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Episode. 04 스노우폴 (1)
이 게임 속엔 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진귀한 아티팩트일 수도, 특별한 인연이나 기술일 수도 있다.
낫을 든 평범한 농부라도 기연을 통해 일개 기사쯤은 눈 아래로 볼 실력을 가질 수 있다.
그만큼 기연은 효과적이고 빠르게 힘을 가질 수 있는, 이 세상의 복권이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 기연들의 위치와 정보를 모두 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 세상의 창조자였으니.
지금 그의 머릿속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정보들이 저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문제라면, 현재 그는 가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발락은 떠났느냐.”
“예.”
리하르트는 가주의 물음에 답했다. 발락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
제 아들,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가주의 눈이 흔들렸다. 리하르트의 손등에 각인이 새겨져 있던 것이다.
발락이 리하르트에게 관심을 내보이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텐베르크의 혈통에 대한 미련일 것이라 치부했다.
분명 어젯밤 다시 저를 찾아온 발락에게 들었던 일이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놀라웠다.
“그에게 들었다. 근신 처분을 풀어 달라고?”
“그렇습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을 보며 가주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를 보면 항상 겁먹은 채로 피하던 리하르트가 아니었다.
시험 삼아 기세를 끌어올려 보아도, 제 아비를 바라보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리하르트’의 몸에 ‘이지훈’이 빙의된 순간부터 달라진 것이지만,
“변했구나.”
이제서야 한 꺼풀 벗겨진 것이다. 리하르트에 대한 가주의 인식이 말이다.
“이번엔 어디서 무슨 짓을 벌일 셈이냐.”
그리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가주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또 패악질이나 부리려 하진 않겠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 패악질이란건 전부 그 몸의 옛 주인이 벌인 일이었으니까.
‘그 똥을 내가 치우고 있는 거고.’
속으로 작게 탄식하고 있을 때, 가주의 입이 열렸다.
“허가하겠다.”
성공했다!
발락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리하르트가 말한 소원. 그것은 자신을 자유롭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근신을 풀게 도와 달라고.
“큭, 발락이 부탁이란 것도 할 줄 알더군.”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굉장했다.
철혈이라고 불리던 가주답지 않게 피식 웃을 정도로.
그 뒤로 가주는 리하르트와 짧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이내 축객령을 내렸다.
집무실을 나서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는 상념에 잠겼다.
“기드가 돌아오면 재밌어지겠군.”
가주가 알고 있는 리하르트는 결코 날 수 없는 새였다.
최악의 체질로 인해 날갯짓할 의지조차 영락해 버렸던.
그런 리하르트에게 날개가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날개가.
◈ ◈ ◈
며칠 뒤, 나는 마차에 짐을 실었다. 나로서도 시간이 금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외출을 준비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아론을 포함한 하급 기사 다섯과 전속 시녀인 메리가 수행원으로 따라붙었다.
“도련님, 근신이 풀리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나와 함께 마차에 몸을 실은 메리가 홍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는 요 근래 눈에 띄게 얼굴이 좋아졌다.
그 이유는.
“이게 전부 신님의 축복이겠죠!”
신……. 그러니까, 내 덕분이었다.
그녀는 신께 구원을 받았다며, 행복 지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오, 신이시여. 부디 도련님의 앞길을 굽어살피시길…….”
“제발. 기도는 하루에 한 번만 해.”
느닷없이 내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녀가 독실한 신도가 된 건 흡족하지만…….
“어째서죠? 저희의 기도는 그분께 힘이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역시 이건 조금 과한 것 같다.
“신께서도 쉬셔야지…….”
“앗, 그…… 그렇네요! 지금까지 하루에 수십 번씩 기도했는데!”
음, 조금이 아니라 많이 과했다.
이번에는 잘못했다며 재차 기도를 해 대는 메리를 보고 있노라니 골이 다 아파 왔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좀 어떠시지?”
“완전히 쾌차하셨습니다. 의원께서도 깜짝 놀라실 정도로…… 아아, 이것은 구원입니다!”
또 지뢰를 밟았군.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메리였다.
메리의 어머니, 멜라인은 성수 스무 잔을 마시고 완전히 쾌차했다.
그녀도 내 신도가 된 덕에 현재 하루에 얻는 신앙은 180정도.
그럼에도 수련에 성주에, 워낙 쓸 곳이 많아 모이는 족족 써 버린 탓에 현재 모은 신앙은 220이 전부였다.
“메리, 다른 사람들한텐 따로 말 안 했지?”
“그렇긴 합니다만…… 어째서 그분의 은혜를 숨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긴, 널 생각해서지.
듣도 보도 못한 신을 저렇게나 외쳐 댔다간, 미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았다.
망나니 도련님에, 미친 시녀라니.
“신께서는 절박한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려 하신다.”
내 말에 그녀가 깊이 감명받은 듯 두 손을 모았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 낸 공략법은 바텐가 바깥의 순진한 시골뜨기들부터 꼬드기는 것.
특히나 영세한 마을들은 언제나 몬스터나 짐승들에게 시달린다.
