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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가 되었다-4화 (4/216)

4화. Episode. 02 사람은 힘들 때 신을 찾는다 (1)

다음 날 아침,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시녀가 음식을 세팅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드가 식사를 준비해 줬었는데.’

아침부터 어색한 느낌이었다.

말없이 식사를 하던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시녀의 얼굴이 꽤나 어두웠던 것이다.

처음, 나를 두려워하던 시녀는 빙의 이후 달라진 내 태도에 조금씩 여유를 찾는 모습을 보여 왔다.

하나 오늘은 뭔가 다른 모습이었다.

‘두려워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직 망나니라는 인식이 있는 건가?’

곧 나아지겠지.

식사를 마치고 연무장으로 가려 할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 아론 마이어입니다. 기드 경이 복귀하기 전까지 리하르트 도련님을 보필하라는 명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멀끔하니 잘생긴 청년이 허릴 꾸벅 숙였다.

그의 소개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기드가 떠나니 대를 이어 손자가 집사가 됐군.’

마치 오늘이 첫 만남인 것처럼 천연덕스레 인사를 하는 아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또 보네. 기드의 손자인가?”

“예.”

아론이 내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참, 기드는 대체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아나?”

어젯밤, 기드를 배웅하고 나서 그가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 시기에 기드가 나설 일은 없었다.

“……임무 내용은 발설할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론이 정중히 답했다.

이리 딱 잘라 거절하니 더 물어보기도 뭐했다.

‘거참, 정말 무뚝뚝하네.’

팔불출 같은 기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론이 화제를 돌렸다.

“단련, 오늘은 안하십니까?”

“……어. 해야지. 연무장으로 안내해.”

◈          ◈          ◈

아론은 어렸을 적의 조부를 떠올렸다.

창 한 자루를 벗 삼아 두려운 것 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의 눈가에 짙은 아쉬움이 맴돌았다.

어떤 이유로 기드가 제3기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아론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그저 기드와 같은 전장에 설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혼자 제3기사단의 임무에서 제외된 이유.

그것은 바로 기드의 부탁 때문이었다.

도련님의 곁에 있어 달라는 그 부탁을, 아론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론은 기드를 존경했다.

어려서부터 창을 쥐기 시작한 것도, 제3 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것도, 전부 기드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기드는 항상 자신보다 완전 남이나 다름없는 리하르트를 챙겼다.

‘그리고 이젠 그를 부탁하신다고요.’

너무나 야속했다.

‘망나니…… 를요.’

아론의 시선이 리하르트를 좇았다.

얼결에 떠맡게 된 도련님이 헉헉거리며 뛰고 있었다.

“후욱, 흐어억……!”

마침 리하르트가 그의 앞을 스쳐 지났다. 벌써 지쳐 흐느적거리는 모습이었다.

“…….”

잠시 고민하던 아론은 그 달음박질에 슬그머니 동참했다.

천연덕스레 나란히 뛰기 시작하는 그를 본 리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헤엑! 왜, 헥…… 왜 따라와.”

“무리하다 쓰러지시면 단련을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제가 적당히 속도를 조절할 테니 뒤따르십시오.”

그리 말한 아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나갔다.

◈          ◈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지금 당장에라도 다리를 멈추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몸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야지만 마나가 흡수되니까.

“이제 한계이신 것 같습니다. 휴식을 취하시지요.”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아론이 말을 건넸다.

함께 뛰고 있건만, 저 혼자 산보라도 나온 듯 평온한 어조였다.

“아…… 직이야!”

난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그가 그에 맞춰 속도를 올려 따라붙었다.

“무리한 훈련을 하다 영영 쉬게 된 사람들만 해도 한 부댑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까지 자신을 연마한 것이지요. 그 의지만큼은 귀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 이거 나보고 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순간 어이가 없어 녀석을 흘겨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마이어 가엔 ‘네 분수를 알라’는 격언이 내려옵니다. 이 경우엔 자신의 한계에 맞춰 훈련을 하라는 의미지요. 정말 한계의 한계까지 말이죠.”

어째 하는 말만 들어선 나를 만류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런데 놈의 표정은…….

정말 쉬실 겁니까?

이대로 포기한다고요?

딱 이런 기색이었다.

나보고 어쩌란 건지.

“좀 떨어져!”

페이스메이커고 뭐고, 이놈이 옆에 있으면 오히려 정신 사납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내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드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으니, 그럴 순 없다더라.

오냐.

