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Episode. 05 설왕의 아티팩트 (1)
아론은 입안을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그만큼 위험한 놈이었다.
-인간…… 내 친구…….
새하얀 얼음으로 이루어진 인간 형태의 괴물.
녀석은 제가 왕이라도 되는 양 고풍스러운 얼음 왕관과 털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변질된 요정인가.”
아론은 입맛이 썼다.
자연 곳곳에 거주하는 요정은 성격이 온순해 인간과 아주 우호적인 관계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눈앞의 설왕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괴물은 본디 눈의 요정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사나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4성급이라던 리하르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콰드득-
기이하게 몸을 뒤트는 설왕을 향해 아론이 땅을 박찼다.
쾅!
마나를 잔뜩 머금은 아론의 창끝이 설왕의 팔에 가로막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 조각들이 시야를 가렸다.
“……!”
그것을 확인한 아론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쩌저정!
그와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얼음 기둥이 솟구쳤다.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자연을 조종하는 요정의 능력이었다.
“퉤!”
입안에 들어간 얼음 조각을 뱉어 낸 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중급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게 한이군.’
한 단계 격의 상승을 눈앞에 뒀지만, 어찌 됐든 현재 그는 중급의 기사다. 조금 전 한 번의 격돌로 깨달았다.
제대로 된 오러를 엮어 내지 못하는 이상, 설왕의 몸을 뚫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적어도 도련님께서 완전히 벗어나실 때까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쾅! 콰쾅!
아론과 설왕의 격돌로 폭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인간…… 친구하자…….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설왕을 보며 아론이 빈틈을 노렸다.
그의 어깨가 순간 흐릿해지며 찰나의 순간에 수십 번의 창격이 가해졌다.
파파파팍!
다만.
“큭!”
설왕은 아론의 맹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을 향해 얼음 조각이 솟구쳐 올랐다.
아론은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그는 제 손을 바라봤다.
반탄력으로 인해 손이 욱신거렸다.
‘너무 단단해.’
여태까지 상대해 왔던 가디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방어력이었다.
마치 고블린을 상대하다가 오우거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도련님께선 안전하실 것이다.’
아론은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리하르트만큼은 무사히 벗어났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문제는 자신.
눈앞의 마물을 어떻게 따돌려야 할 것인가.
이대로 도망친다면 스노우폴까지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물론 기회는 있었다.
단 한 번, 절기를 사용한다면 승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터.
하지만 실패한다면?
뒷일을 감당하기엔 만만치 않을 일이었다.
아론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였다.
“아론!”
뒤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서 고개를 돌리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지만, 아론은 제 본능을 막을 수 없었다.
“도련님……?”
“미안. 늦었다.”
태연하게 답하는 리하르트.
그의 손엔 가디언들이 사용하던 얼음 검이 들려 있었다.
“어, 어째서 돌아오신 겁니까!”
황당하다는 듯한 아론의 음성이 리하르트의 귓가를 때렸다.
“널 버리고 내가 도망치면 기드를 어떻게 보냐.”
아론은 기가 막혔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왔다는 말인가.
“저는 기사입니다! 도련님을 지키는 게 제 사명이란 말입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아론의 말을 단번에 끊어 낸 리하르트. 그가 얼음 검을 몇 차례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는 기드 대신으로 집사 역할을 맡은 거잖아. 기사는 무슨. 내 직속도 아니면서.”
그것은 절기까지 꺼낼 생각을 하던 아론에 비해서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아론은 리하르트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했다.
“도련님. 제가 다시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까진 리하르트가 도망칠 시간을 벌 자신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절기를 아끼지 않고 사용하리라.
한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느샌가 다가온 리하르트가 아론의 팔을 붙잡은 것이다.
“……!”
“가만히 있어 봐.”
그 순간, 아론은 자신의 팔을 타고 뭔가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얼음 궁전의 한기를 몰아내는…… 굉장히 포근한 기운이었다.
-그아아-!
그때 지척까지 몸을 옮긴 설왕이 팔을 휘둘렀다.
