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Episode. 03 무아지경 (3)
바텐베르크는 북대륙을 지배하는 명실상부 최강의 무가(武家)다.
왕국도, 제국도 이 가문 앞에선 한 발 물러섰다.
더불어 바텐베르크의 현 가주인 루드비히는 대륙 최강의 기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것을 부정한다.
최강의 기사는 루드비히가 아니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내는 바로…….
벌컥벌컥-
“크으!”
와인을 병째로 들이켜는 발락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루드비히가 더 강하다고 세간에 알려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루드비히와 발락은 서로가 인정하는 호적수였으니까.
그 둘의 대결은 언제나 무승부로 끝을 맺었다.
물론, 발락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네놈은 이곳에 술이나 퍼마시러 온 건가.”
“끌, 뭔 소린가. 망할 뼈다귀 놈들 때문에 찾아온 거지.”
성주(聖酒)의 달짝지근한 향기가 루드비히의 집무실에 맴돌았다.
발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 놈들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나?”
그가 바텐베르크에 찾아온 이유.
그것은 대륙을 떠돌던 중에 마주친 세 마리의 리치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보통 리치가 아니었다.
새까만 뼈를 휘감고 있는 기운은 마치 검은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놈들은 웬만한 마법가의 가주보다 훨씬 강했다.
“설마 그 순간에 마력을 공명시킬 줄이야.”
발락의 검이 놈들의 목숨을 끝장내려는 순간, 마력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것은 마력 공명이었다.
개개인마다 마나의 파장은 다르다.
그러나 간혹, 마법을 수련한 쌍둥이는 마나 파장이 같을 때가 있어 각각일 때보다 더욱 강한 힘을 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특수한 경우에나 사용할 수 있는 공명.
어째선지 발락이 상대한 리치들이 그 마력 공명을 사용했다.
그 폭발적인 힘으로 발락을 떨쳐 내곤, 장거리 텔레포트로 도주해 버린 것이다.
“수배령을 내렸지만, 아직 들려오는 소식은 없다.”
“쯧, 쓸모없군.”
루드비히의 말에 발락이 와인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그는 놈들을 놓친 직후, 곧바로 바텐베르크로 향했다.
마침 가주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주들에게 경고할 겸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끝내기엔 영 찝찝한 감이 있었다.
마법가가 위치한 남부 대륙도 아닌, 북부 대륙에 예사롭지 않은 리치들의 출현이라.
보통 일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고서도 바텐베르크의 힘을 빌려 리치들의 행방을 수소문한 것이었다.
그것도 벌써 내일이면 일주일째다.
늙어 버린 자신에겐 시간이 금이었다. 하물며 아직도 마땅한 제자를 정하지 못한 상태임에야.
결국 발락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겠지. 내일 떠나겠다.”
“늙은 몸으로 잘도 돌아다니는군. 슬슬 정착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놈의 제자는 언제까지 찾아다닐는지.
루드비히는 제 호적수였던 발락이 못마땅했다.
아직 중년인 자신과는 달리 발락은 이젠 노인이라고 불릴 만한 나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대륙을 떠돌며, 제자로 삼을 이를 찾고 있었다.
“젠장, 이 넓은 대륙에 쓸 만한 놈 하나 없다니.”
“네놈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이다.”
아무리 검성의 검이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탓이라 해도, 발락의 기준은 너무나 까다로웠다.
애초에 그는 제 자신과 루드비히를 넘어서는 어떤 자질을 원한다고 한다.
그런 자가 대륙에 존재하기나 할까.
루드비히는 평생을 눈 씻고 찾아 봐도 없을 거라 단언했다.
“쯧, 술이 다 떨어졌군.”
“또 리하르트를 보러 가는 건가. 부쩍 관심이 많아졌군.”
빈 와인 병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 발락.
그는 이미 성주(聖酒)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이 며칠 내내 성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망나니를 누가! 술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런 것치곤 매일 리하르트가 수련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만.
루드비히는 집무실을 나서는 발락의 등을 보며 말을 삼켰다.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기대심을 가라앉혔다.
그 발락이 리하르트를 제자로 삼을 리가 없었으니.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락은 리하르트에게 눈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젠 저놈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리하르트가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따악-!
연무장에서 아론과 대결을 펼치고 있는 리하르트.
발락이 기초 검술을 알려 준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허.”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발락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첫날엔 자세조차 잡지 못했던 놈이 이젠 제법 능숙하게 검술을 펼친다.
물론 완숙한 기사와 비교했을 때 다방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분명 재능은 없다.’
검을 쥔 지 일주일도 채 안 돼서 이런 성취를 보일 정도라면, 대결에서도 그 재능이 두각을 드러낼 법도 했다.
하나 현재 대결을 펼치고 있는 리하르트에겐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직하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저 집중력도 자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락이 고개를 흔들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치부했다.
검성의 검은 지금에 와서 상당 부분이 손실되었다.
일인전승으로 전수되는 그 특징상, 후계자가 선대보다 자질이 부족할 경우 검이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는 놈은 많아.’
발락은 수많은 인재, 대륙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 극찬받던 놈들을 죄 살펴보았다.
물론, 그들의 재능은 하나같이 뛰어났다.
그러나 발락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저들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발락 이상의 것을 가진 자가 있을까.
발락의 눈엔 그들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 정도론 자신의 검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내가 그동안 지치긴 했나 보군.’