내가 널 떨쳐 내고 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때마침 기운을 북돋아 주는 응원도 도착했다.

『신체의 부하로 인해 체내에 잔류하던 마나 중 일부가 흡수됩니다.』

땅을 딛는 발에 힘이 실린다.

당장 넘어갈 것 같던 숨도 제법 안정되어 갔다.

“먼저 간다! 그렇게 힘들면 너나 쉬든가!”

아론을 일별하곤 속도를 한껏 올렸다.

그러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바짝 쫓는 그 얼굴에 묘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저 자식. 그러고 보니까 수련광이었지.’

창귀의 또 다른 이명, 수련광.

아무래도 그 성격이 도진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또 힘이 솟으셨군요. 앞으로 세 바퀴는 더 달리실 수 있을 듯합니다.”

내가 앞서 나가기가 무섭게 추월한 아론이 고개만 돌린 채 말했다.

“……내가 떨쳐 내고 만다.”

나는 속도를 올리며 오기를 불태웠다.

◈          ◈          ◈

고단한 단련의 나날이 흘렀다.

결론적으로, 며칠간 아론과의 단련은 내게 좋은 동력원이 되어 주었다.

“헉, 허억!”

녹초가 되어 버린 몸을 바닥에 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노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괜찮으십니까?”

굵은 땀방울을 매단 아론이 다가와 물었다.

“끄떡없어.”

난 짐짓 허세를 부렸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으나, 본인의 한계를 넘으려 무리하다 땅을 치고 후회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적정선은 지키라고 아론이 말했다.

지금껏 그 적정선을 넘도록 부추긴 게 누군데.

난 대충 손을 휘저어 그를 물리곤 눈을 감았다.

몸 구석구석 덩어리진 기운들이 느껴졌다.

격한 단련 끝에 차곡차곡 내력이 되어 가고 있었으나, 기대만큼 진전이 보이진 않았다.

마나를 흡수함에 따라 체력이 늘어서일까.

‘이제 달리기만으론 부족해.’

하여 오늘부턴 단련의 가짓수를 늘릴 생각이다.

기껏 달궈진 몸이 식기 전에 냉큼 엎드려 자세를 잡았다.

‘팔굽혀 펴기. 이거 다음엔 윗몸 일으키기.’

나는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수련에 매진했다.

◈          ◈          ◈

혹사된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고달픈 것은 내 정신이었다.

“팔의 반동으로 올라오지 마십시오!”

“복근에 힘을 주셔야 단련이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시늉만 하시는 겁니까?”

“단련하고자 하는 부위만 사용하십시오!”

아론, 이 자식…….

끊임없이 관리질이다.

분명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팔굽혀 펴기를 할 때부터 조금씩 내게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운동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는가.

아론의 조언이 도움 되는 것은 사실이라 묵묵히 따랐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옆에서 쫑알거리니 이젠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큰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다 날 위해서 저러는 것이니 한 번만 더 참았다.

대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때론 말보다 스스로 깨우쳐 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응?!”

“큭!”

내 말에 몸을 흠칫 떤 아론이 어째선지 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까, 이놈은.

“……올바르지 못한 자세는 아무런 효과가 없단 말입니다.”

중얼거리듯 말한 그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곁눈질로 이쪽을 살피는 것은 여전했다.

‘마이어가 사람은 남 챙기는 거 좋아하는 게 집안 내력인가 보군.’

기드도 그렇지만, 저놈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저 우직한 얼굴 뒤편에는 열혈 기사가 숨어 있었다.

괜히 대대로 바텐베르크를 보필해 온 것이 아니구나, 새삼 깨달았다.

나는 아론에게 신경을 끄고, 수련에 집중했다.

이제 윗몸 일으키기 몇 개만 더 하면 끝이난다.

배에 힘을 빡 주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복근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흐으으윽!”

드디어 마지막 한 개.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틀었다.

점점 몸이 올라가는 걸 느끼며 최후의 최후까지 힘을 더했다.

“끄으…… 으아아악!”

기어코 가슴이 무릎에 닿았다.

진한 성취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썩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그런데 평소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육신이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체내에 잔류하고 있던 영약의 기운이 대량으로 흡수됩니다.』

기이한 감각이 지친 몸을 내달렸다.

마치 무언가가 급류에 휩쓸려 나가는 것 같기도 했고, 잔뜩 엉켜 있던 실타래가 일순간에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나 둔감증을 갖고 있음에도 생생히 느껴지는 격한 반응.

드디어 첫 발을 내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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