“위, 위험합니다!”
대경실색하며 외친 아론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리하르트의 행동이 더 빨랐다.
서걱-!
아론이 전력을 다해도 뚫어 낼 수 없었던 설왕의 팔이 잘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 것이다.
아론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
리하르트가 휘두른 검날에 새하얀 빛무리가 타오르고 있었다.
‘저건…… 오러……?’
◈ ◈ ◈
리하르트는 검을 치켜세웠다. 하얀 얼음 검을 타고 흐르는 빛 무리가 눈을 어지럽혔다.
“이럴 수가…….”
그것은 아론이 보기엔 영락없는 오러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리하르트가 상급 기사들만의 전유물인 오러를 뽑아낸단 말인가.
리하르트는 검을 수련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사용하기엔, 오러는 터무니없이 높은 격의 기술이었다.
“잘 봐.”
힐끔 아론을 바라본 리하르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 그가 보였던 것과는 다른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어어-! 인간! 친구! 적!
쾅-!
리하르트와 설왕이 충돌했다.
빛을 휘감은 검이 놈의 몸에 닿을 때마다, 커다란 얼음 파편들이 깎여 나갔다.
‘정말 리하르트 도련님이 맞단 말인가!’
아론은 자신이 창을 놓은 줄도 모른 채, 리하르트의 싸움에 집중했다.
리하르트는 첫 실전이라곤 믿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고 여유롭게 설왕을 상대했다.
공격은 피하고.
서걱-!
빈틈이 생기면 날카롭게 베어 낸다.
정석이었다.
아론도 그렇게 설왕을 상대했었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어…… 이기긱……!
설왕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물러설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리하르트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스터 에그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아론이 시간이 벌 동안, 리하르트가 놀고만 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가디언들이 사용하던 평범한 얼음 검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지만, 실제 성능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곳, 얼음 성에 숨겨진 유니크 무기의 조합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조건은 쓰러트렸던 가디언들의 검 열 자루를 한데 모아 깨부수고, 눈으로 다시 뒤덮는 것.
‘아이스 크레센도(Ice crescendo).’
반쯤 재미 삼아 설정했기에, 게임 속에서는 등장하지 못했던 명검의 이름이었다.
서걱-!
하지만 지금은 리하르트의 손에서 빛을 발하며 설왕의 몸을 가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그가 4성의 마물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싫어……! 기분 나쁜, 빛이 자꾸……!
리하르트의 검에 휘감긴 빛은 당연히 오러가 아니었다.
단지 신앙을 긁어모아 검날에 때려 박은 것이었다.
하나 정신이 변질된 요정족에게 성스러운 기운인 신앙은 치명적이었다.
마치 뜨거운 불에 데인 것처럼, ‘변질된’ 한정으로는 오러보다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변질되었다는 것만큼 어중간한 것이 없다.
리하르트가 첫 외출을 이곳으로 정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얻을 것도 많거니와, 상성적으로 아주 유리한 위치였기에.
“자, 빨리 끝내자.”
리하르트가 상태창을 힐끗 바라봤다.
오늘을 위해 남겨 둔 신앙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이 빛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3분.
어떻게든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각오를 굳힌 리하르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특기 - 초집중 발동.』
그때부터, 그의 세상이 달라졌다.
시야엔 오직 설왕의 모습만이 담겼다.
놈의 움직임과 호흡, 동선까지. 그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쾅! 콰앙!
불규칙적으로 솟아오르는 얼음 송곳들을 가뿐히 피해 냈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껏 그의 수련을 도와주었던 초집중 특기.
그것의 진가는 수련보다 전투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목숨이 오고 가는 전투에서 저런 집중력을 보이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으니.
리하르트의 검격이 매섭게 설왕의 몸을 갈랐다.
그에 반해 설왕의 공격은 덧없이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4성의 마물이 리하르트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아론의 눈엔 이제 혼란만이 가득했다.
