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Episode. 01 신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2)
신앙.
하늘과 땅을 만들고 생명을 탄생시킬 때에도 쓰인 만능의 힘이다.
앞으로 내 생존에 있어 가장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이 신앙이었다.
상태창에 적혀 있던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신앙 ? 1,000]
“일천이라.”
빙의 전에 보유하고 있던 수치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양.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밑천이었다.
신도의 간곡한 기도를 통해 얻는 힘이기에당장 수급할 수 없는 만큼, 최대한의 효율을 내야 했다.
“그렇다고 묵히기만 할 수 없지.”
싸아아-
손끝에 피어오른 상서로운 빛.
그 빛을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바로 이 몸의 족쇄를 풀기 위해.
『대상의 ‘마나 불감증’을 치료합니다.』
『‘마나 불감증’이 완화되어 갑니다.』
『신앙이 부족합니다.』
『‘마나 불감증’이 ‘마나 둔감증’으로 완화됩니다.』
시스템 창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동시에 심장 쪽에서 기이한 감각이 내달렸다.
꽉 막혀 있던 무언가에 아주 자그마한 틈이 벌어진 기분이었다.
“좋아. 효과가 있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일천 중 삼백의 신앙을 써 버렸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마나 불감증.
마나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리하르트를 망나니로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 지독한 것이 마나 둔감증으로 변화한 건 정말 진취적인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차분히 심장의 변화를 느껴 보았다.
그러다 이내 내 몸 안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
“이게 혹시 마나인가?”
안개가 낀 듯 온통 희뿌연 듯했으나, 분명 커다란 뭔가가 몸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야.”
아무리 망나니라 하지만, 이 몸은 대륙 최고의 검술 가문인 바텐베르크의 막내아들이다.
마나 불감증이라는 천형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겠는가.
어릴 적부터 온갖 영약을 먹였을 것이다.
다만,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기에 심장에 쌓질 못하고 몸 전체에 지방처럼 겉돌고 있을 뿐.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에, 기드가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마침 출출했는데. 고마워.”
“별말씀을…….”
기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져 있는 책에 향했다.
“역사 공부는 잘하셨습니까?”
“음, 그냥저냥.”
“…….”
따끈한 빵을 한 입 베어 무는데, 기드와 눈이 마주쳤다.
심사가 복잡해 보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애정, 안쓰러움, 안타까움, 그리고 실낱같은 기대.
기드가 이 몸의 주인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 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도 짐작이 갔다.
이 망나니가 그답지 않게 패악질도 멈추고 생전 쳐다도 안 보던 역사책을 들춰 보니, 혹시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싶을 것이다.
실제론 아예 뒤바뀌어 버렸지만.
“마침 잘 왔다. 할 얘기가 있어.”
호록,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단련을 시작할 거야. 주방장한테 앞으론 기력 보충에 좋은 식단으로 준비해 달라고 전해 줘.”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기드가 눈을 부릅떴다.
뻣뻣하니 굳은 얼굴엔 환희와 충격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다니까.”
몸속에 덕지덕지 끼인 마나,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선 몸을 뜨겁게 달구는 게 최선이었다.
◈ ◈ ◈
기드는 조용히 리하르트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렇게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귓가엔 리하르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단련이라고…….”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누군가에겐 일과나 다름없는 일.
다만 리하르트에겐 무척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는 단어였다.
‘언제였던가.’
기드는 옛 기억을 회상했다.
처음으로 검을 허락받아, 수련용 검을 잡고 뛸 듯이 기뻐하던 리하르트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체력 단련을 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그는 뭇 기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검에 대한 의욕과 총명함은 셋째 도련님보다 낫다고들 했었지.’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변하게 됐다.
아무리 수련해도, 아무리 영약을 먹어도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북대륙 최고의 의원을 불러들여 알아보니, 마나 불감증이란다.
그리고 마나 불감증은 치료가 불가한 병이라고.
그 말을 들은 리하르트는 몇날 며칠을, 처절하게 울었다.
이후, 그는 검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밝고 열정 넘치던 아이는 미소를 잃었다.
해맑음이 머물던 그 자리엔 분노만이 남았다.
깎이고 깎인 마음은 남을 상처 입히는 짓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용의 알에서 태어난 뱀.
적어도 이무기는 될 수 있었으나, 그 가능성마저 스스로 걷어찬 망종.
리하르트를 두고 바텐베르크의 가신들은 그렇게 칭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던 아이가, 어느새 모두의 손가락질만 받게 되었다.
이제 그 곁에 남은 건 기드 한 명뿐이었다.
‘변하셨다. 아니, 다시 되돌아오셨다!’
기드가 소리 없는 환호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염려했다.
마나 불감증.
리하르트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 이유.
마나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은 기사에게 너무나 잔인한 장애였다.
특히, 대륙에 산재한 무가 중 제일인 바텐베르크에선 더더욱 말이다.
“도련님…….”
이제야 다시금 일어선 리하르트,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이었다.
단련하고 단련하다 또다시 주저앉으시지 않을까?
열의로 가득했던 맑은 두 눈이, 다시 죽어 버리는 걸 다시 지켜봐야만 한다고?
“……안 돼.”
기드가 이를 갈았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노인의 얼굴에 결의가 감돌았다.
◈ ◈ ◈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신도부터 모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정확히는 평판.
내가 인식한 것뿐만 아니라, 이 몸의 원주인은 가신들 사이에서도 망나니라 불렸을 정도니 얼마나 인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대뜸 신을 믿으라 외치면 뭐 하나.
미친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다.
우선 당분간은 마나를 흡수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연무장이 어디더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머무는 곳은 소검궁(小劍宮)이라 불리는 궁이었다.
이름에만 소(小)자가 들어가지, 궁의 크기자체는 여느 왕국의 왕성만 했다.
바텐베르크의 저력을 실감하기도 잠시.
‘넓어도 너무 넓잖아.’
우습게도 내 집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도 저 앞에서 한 기사가 걸어가고 있었기에,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리하르트 도련님?”
뒤늦게 날 확인한 기사가 예를 갖췄다.
떡 벌어진 어깨에 멀끔하니 잘생긴 얼굴.
하나 기사라 그런지 우직하다 못해 무뚝뚝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런데 이놈도 어딘가 익숙한 외모였다.
누구더라?
“무슨 일이십니까?”
“아, 연무장에 좀 데려가 줄 수 있나?”
“연무장…… 말입니까?”
“그래.”
“……마침 저도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그가 앞서 걸어갔다.
예상외다. 망나니 주제에 무슨 연무장이냐고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넓직한 등을 멀거니 바라보다, 이내 그 뒤를 따랐다.
◈ ◈ ◈
연무장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곧바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곤 몸을 풀기 시작했다.
“저분은…….”
어떤 이는 처음으로, 어떤 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모습을 본 몇몇 기사들이 숙덕였다.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시겠지. 참 안타까워. 어릴 적엔 검재도 뛰어나셨다던데.”
“뭐, 요즘은 그런 생각도 안 들더군. 이 주일 전까지만 해도 거하게 사고를 치셨잖아.”
“그래서 지금 밖에도 못 나가시고…….”
그리 오래가진 못할 뒷담화였다.
“연무장은 잡담이나 나누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무뚝뚝한 음성.
리하르트를 연무장까지 안내해 준 사내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추, 충!”
“시정하겠습니다!”
그렇게 수다쟁이들의 입을 틀어막은 사내는 시선을 돌렸다.
‘리하르트 도련님…….’
기드 마이어의 손자이자, 제3기사단의 중급 기사, 아론 마이어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 조부가 모시는 도련님과 대화를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리하르트에게 향해 눈길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