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12화 (12/216)

12화. Episode. 04 스노우폴 (3)

“아이고, 도련니임!”

“아, 좀!”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헤센 남작을 노려봤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애원해 대는 남작은 곧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다.

“저 위험한 설산엔 왜 오르신다는 겁니까!”

“그 말은 바텐베르크의 호위 기사를 무시하는 거냐,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냐? 역시 후자겠지?”

“저, 저는 그저 도련님이 걱정되어…….”

그의 말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걱정은 개뿔.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덤탱이 쓸까 봐 그러겠지.”

그 증거로 남작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그는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너희는 얼른 돌아가서 지원품이나 보내라니까.”

“도련님이 헤센 영지에 머무시는 동안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원품은 병사를 시켜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허튼 짓 그만하고 얼른 가라-, 고 그의 얼굴에 쓰여 있는 듯했다.

“아무튼, 아론과 나는 설산에 오른다.”

통보를 가하고, 그의 막사를 나섰다. 그러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왜?”

“모리츠 도련님께서 얼마 전에 중급 기사와 호각으로 겨루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얘는 웬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냐.

“모르는데.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양아치도 바텐베르크의 피를 이었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나?”

“…….”

어딘가 묘한 눈빛인 그를 보다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지금은 중급 기사였지.

자길 무시했다고 창으로 찌르려 드는 건 아니겠지?

먼 미래엔 아론이 ‘창귀’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약간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창만 잡으면 눈에 뵈는 게 없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니.

“얼른 가서 등산 준비나 해.”

“저와 도련님만 가는 겁니까?”

“그래.”

둘만 가는 건 위험하다며 반대를 펼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아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쟤 뭔가 좀 이상한데.’

오늘따라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아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렴 어쩌랴, 저 설산에서 내 몸만 잘 지켜 주면 될 일이다.

◈          ◈          ◈

아론의 등산 준비는 빠르고 완벽했다. 리하르트가 무슨 일로 설산을 찾는지, 그것이 궁금해 서둘러 짐을 싼 것이다.

‘분명해. 도련님께선 무언가 속셈이 있으시다.’

아론은 설산을 올려다보는 리하르트를 보며 확신을 굳혔다.

단순히 등산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터였다.

오늘, 기필코 리하르트의 편린을 알아내고 말리라.

“그럼 출발하지.”

그들은 열심히 눈 덮인 산을 올랐다.

이따금 씩 나타나는 짐승이나 마물은 아론의 손에 숨이 끊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새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마물의 피.

평범하게 살다 ‘리하르트’가 되어 버린 그로서는 상당히 역겨운 광경이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실전을 거듭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더 쉬운 길,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싸늘히 굳어 가는 마물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손등의 각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각인의 문양이 아주 약간이지만 옅어져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 망설임을 느낀 것은 각인이 판단하기에 자질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거였구나.’

비록 각인은 조금 옅어졌으나, 리하르트는 미소 지었다.

대충 감이 잡혔다.

‘결국 잘 싸우고 빨리 강해지면 된다는 것 아냐?’

그의 발목을 붙잡던 마나 불감증. 그것은 신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미증유의 힘으로 극복하고도 남았다.

꽈악-

리하르트는 주먹을 말아 쥐곤, 목적을 상기했다.

그의 목표는 누릴 것을 전부 누리며 걱정 없이 잘 사는 것.

‘물론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더욱 좋고.’

원초적이라면 원초적이고, 평범한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이 세계는 수없이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었으니, 걱정 없이 잘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꿈이기도 했다.

어중간한 힘으로는 실현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았다.

“빨리 강해져야지.”

작게 중얼거리던 리하르트는 저를 바라보는 아론의 시선을 느꼈다.

“뭘 봐?”

“……아닙니다.”

그 후로도 두 사내는 산을 올랐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산의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선 계속 올라간다. 어차피 찾지도 못해.”

흠칫하며 경계심을 높인 아론에게 리하르트가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알고 계신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그들을 향한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동시에 엉클어진 마나의 배열이 아론의 기감에 잡혔다.

그것은 결계 특유의 기척이었다.

아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론. 저 커다란 나무 보이지?”

그때 리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유난히 큰 나무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과연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도련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산에 나무라니, 참 이상하지도 않아?”

“……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아론이 말문을 닫고 다시 나무를 쳐다봤다.

리하르트가 씩 미소 지었다.

“말하려던 거 말아. 저 나무가 결계의 중심이야. 네 마나라면 어렵지 않게 파훼할 수 있어.”

“……!”

아론은 귀를 의심했다.

중급 기사인 그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상급의 결계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결계의 파훼법을 리하르트가 알고 있다니?

한데 그보다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마나를 느끼고 계신다고……?’

이미 결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리하르트가 재촉했다.

“으, 춥다. 빨리 해.”

“……예.”

우선은 도련님의 명령에 따른다.