이 얼마나 좋은 예비 신도들인가.
게다가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스노우폴 마을. 여긴 아주 꿀단지나 다름없지.’
이두 마차로 삼 일 거리인 헤센 영지의 작은 마을. 거리는 조금 멀지만 그만큼 갈 가치가 있었다.
최북단도 아니면서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기이한 마을이 스노우폴이다.
덕분에 항상 흉년에, 굶주린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는다.
‘훗날 북부 대륙을 떠돌던 마법가의 ‘그놈’이 얻게 될 기연…… 아티팩트들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스노우폴 바로 뒤의 설산에 잠들어 있었다.
◈ ◈ ◈
마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벌써 저 멀리 눈 덮인 거대한 산이 보였다. 기온도 급격하게 떨어지는 중이었다.
“도련님, 여기 외투입니다.”
“고마워.”
메리가 건네는 외투를 껴입었다. 추위에 강하기로 유명한 마물, 호르그의 가죽이라 굉장히 따듯했다.
손사레를 치며 사양하는 메리에게 억지로 외투를 떠밀었다. 비단 메리 말고도 밖에서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에게도 하나씩 쥐여 주었다.
어차피 외투는 많았다. 이 넓은 마차에 한가득 쌓아 놓았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마차가 뚝 멈췄다.
똑똑-
“도련님, 헤센 남작이 마중 나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아론의 목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바텐베르크의 혈통! 리하르트 도련님을 뵙습니다!”
반달 모양의 수염을 기른 남자가 바닥에 붙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 있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추워 죽겠는데 저게 뭐하는 짓이람.
외투 앞섶을 단단히 여미며 창문을 닫았다.
망나니라는 인식은 이럴 때 편하지.
다시 출발한 마차 바깥에서 남작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마차를 호위해라! 개미 한 마리 접근 못하게 막아!”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이 수행원으로 붙었는데 병사의 호위가 웬 말인가.
ㅓ
정복 활동을 펼치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무(武)였으니.
‘그래도 이렇게 대우해 주니, 기분은 좋네.’
마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는 곧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의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스, 스노우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하르트 도련님!”
촌장으로 보이는 이가 눈 덮인 땅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지 그의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0명도 채 되지 않는 주민들이 전부 그 상태였다.
“이놈들! 지금 누구 앞에서 몸을 떨어 대는 것이냐!”
헤센 남작이 추위에 떠는 주민들을 다그쳤다.
죄 해진 옷을 입고 있는 그들과는 달리, 남작의 옷은 두툼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새삼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마을에 고위 계층이 방문할 시, 이런 식으로 온 주민이 예를 표하는 게 이쪽의 관습이었으니.
수행원으로 따라 온 기사들도 당연한 것을 본다는 듯,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내게 이 상황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이건 그냥 미친 거지!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인데!
“리, 리하르트 도련님? 불편하신 점이라도……?”
화들짝 놀라 굽실거리는 남작을 무시하곤, 주민들을 훑어봤다.
그 몰골들은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먹지 못해 삐쩍 마른 것은 둘째 치고, 옷에 난 구멍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바람막이 따위의 기능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아론.”
“예.”
“마차 안의 옷을 저들에게 나눠 줘.”
살짝 눈이 커졌던 아론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말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나왔다.
값비싼 호르그 가죽 외투가 마차 안에서 줄줄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 헤센 남작에게서였다.
“헉! 도, 도련님! 이들에겐 저것의 가치를 지불할 만한 재산이 없습니다.”
“그럼 너에겐 있나?”
내 말에 헤센의 눈알이 데구르르 굴렸다.
비싸기로 소문난 호르그의 가죽이 무려 30여 벌이다.
척박한 땅의 남작가에서 선뜻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액수는 아닐 터였다.
“자, 모두 일어나서 외투를 걸쳐라.”
“그게…….”
“너희에게 주려고 직접 챙겨 온 건데,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
주민들은 선뜻 일어나지 못했다. 헤센의 눈치가 보이는 것인지, 정말 내가 돈을 받을까 봐 겁먹은 건지.
예비 신도님들께 받을 것은 신앙이면 충분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을 쭉 훑었다.
못 먹고, 춥고, 아픈 것이 눈에 보였다.
이것 참.
“메리. 신께 기도를 올리자.”
신의 자비가 필요한 환경이었다.
◈ ◈ ◈
스노우폴의 촌장, 로먼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에는 척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가 호르그 가죽 외투를 입고 있었다.
다름 아닌 북부 대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바텐베르크 가문의 망나니, 리하르트에게서 받은 것이다!
‘정말…… 정말 강매를 하시려는 건 아닌가.’
로먼은 그의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선행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늙은 촌장의 눈에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콜록!”
그때, 마을의 아이가 억눌린 기침을 내뱉었다.
아직 어리고 연약한, 더불어 잘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그 아이에겐, 스노우폴의 추위가 혹독했던 모양이다.
기침 소리를 들은 리하르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순간 로먼은 똑똑히 보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을.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