그런 발락에게 자꾸만 리하르트가 눈에 들어온다.
고작 기초 검술이다.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성취를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 그의 관심을 이끈 것은 따로 있었다.
“후우…….”
저 무서운 집중력.
리하르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두 눈은 상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냥 집중력이 강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상대인 아론조차 섬뜩함을 느낄 만큼의 완전한 몰입.
마치 무아지경을 보는 것 같았다.
“나 참, 저런 놈은 처음 보는군.”
뭐든지 처음 보는 것은 색다른 법이다. 그저 그것 때문에 리하르트에게 눈이 가는 것이라고 발락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도 기회는 줘 볼까.”
발락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한참을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아론.”
대련이 끝났다.
아론의 어깨를 두드린 리하르트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기초 검술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숙련 랭크 B → A』
수련 6일 차의 결과치고는 굉장한 성취였다. 이게 다 신앙과 초집중 덕분.
신앙으로 숙련도를 상승시키고, 초집중 특기를 이용해 수련하자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무의식에 각인된 동작이 저절로 나온다고 해야 하나.’
수련에 완전히 몰입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새에 더 나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빠르게 실력이 느셨습니다.”
아론이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와 리하르트의 대결을 지켜보던 기사들도 놀란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바텐베르크의 피가 개화하신 건가.”
기사 한 명이 중얼거리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들의 눈에 리하르트가 똑똑히 담겼다.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은 강자를 숭배한다. 그런 그들에게 리하르트의 성장은 기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리하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지금쯤이면 성주(聖酒)를 다 마셨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락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리하르트가 인사와 함께 미리 얼음물에 담가 놓았던 성주(聖酒)를 건넸다. 이번에는 특제 성주였다.
무려 30의 신앙을 부여한 귀하디귀한 술이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으니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이다.
“놈, 누가 스승님이라더냐. 다만, 눈치가 늘었구나. 얼음물에 담가 놓다니.”
“하하! 날도 더운데 쭉 들이키시죠.”
리하르트의 성화에 발락이 못 이기는 척 와인의 마개를 땄다.
그 순간이었다.
“……!”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진하고 끈적한 향기가 연무장에 퍼져 나갔다.
“오늘은 특등품이지 말입니다.”
“허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는 발락이었지만, 유독 술 앞에서는 약한 그였다.
벌컥벌컥-
특제 성주가 발락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맛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건, 악마의 술이다.”
“기왕이면 성스러운 술, 성주(聖酒)가 어떻습니까.”
리하르트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발락은 연신 입가에 병을 갖다 대었다.
결국 특제 성주는 그 자리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더 없느냐?”
“죄송합니다. 이건 특등품이라서.”
더 없다는 리하르트의 말에 발락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쉬워 죽겠지만 어쩌겠는가.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리하르트를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이 와인이 뭔지, 어디서 구했는지. 눈앞의 핏덩이는 당최 알려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승님, 혹시 제 성취를 봐 주실 수 있으십니까.”
“되었다. 대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럼 얘기가 빠르지. 리하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정도면 제가 내기에서 이긴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내기를 했었지.”
수련을 시작한 지 삼 일 차의 이야기다.
발락에게 기초 검술의 성취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한 가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흥, 내가 언제까지 머물 줄 알고 그런 내기를 한 것이냐.”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리하르트는 그가 왜 바텐베르크를 찾아왔는지, 언제 떠나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막 소원 내용을 말하려던 참이었다.
“잠깐 네 방으로 자리를 옮기지.”
발락이 선수를 쳤다.
◈ ◈ ◈
발락은 리하르트에게 기회를 줘 보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그냥 떠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숱한 전장에서 발락의 목숨을 몇 번이고 살려 준 ‘감’이었다.
키잉-
그의 손바닥 위로 푸른 마나가 자그마한 검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체 없이 리하르트의 손등에 찔러 넣었다.
“헉!”
리하르트가 화들짝 놀라며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바람구멍이 뚫렸을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손등은 멀쩡했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손등에 육각형의 작은 문신이 생겼다는 것.
“시험의 각인이라고 한다. 만약 네게 합당한 자질이 있다면, 그 각인을 개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발락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너를 내 제자로 받아 주마.”
“아……!”
그제야 리하르트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멍하니 손등의 문신을 바라보았다.
물론, 리하르트는 검성의 후예가 ‘각인’과 ‘성흔’으로써 검을 전수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락이 먼저 나서서 각인을 새겨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죽어라 단련해야 할 것이다. 각인이 네놈에게 자질이 없다 판단되면 사라질 테니 말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쓰디쓴 고배를 마셨지.”
“……알겠습니다.”
죽어라 하고말고.
당연한 소리다.
리하르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주 큰 기연을 얻었다.
역시 아무래도 성주를 계속 찔러 준 것이 효과가 컸던 모양이다.
“나는 내일이면 떠난다. 그전에, 그…… 성주 좀 챙겨 줬으면 좋겠군.”
특등품이면 더 좋고- 라고 덧붙인 발락이 리하르트를 뒤로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떠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안 될 소리였다.
리하르트는 아직 그에게 볼일이 남아 있었다.
“저는 아직 소원을 말하지 않았는데요.”
발락은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쳤을 뿐이었다. 내기의 소원을 말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내놓다니.
이렇게 빌미를 주시면 안되지요-, 라며 리하르트가 능글맞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