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Episode. 03 무아지경 (1)
“도련님, 술을 가져왔습니다.”
단련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보이지 않던 아론이 와인을 들고 왔다.
“발락 경께선 소문난 애주가니 마음에 들어하실 겁니다.”
“그렇긴 한데…….”
난 와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발락은 술을 좋아한다. 그건 명실상부한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발락 좋으라고 술을 갖다 바치는 건 아니었다.
“역시 이것으론 부족해.”
그 괴팍하고 까칠한 노인네는 술만 쏙 뺏어가고 나는 본체만체할 테니까.
“후우.”
와인병을 쥐고 눈을 감았다.
간질거리면서도 따스한 무언가가 내 손을 통해 와인 병으로 스며들어 갔다.
『해당 물체에 50의 신앙을 부여합니다.』
『최하급 성주(聖酒)의 성질을 품습니다.』
와인은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술로 탈바꿈했으니, 발락을 낚을 미끼로는 안성맞춤이 되었다.
“슬슬 회의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 가자.”
아론과 함께 연무장을 벗어나 본궁으로 향했다.
◈ ◈ ◈
“여긴가.”
화려하게 치장된 귀빈실의 문 앞.
나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방에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산책이라도 나간 건가 싶을 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넌 뭐냐?”
거대한 체격과 험악한 인상.
산적 두목도 울고 가게 생긴 노인이 방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가 바로 발락이었다.
“저는 리하르트 바텐베르크라고 합니다. 발락 경께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리하르트? 그 허접쓰레기 말이더냐?”
정수리 너머로 들려오는 노인네의 목소리는 한없이 걸걸했다.
사람 면전에 대고 허접쓰레기라 할 건 또 뭔가.
“흥.”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알 만하다는 얼굴이었다.
“귀찮다. 그 술이나 내놓고 썩 꺼져라.”
발락의 시선이 내가 쥐고 있는 와인병에 향했다.
나는 와인을 슬쩍 몸 뒤편으로 숨겼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발락은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도 썩 좋아하지는 않는 터라, 냅다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발락 경께선 오랫동안 제자가 될 재목을 찾아다니셨다 들었습니다. 이 바텐베르크의 혈통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
잠시 나를 훑어보던 발락이 이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네 형이란 놈도, 그 형의 형이란 놈도. 전부 내게 똑같은 소리를 했지. 하나 내 성에 찬 놈은 없었다. 하물며 너 같은 허접쓰레기에겐 기회조차 아깝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며 문을 닫으려는 그에게 성주를 내밀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애주가답게, 발락은 거의 반사적으로 성주를 받아들었다.
“건강에 좋은 와인입니다. 이렇게라도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가라.”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참으로 냉담한 반응이었다.
아론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차피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다른 스승을 알아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
발락이 어떤 인물인가.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잊혀진 검성의 검을 계승한 검사가 발락이다.
이것은 루드비히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세간엔 그저 굉장히 강한 검사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
“걱정 말고, 우린 나머지 단련이나 하자고.”
미끼는 던졌다.
그 외에도 성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또 하나 더 던져 봤는데, 그라면 눈치 챘겠지.
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 ◈ ◈
“……흠.”
발락은 굳은 얼굴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와인을 건네주는 찰나, 아주 짧게나마 손이 닿았었다.
“그놈이 마나를 갖고 있다고?”
그 순간 이질적인 감각이 손을 타고 흘러들었다.
리하르트가 의도적으로 마나를 흘린 것이 분명했다.
발락만 느낄 수 있게끔 작정하고선.
“마나 불감증이라더니…….”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꽈악-
발락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몸에 급작스러운 활력이 감돌았다.
리하르트가 마나와 함께 흘린 무언가, 그것이 발락에게 활력을 주었다.
요사스러운 기운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밝고 선한 기운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망나니 리하르트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영악한 녀석이었군. 제 나름대로 이빨을 숨기고 있었나.”
발락은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검성의 후계자로서, 제자를 들여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발락의 성에 차지 않았다.
특히 바텐베르크의 혈통은 더더욱.
날 때부터 하늘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들은, 밑바닥부터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하는 검성의 힘과 어울리지 않았다.
“흐음.”
발락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보았던 리하르트는 분명 발락이 알던 망나니가 아니었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했는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이라니.’
발락으로선 그 의외의 모습이 오히려 그의 흥미를 끌었다.
“조금만 놀아 줘 보기로 할까.”
리하르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심심풀이 정도의 호기심일 뿐.
늙은이의 여흥에 지나지 않으리라.
한데 그 여흥에 일대 변화가 찾아온 것은, 무심코 리하르트가 건네준 와인을 마셨을 때였다.
쾅!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발락이 기사 하나를 붙잡았다.
“지금 당장 리하르트에게 안내해라!”
발락에게 1순위는 제자요, 2순위는 술이다. 그런 그에게 성주(聖酒)는 참을 수 없는 악마의 술이었다.
◈ ◈ ◈
나는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미끼의 효과는 굉장했군.’
설마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찾아올 줄은 몰랐다.
“와인이 입에 맞으셨나 봅니다.”
그의 얼굴이 얼큰하게 달아오른 것이, 이미 성주(聖酒)를 다 마신 게 듯했다.
“그건 대체 무슨 와인이냐.”
발락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래 봤자 연신 입맛을 다시는 꼴이 영 아니었다.
“큼!”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곧 그의 얼굴이 제 색을 되찾았다.
