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80화
“하지만 선택이라는 것은 방법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나 나는…….”
그녀가 파사를 제압한 이유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파사의 집착을 지울 수 있도록 시간을 줄 것이며, 아미엘 역시 깊은 고민을 하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시간이란 많지 않은 이상 남은 선택지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봉인지를 고치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그리고 그저 지키며 시간을 끌어간다는 파사의 행동에 공감해 줄 수 없었던 것도 한 번 망가진 이것은 다시 고치지 않는 이상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아미엘 님. 이거…….”
“음?”
작게 한숨을 내쉬는 아미엘에게 주안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주안이 내민 작은 주머니를 보며 아미엘이 갸웃하였다.
“이것이 무엇이더냐.”
“크세니아 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주안은 그를 크세니아라 지칭하긴 했지만, 아미엘에게 크세니아란 단 하나뿐인 듯, 그를 그림자라 불렀다.
작은 차이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예.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이곳에 남고 싶다면, 인제 그만 선택을 하라고 하셨어요.”
“선택이라…….”
그 선택이 무엇인지는 주안도 조금은 예상이 갔다.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른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미엘은 고민을 했고,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그런 아미엘의 고민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준비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왜 크세니아 님이…….’
어떻게 보면 이미 아미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가 자신이 크세니아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자라고 해도 크세니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미엘은 그를 크세니아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살갑게 굴고 그 본인처럼 행동한다 해도 아미엘에겐 그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아미엘 님과의 기억이 있기 때문인가. 그분에게도 아미엘 님은 대체 뭐였을까.’
가장 먼저 아미엘에게 다가가 부탁을 한 것도 크세니아였으며, 그 부탁에 순순히 응해준 것은 아미엘이다.
보통의 사이가 아님을 주안도 조금은 알 수가 있었다.
“참으로 무거운 것을 남겨주고 갔구나, 크세니아여.”
아미엘은 주안이 건넨 주머니를 소중한 듯 꼬옥 쥐었다.
그 모습에 주안도, 세냐도, 다른 용들도 아미엘에게 뭐라 말을 걸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아미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곳은 곧 봉인될 것이다.”
“네?”
아미엘의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것은 주안이었고, 오히려 세냐나 다른 세 용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 봉인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모든 것을 바로 잡고, 더 이상의 혼란을 볼 수가 없으니…… 그분께서 손을 빌려준 상황이다.”
“그분……?”
주안이 잠시 갸웃했지만, 이내 하얗게 질린 채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시, 신……?!”
하지만 대체 언제?
그리고 주안이 움찔 놀라며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호수의 물이 점차 밝아져 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런 주안을 보며 아미엘이 말했다.
“성흔이란 본디 신의 힘을 빌려 쓰는 통로……. 네 힘의 원천, 그 자체가 신의 힘이다.”
그것은 주안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니, 신성력 자체가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오직 신실한 믿음, 그것뿐이었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셨겠지. 너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개입하셨을 뿐이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게끔……”
“순리대로…….”
말이 좋아 순리대로이지, 어떻게 보면 더 이상 어긋나지 못하도록 강제로 바로 잡은 것이라고밖에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크게 휘청거렸고, 다시 어지럽혀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용들이나 아미엘, 아니, 주안도 알았다.
언젠가 성흔을 이용해 엘프들이 한 짓을 다시 벌일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용들에 대한 안쓰러움, 아미엘에 대한 약속…….
더해서 인간들과 이종족들에 대한 독립까지.
“세상을 조율하고, 지켜나가고,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이제 인간과 이종족들이 할 일이니……. 이로써 우리들의 의무는 끝입니다.”
하랑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미엘에게, 그리고 주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미엘 님. 그리고 주안 마르티네스.”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용이 직접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에 주안이 매우 당황했지만, 아미엘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는 길, 함께 가도록 하자.”
“네? 아미엘 님?”
그녀의 그 말에 주안이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아미엘은 오히려 이런 주안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드래곤의 힘은 사라졌구나…….”
그리고 그것을 집어삼킨 것은 거대한 신성력.
이 호수 전체를 충만하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주안도 그것을 느꼈고, 아미엘 역시 신성력의 힘을 느끼며 조용히 허공에 손짓하였다.
드래곤의 힘이 남겨져 있지 않은 장소.
오히려 아미엘을 돕는 신성력의 힘은 이제 아미엘에게 그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았다.
* * *
주안이 눈을 떴을 땐, 매우 익숙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조금 친근해져 버린 한 사람이 이런 주안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좀 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까지 흔들며 주안과 아미엘, 그리고 다른 이들을 반겨 주었다.
아니, 사실 그의 눈은 아미엘에게 향해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크세니아의 그림자를 보며 하랑과 카르카노, 사련화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크세니아 님.”
“에이,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면 망할 아버지라고 할까요?”
“……아니, 그건 좀 싫은데.”
하랑의 정중한 태도도 부담스럽지만, 사련화의 차가운 태도는 더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
사련화의 눈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 크세니아의 그림자를 찍어 눌러버릴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사련화 님 왜 저러세요?”
그리고 용과 드래곤의 관계에 대해서 주안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이런 주안의 물음에 아미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를 낳고 돈만 던져주고 집을 나간 아버지를 만나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겠느냐.”