‘……바텐베르크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것은 리하르트 도련님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아론이었다면 코웃음 쳤을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젠 그 생각을 쉬이 부정할 수 없었다.
◈ ◈ ◈
쿵!
얼마 지나지 않아, 설왕은 자리에 풀썩 쓰러져 자잘한 얼음 파편으로 변해 버렸다.
곧 놈의 시체는 흩날려 날아가 얼음 왕관과 털 망토만이 남게 되었다.
리하르트는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후…… 드디어 얻었군.’
설왕 세트.
이스터 에그, 아이스 크레센도와 설왕이 지니고 있던 얼음 왕관, 그리고 서리 망토까지.
이로써 그가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아티팩트들은 모두 얻은 것이다.
“대체 무엇을 숨기고 계신 겁니까.”
주섬주섬 왕관을 제 머리에 얹는 리하르트를 향해 아론이 물었다.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정말 제 도련님이 그동안 실력을 숨겨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넌 어디 다친 곳 없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펄럭-
리하르트가 말없이 서리 망토를 두르며 말했다.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예.”
아론은 입을 다물었다.
워낙 큰 충격에 바로 알아채진 못했지만, 갑작스럽게 리하르트에게 이질감이 느껴진 것이다.
“제법 어울리지?”
새까만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거기에 고풍스러운 왕관과 털 망토는 리하르트에게 냉혹한 왕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해 주었다.
“……왕자님 같습니다.”
아론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직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하, 정말 왕자 같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리하르트가 아론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볼일은 다 보았으니, 괜히 더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나 아론은 달랐다.
‘그런 거였나……!’
그의 눈에 열망이 서렸다.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은 곧, 하나의 기대감을 자아냈다.
◈ ◈ ◈
눈 덮인 산에서 내려오는 길.
첫 전투를 마치자 몸이 굉장히 무거웠다.
‘아론 앞이라서 무리하긴 했지만…….’
4성급 마물, 설왕.
게임에서야 그 위압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실제로 마주했을 때는 몸을 옥죄어 오는 기운에 침을 꿀꺽 삼켰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전투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아무리 공략법을 알고 있다 한들, 결국 직접 싸우는 것은 나였다.
‘초집중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꿨겠어.’
정말 그랬다.
경험도 없는 내가 최대한 효율적인 움직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초집중이라는 특별한 힘 덕이었다.
설왕의 공격이 눈 깜짝할 새에 코앞에 당도했을 때도, 내 뒤통수를 향해 얼음이 솟구쳤을 때에도.
초집중은 내 몸을 즉각적인 수준으로 움직이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곰에게 쫓기는 사람한테나 일어날 법한 극한의 집중 상태.
그 효과는 전부터 쓸 만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겪어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라, 이게 내 밥줄이었어.’
그것도 아주 두껍고, 단단한 강철 밥줄!
묵묵히 산을 내려가던 아론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도련님, 상급 기사 시험은 언제 치르실 겁니까?”
“상급 기사?”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쳐다보더니, 기껏 한다는 말이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도련님께선 4성의 마물을 쓰러트리셨고, 오러마저 사용이 가능하시니 충분히 합격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텐가에 엄청난 파란이…….”
아, 그것 때문이었나.
이해했다.
내가 설왕과의 싸움에서 갑자기 오러 비슷한 걸 사용했으니,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4성급을 쓰러트린 건 순전히 운이었어. 그리고 내가 검에 씌운 것도 오러가 아니야.”
“그럼……?”
아론의 얼굴에 의문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여기서 더 말했다간 결국은 난 미친 사람이 되기에, 여기서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거기서 얻은 검의 힘으로 해낸 거니까,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린 하지 말라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론이 뒤늦은 대답을 해 왔다.
내가 보여 준 모습이 평소와는 많이 달라서일까.
“조금 더 힘을 기른 이후에 두각을 드러내시겠다는 겁니까.”
“뭐?”
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아론이 눈을 번뜩였다.
“계승의 상징인 왕관…… 도련님의 야망을 알리기엔 더없이 적합한 심벌입니다.”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