마나를 운용해 취기를 몰아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라고 마나가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검성으로서의 자존심일까. 애써 와인에 관심 없는 척하며 운을 떼는 발락.
“발칙한 놈. 마나를 의도적으로 내게만 흘렸더구나.”
그의 말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게 내가 가진 마나 전부였을 뿐이다.
하도 적어 발락만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내가 일부러 마나를 흘린 것은 이유가 있었다.
떠돌이 검사 발락.
그는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제자로 삼을 만한 인재를 물색했으나,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내게 있어선 커다란 기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나와 신앙을 이용해 그를 자극했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단호한 음성에도 나는 덤덤했다.
이미 예상한 일. 평생 대륙을 돌아다녀도 제자를 찾지 못했던 그에게 고작 ‘리하르트’가 눈에 찰 리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동안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지.”
심심풀이라.
그럼에도 난 빙긋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발락의 관심을 끄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 ◈ ◈
“이제 되었다.”
“하아…….”
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초 체력을 알아보겠다는 명목으로 발락이 연무장 외곽을 따라 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추 서른 바퀴는 훌쩍 넘게 뛴 것 같다.
“확실히 어느 정도 단련은 한 모양이구나.”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냉수로 목을 축이며 대꾸했다.
“받아라.”
그가 내게 목검을 툭 던졌다.
드디어 검술을 수련하는 건가 싶었는데, 발락의 음성이 이어 들려왔다.
“네놈에게 내 검을 가르칠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그저 검의 기초만 알려 줄 것이다.”
발락이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호오. 그냥 수긍하는 것이냐?”
“기초도 없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일순 그의 눈이 이상해졌다. 발락의 시선을 무시하며 목검을 주워들었다.
“쯧.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혀를 차던 그가 자세를 잡았다.
심드렁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진짜 적을 마주한 듯이 진지한 얼굴.
“똑똑히 보거라.”
그의 손에 들린 목검이 허공을 가른다.
기초 검술인 만큼 아무런 기교가 없는 베기와 찌르기 뿐이었지만, 발락이 펼치자 그마저도 남달라 보였다.
몇 차례 검을 휘두른 발락이 입을 열었다.
“자세를 취해라.”
“이렇게…… 말입니까?”
어설프게 발락의 자세를 흉내 냈을 때였다.
딱-!
“악!”
그의 손에 들린 목검이 부지불식간에 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검 끝을 눈높이에 맞추란 말이다.”
좀 더 친절하게 알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
얼얼한 정수리에 불만이 샘솟았으나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라지.
언젠간 그의 모든 밑천을 털어 버릴 테다.
“어깨에 힘을 빼라! 검을 어깨로만 휘두를 셈이냐?”
그 이후로도 그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자세 하나를 잡는 데에도 많은 심력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검이 내 정수리로 연달아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크윽! 정수리는 이제 그만……!”
이러다가 피라도 날 것 같아 반항의 목소리를 내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김없이 그의 목검이었다.
“역시 네놈은 더럽게도 재능이 없군. 일찍이 검에 대한 관심은 접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검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내 문제일까, ‘리하르트’의 문제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쓰읍.’
이제 막 시작했는데 발락은 벌써 그만둘 기세였다.
“혹시 압니까? 제게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동대륙의 옛말을 알고 있겠지. 넌 주머니 속의 조약돌일 뿐이다.”
돌아온 것은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팩트.
“…….”
입술을 씰룩이며 묵묵히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발락이 다음 동작을 알려 주었다.
“이제부턴 횡 베기다.”
그 후로부터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횡 베기 다음은 종 베기, 그다음은 찌르기였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내내, 발락의 잔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덤으로 정수리를 강타하는 목검까지.
횡 베기, 종 베기 등 기초 동작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혹사당한 것은 단연 정수리였다.
주르륵-
“피, 피가!”
결국 내 머리는 버티지 못하고 새빨간 피를 뿜어냈다.
“흥. 호들갑 떨지 마라.”
대수롭지 않은 표정의 발락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 머리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싶을 때, 살짝 커졌던 그의 두 눈을 말이다.
“시골 농부를 데려와도 너보단 빨리 배울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의 말에 동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내 눈앞엔 밝게 빛나는 시스템 창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특기 ? 기초 검술을 습득하였습니다.』
『현재 숙련도 - F』
『수련과 신앙을 통해 숙련도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흐흐…….”
얻어맞아 가며 겨우 모든 동작을 완수했을 때 떠오른 문장.
과연 예상한 대로였다.
‘역시 이건 게임 시스템에 중점을 두고 있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게임 속 캐릭터들이 무언가를 배웠을 때 떠오르던 알림과 판박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광명이로다.”
막막할 때마다 나타나 희망을 주는 시스템 창이 이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한편 발락은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무엇이 그리 좋으냐. 드디어 맛이라도 간 게냐.”
이내 발락은 목검을 내려놓았다.
벌써 주변이 어둑해진 것이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모양이었다.
“기초를 숙달하는 데에만 한 평생이 걸리겠군.”
고개를 저으며 말한 발락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다시 한번 내게 실망했다는 것이 그의 뒷모습에서 팍팍 느껴졌었다.
“일주일이었나.”
내가 기억하기에는 발락이 바텐베르크가에 머무는 기간이 그쯤 되었다.
“신앙이 필요해.”
신앙을 퍼부어서 기초 검술의 숙련도를 상승시켜야 한다.
일주일 안에 발락의 마음을 바꿀 정도로 말이다.
타임어택이나 다름없는 상황.
멀어져 가는 발락의 뒤통수를 보며 의지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