“……비슷해 보이기는 한데, 아미엘 님도 이런 말을 다 하실 줄 아시네요.”
그런 관계라는 것도 놀라긴 했지만, 그런 말을 아미엘이 했다는 것이 솔직히 더 놀라웠다.
“그, 음……. 크흠. 뭐, 일단은 여기까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보니, 거기는 이제 제대로 만들어졌나 봐?”
“성역화가 되어 신이 아닌 이상 더 이상의 개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빨리? 이 아이, 진짜 그분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인가 보네.”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주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꽤 부담스러웠고, 주안은 자신이 무언가를 하였다는 느낌 자체가 없었다.
그저 평소 하던 것처럼, 집을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고친다거나, 치료한다거나 그런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하긴 뭐, 그게 아니라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대충 말을 얼버무린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조용히 하랑에게, 아니, 하랑과 카르카노가 부축하고 있는 파사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한다……. 어차피 가봤자 난동이나 피우지 않으면 다행이지 싶은데.”
“그러지 못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좀 오래 재우고,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 깨운다면 생각이 좀 바뀌겠지. 그보다…….”
그리고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아미엘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배웅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야?”
“…….”
아미엘은 크세니아의 그림자의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는 못 하였다.
그리고 크세니아의 그림자 역시 바로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보다 먼저, 이것을 네가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구나.”
“아, 그거?”
아미엘이 주안이 건네주었던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묻자,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너는 우리랑은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가 용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드래곤들에게 가족은 없고, 이 녀석들에게도 사실 가족이라는 형태를 만들어주지 못했어. 스스로 알아서 만들어내서 참 대견하긴 하지만.”
대견하다는 그 말을 하면서도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세 용들, 특히 사련화가 죽일 듯이 노려보기에 얼른 고개를 돌리며 그가 말했다.
“적어도 너만은 마지막까지 혼자 외롭게, 쓸쓸해하지 말았으면 했을 뿐이야.”
“……그렇다 해서 네 육신의, 드래곤의 정수를 나에게 건네는 것이더냐.”
“뭐, 그렇긴 하지. 내 선택이기 이전에, 저기 높으신 분의 바람이기도 하셨으니까.”
그 높으신 분이 누군지 알기에, 주안이 황당해 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좀 가까운 사이이긴 한가.’
드래곤들에게도 아미엘에게도, 사실 신은 그렇게 먼 존재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네가 신이 된다 해서 나쁠 것은 없고, 이곳에 남는다 해서 그 역시 나쁠 것은 없지. 그저…….”
그리고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아미엘을, 주안을 보며 말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가야 할 뿐이지만.”
“아미엘 님의 모든 것……?”
“수명, 힘, 알려지면 안 되는 지식 등등…….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해서라도 이곳에 남겠다면 가능한 일이지. 세상을 바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한 마디로 아미엘이라는 존재 자체를 바꾸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에서 신에게서 가장 먼 존재로서 말이다.
그 말에 주안이 놀라서 버럭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면, 아미엘 님을…….”
“강요 같은 건 하지 않아. 선택은 아미엘의 몫이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뿐이야.”
어깨를 으쓱하는 크세니아의 그림자의 태도에 주안이 발끈했지만, 이런 주안을 아미엘이 조용히 말려 주었다.
“말했다시피, 이 세상에 더 이상 우리 같은 존재는 필요치가 않아. 그렇기에 남고자 하는 이에게 선택지를 줄 뿐이지. 뭐, 파사 녀석은 애초에 이딴 식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을 거고, 또…….”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슬쩍 사련화를 흘겨보며 말했다.
“사련화, 너는 할래?”
“미쳤어요? 인간 놈들 틈에서 인간이랑 같이 인간처럼 살라고요? 아주 자살하라고 하시지 그래요?”
“……그 전에 날 죽일 것 같네.”
“흥.”
분명 주안은 아미엘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아미엘을 바란 것까진…….
‘……예상은, 했었지…….’
바란 것은 아니나,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였다.
신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이상, 아미엘의 존재 자체가 세상을 위한 길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아미엘이 세상을 망칠 그런 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절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신도 실수를 하는 세상이기도 하니까.
“……너희들은 필요가 없느냐.”
아미엘은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꺼내어 보았다.
작은 구슬들이 몇 개나 있었고, 그것을 보여주자 사련화뿐만이 아니라 카르카노와 하랑마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미엘처럼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의 의지대로, 이 세상을 떠나고자 했다.
그리고 아미엘은 주안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고개를 돌려 크세니아의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너는 어이할 생각이더냐.”
“내 역할은 안내인일 뿐이야. 그리고 그게 끝나면, 뭐, 끝이지.”
“아쉽지는 않느냐.”
“전혀. 어차피 안내가 끝나고 내 역할이 끝난다 해서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크세니아와 한 몸이 되겠구나.”
“이중인격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장난기가 가득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는 거짓이 전혀 없었다.
이쪽 역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 자신의 존재가 바뀌는 것에도 그다지 겁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미엘,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한결같았다.
“아미엘 님…….”
다만, 저쪽은 아미엘에 대해서 그저 대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존재로서 바라볼 뿐이었지만 반대쪽은 전혀 달랐다.
아미엘을 보며,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머뭇거리는 주안.
그리고 그저 조용히 아미엘을 간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세냐.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주안이 나서 그런 아미엘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