 검을 맞부딪친 순간, 마기가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온 것이다.
고통은 둘째 치고, 오물 한 사발을 거하게 들이켠 것 같은 불쾌함이 엄습했다.
“도, 도련님!”
안타깝게도 기사들이 나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머지 언데드들이 짓쳐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난전이 다시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데스나이트는 오직 나만 노렸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비껴 흘려 냈다. 직후 반격을 가했지만, 놈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아.’
데스나이트는 설왕과는 딴판이었다.
설왕만큼의 방어력은 없지만, 오랜 기간 갈고닦은 검술과 강인한 육체는 내가 상대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정말 상급 기사와 전투라도 하는 듯한 기분.
‘거기에…… 마기도 질적으로 너무 높아.’
데스나이트가 줄기줄기 흘려 대는 마기는 ‘변질된’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검에 신앙을 덧씌워 부딪쳐 봐도 오히려 먹히는 것은 내 쪽.
상성 싸움에서 지고 만 것이다.
『특기 ? 초집중 발동.』
하지만 나는 악착같이 버텨 내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당장 내게 필요한 건 신앙이었으니까.
◈ ◈ ◈
“우린 다 끝났어!”
언제 환호성을 질렀냐는 듯, 마을 주민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쾅!
데스나이트의 거검이 땅을 갈랐다.
그것을 용케 피한 리하르트는 반격할 틈도 없이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놈의 검격이 뒤쫓았다. 간신히 막아 냈음에도 리하르트는 땅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절망에 빠졌다.
헤센 남작의 경우는 더 심했다.
“나…… 나를 지켜라. 멍청한 병사 놈들아!”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연신 병사들을 불러 댔다. 귀족의 품위 따위는 공포 앞에 내버린 지 오래다.
“이, 이게 대체 뭔 일이란 말이냐! 왜 빌어먹을 언데드 놈들이 이곳을 습격해!”
귀족인 그가 겁에 질리자, 스노우폴의 주민들은 더욱 큰 공포에 빠져 버렸다.
“다들 기도하세요! 도련님께 신의 힘을 보태 드려야 합니다!”
그때 메리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 또한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지만, 힘겹게 부르짖는 음성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진심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자신이 모시는 신이 도와줄 것이라고.
“자애로우신 신께서 저희를 구원하실 겁니다!”
그렇게 외친 메리가 이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짜악-
이성을 잃은 헤센 남작이 메리의 뺨을 때렸다.
“시끄럽다! 이런 상황에서 신 따위나 찾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처음부터 웃기지도 않았다. 신이 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았어야지!”
신을 찾는 것은 과대망상, 정신병이라는 그의 막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헤센 남작에겐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 공포를 잊기 위한 정신적 도피처로 말이다.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쏠리자, 남작은 모두 들으란 듯이 외쳤다.
“우린 여기서 다 죽게 될 거라고! 빌어먹을! 저 망나니 새끼가 이곳에 오는 바람에 나까지 휘말렸어!”
이미 눈이 돌아가, 저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지도 모르는 헤센 남작.
그 모습을 코앞에서 봐야 했던 메리는 평소 같았으면 두려움에 눈물을 터트렸겠지만,
으득-
지금은 이를 갈았다.
헤센의 말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지금 도련님께 망나니라 하셨습니까?”
메리가 손을 뻗어 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모습을 보십시오! 귀족이라는 감투를 쓴 당신이 오줌이나 지리고 있을 때……!”
리하르트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데스나이트와 대적하고 있었다.
초집중 특기가 최대한으로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온전히 피할 순 없었던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힘겨운 싸움을 하는 상황.
“도련님과 기사님들은 저런 괴물과 싸우고 계십니다.”
메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정작 신도라는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게 통탄스러웠다.
그녀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평소 추위를 굉장히 싫어하던 도련님이 어째서 이런 곳에 행차하신 걸까.
2년 만의 첫 외출인 만큼 더 좋은 관광지도 많을 텐데.
그리고 그 의문은 스노우폴이 언데드의 습격을 받았을 때 풀렸다.
“어떻게 저 숭고한 마음을 보고도 그따위 막말을……!”
리하르트는 신의 계시를 받아 이곳으로 온 것이라고.
이 마을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을 알고선,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메리는 피투성이가 된 리하르트를 보며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부디 저에게도 힘을 주소서!’
그 순간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 시스템 창을 볼 수 있었다면 얼빠진 소리를 냈을 것이다.
『신도 ? 메리, 최하급 전도사 자격 충족.』
『특기 - 후광(E) 습득.』
“아…….”
전장의 소음이 멈췄다. 주변을 환히 밝히는 후광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이스, 메리.”
쿨럭. 피를 뱉어낸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곧 그도 신앙을 쥐어짜, 메리와 똑같이 후광을 밝혔다.
“신께서 그녀를 통해 증명하셨다! 제발 좀 믿어 봐라. 이 멍청이들아!”
“가, 가엾은 저희를 위해 그분께서 후광을 내리셨습니다! 모두 기도를 올립시다!”
그와 메리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그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제발……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신이시여!”
주민들 몇몇이 손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내 순식간에 믿음이 퍼져 나갔다.
『프리아로부터 기도를…….』
『로먼으로부터 기도를…….』
『한슨으로부터…….』
시스템 창이 리하르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순간, 허점을 보인 그를 향해 데스나이트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카드득-!
빛을 듬뿍 머금은 리하르트의 검이 놈의 공격을 막아섰다.
기도를 받았음에도, 상성 싸움은 열세였다.
빛이 조금씩, 마기에 깎여 나갔다.
6성급 데스나이트의 마기는 고작 조그마한 마을의 신앙 정도로는 무리였다.
‘역시 이걸론 부족해.’
지금 주민들은 신도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기도를 올린 상태.
한 명당 얻을 수 있는 신앙의 양은 최대 30뿐이었다.
결국 총 신앙은 일천 남짓.
‘실패하면 죽는다.’
리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주사위를 던져야만 했다.
모든 이들이 숨 죽여 바라보는 상황에서, 그는 모든 신앙을 끌어올렸다.
파아앗-!
그의 온몸에서 밝은 빛이 피어나더니, 서서히 그의 손등으로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에 있던 정육각형의 각인에 억지로 밀어 넣는 모양새로.
빛을 빨아들이던 ‘각인’이 조금씩 뒤틀려 갔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각인에 대한 신격의 간섭.』
곧 리하르트가 일천 남짓의 신앙을 모두 밀어 넣었을 때.
『일시적인 각인 개방.』
『한 자루의 검성(劍星) - 강제 발동.』
빛이 폭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