마음을 정한 아론이 커다란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칵, 창을 찔러 넣은 뒤 마나를 쏟아부었다.

키기긱-

그러자 정상을 가득 채우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론은 잡념을 지우고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뿌지직-

나무의 전체에 균열이 가며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져 갔다.

‘결계가…… 무너져 가고 있어.’

과연 도련님의 말대로였다.

확신을 느끼자, 아론의 창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압!”

콰창!

아론이 기합과 함께 마나를 터뜨리자,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며 그와 동시에 주변의 광경이 일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론은 난데없이 펼쳐진 풍경에 절로 입을 벌렸다.

“저건…….”

궁전이었다.

마을에서도 아주 잘 보일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빙궁(氷宮).

이 시대의 건축 기술로는 꿈도 못 꿀 최고의 성이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들어가자.”

리하르트는 급격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외투를 여몄다. 그의 진짜 볼일은 저 안의 몬스터에게 있었다.

◈          ◈          ◈

“후우-.”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체감상 바깥보다 두 배는 더 추운 것 같은 얼음 성의 안.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곳은…….”

아론이 성 내부의 광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얼음으로 조각된 성은 감탄사를 절로 자아낼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도련님은 이런 곳을 어찌 알고 계셨던 겁니까?”

“묻지 마. 말해도 못 믿어.”

내 대답에 아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마 전부터 그가 자꾸만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말했다가 무슨 취급을 받으려고.’

구태여 아론에게 말할 이유도 없거니와, 더 이상 미친놈 취급받기도 싫었다.

“이제 움직인다.”

“예?”

검을 그러쥐었다.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 잡념은 불필요하다.

“그어어…….”

1층의 홀 중앙에 발을 딛자, 곳곳에 세워져 있던 얼음 동상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가디언.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거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인공의 존재들이다.

즉, 그 말은 이곳의 주인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의 주인은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였지.’

하나 마법사는 죽고, 새로운 주인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아론이 내 앞을 막아섰다.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나…….”

“이놈들 정도는 괜찮아.”

퍼걱-!

가디언의 목덜미에 검을 쑤셔 박았다.

실제 진검으로 무언가를 베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기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가디언들은 그 부담감이 적었다.

물론 일반적인 가디언이었으면 내가 상대도 하지 못하겠지만…….

‘목만 노리면 금방 끝난다.’

난 놈들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제작된 지 오래되어 움직임이 어설프기도 했고, 애초에 강한 무력을 가진 가디언은 아니기에 하급 기사 정도만 되어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끝인가.”

이십여 기의 가디언들은 금방 정리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아론이 처리한 거지만.

그는 놀랐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의 성장이 빠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가디언도 쉽게 처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입 바른 소리를 하는 그에게 대충 답하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음 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          ◈          ◈

“끝입니까?”

아론의 실력은 역시 출중했다. 젊은 나이에 중급 기사, 그리고 상급 기사의 자격을 넘보는 천재다운 솜씨였다.

“3층은.”

나는 검을 늘어트리며 답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2층을 돌파해, 3층의 가디언들까지 모두 쓰러트렸다.

층을 거듭할수록 놈들의 무력도 강해졌지만, 아론에 비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건 장난 수준이야. 놈은 방심하면 안 돼.’

얼음 성의 군주.

모니터 너머로만 보았던 그놈을 떠올리며 아론에게 경고했다.

“긴장을 늦추지 마. 이 앞에 있는 놈은 위험하니까.”

“……예.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아론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서 있는 3층의 끝에 있는 거대한 문. 그곳에서부터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진짜 얼어 죽겠네.”

성능 좋은 냉동고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추위에 약한 나로서는 최악의 환경. 꽁꽁 언 손가락이 아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흘끗 쳐다본 아론이 입을 열었다.

“견디기 힘드시면 밖에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

정곡을 찔렀을까. 아론이 입을 달싹였다.

“저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적어도 3성급 이상의 마물입니다. 역시 도련님께선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4성이야.”

내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4성이라면 중급 기사인 아론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일 터.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련님 말씀대로라면, 토벌대를 구성해야만 큰 피해가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굳이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놈이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론이 생각하기에 나는 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숨어 있던 4성의 마물을 발견했으니, 도련님께선 아주 큰일을 해내신…….”

“이미 늦었어. 저놈이 우릴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

내 말을 증명하듯, 거대한 얼음 문이 끼익- 하고 열리기 시작했다.

“……!”

침음성을 흘린 아론이 이내 각오를 굳혔다. 창을 꽉 그러쥔 손에 핏줄이 솟았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부디 도련님께선 이 성을 벗어나 주십시오.”

고집 부리지 말라는 듯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아론.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는 몸을 돌려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준비를 해 볼까.’

물론 내가 그냥 물러날 리가 없다. 저 혼자 각오를 굳힌 아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디언들의 얼음 검이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