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78화
“핫?!”
짧은 숨을 토해낸 주안이 눈을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휑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위로는 찰랑거리는 수면이.
그리고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촉감과 네모난 검은 상자가 시야에 들어 왔다.
“오빠?”
“아, 세냐…….”
세냐가 갸웃하며 다가오자 주안이 잠시 머뭇거리다 검은 상자, 봉인지의 중심인 문에서 손을 떼었다.
“왜 그러세요?”
“그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던 주안이 이내 세냐에게 말했다.
“혹시 나, 이거 얼마나 하고 있었던 거야?”
“네?”
주안의 그 말에 매우 이상하다는 듯 세냐가 갸웃했다.
하지만 주안의 진지한 표정에 세냐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주안에게 말했다.
“한 5분 정도?”
“5분…….”
이전에 주안과 세냐와 함께 갔던 크세니아의 무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된 크세니아의 그림자를 만나고 나눈 대화의 시간은 그보다 더 되었을 것이다.
마치 꿈과도 같은 기분인지라, 정말 주안이 그를 만난 게 맞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응?”
하지만 주안은 자신의 왼손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이건…….”
작은 주머니가 손에 쥐어져 있는 것에 주안은 바로 조금 전,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해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꼬옥 쥐었다.
“일단 꿈은 아니구나.”
“네?”
“아니, 그게 실은…….”
주안이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세냐에게 감출 것은 아닌 듯했다.
세냐는 주안보다도, 다른 그 어떤 요정 아이들보다도 아미엘과 가장 가까운 아이였고 아미엘이 가장 신뢰를 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주안에게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며 세냐가 보고 느끼고 배워 온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주안도 세냐에게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그게, 사실이에요?”
“응. 크세니아 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세냐 역시 그가 거짓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그가 남긴 그림자라 해도 그의 지식과 생각, 생전의 모든 것을 이어 받은 존재다.
“아미엘 님이…….”
“아직 확실하진 않아. 아미엘 님도 고민하고 계신 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이건 세냐에게도 꽤나 큰 충격인 듯했다.
주안도 크세니아의 그림자에게서 아미엘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땐 세냐 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왜 그런 결정을 하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도 고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해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도울 생각이며, 그녀가 만약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그 곁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완전 애들이나 하는 고민이나 하시고 말이야.”
“응? 애, 애들의 고민?”
작게 찌푸린 채 세냐가 그렇게 말하자, 주안은 세냐를 어떻게 위로를 해줄까 고민하다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주안을 보면서 세냐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우리들이 떠나는 것을 더 이상 보지 못 하겠다고, 스스로 떠난다는 것만큼 바보 같은 생각이 어디 있어요?”
“그게……. 그렇긴 하지만, 아미엘 님의 심정을 생각해본다면 이해를 못 할 것도 없잖아.”
“아뇨. 절대로 이해 못 해요.”
“세냐.”
세냐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떠나는 게 싫어서 먼저 떠난다고요? 그러면 남겨진 우리들은요? 우리는 아미엘 님이 느끼던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아미엘만 아픈 것이 아니다.
남겨진 모든 요정들은 아미엘이 느꼈던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아미엘 님의 그 심정,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어.”
“그 기분, 나도 이해하거든요?!”
“응? 그, 그래?”
“우리도 많은 친구를 잃었어요.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엘프들을, 드워프들을, 오크들을……!”
그리고 세냐가 잠시 입을 꾸욱 다문 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재차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건 다 아미엘 님이 꿋꿋하게 버텨주시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힘을 낼 수 있는 거란 말이에요.”
“세냐는 어른이구나…….”
“흥. 어른이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하지만, 그런데 아미엘 님은 우리를 보고 왜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만 다 떠안으려고 하시는 건지…….”
세냐는 그게 못내 아쉽고 슬펐다.
많은 요정이 아미엘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따르며 의지하는 만큼, 그런 아미엘 역시 가끔이나마 자신들을 의지하고 한 번쯤 기대어 와도 괜찮을 텐데…….
그녀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모든 것을 떠안고, 지켜야 할 아이들의 행복만 생각하며 상처만 입고 있다는 것에 세냐는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주안 역시 이런 세냐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주안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주머니에 순간 눈길이 갔다.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전해준 이것은, 분명 아미엘에게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떠오른 듯 주안이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세냐에게 말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크세니아 님이 괜히 내게 이걸 준 건 아닐 거니까.”
“그 할아버지 그림자가요?”
크세니아를 할아버지로 부르던 세냐였기에, 그 그림자에 대한 호칭이 조금 이상하게 꼬인 듯했지만 그래도 세냐로선 최대한 살갑게 말을 한 것임을 주안도 안다.
그렇기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세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분명히 내게, 이걸 주면 아미엘 님이 선택하실 거라고 했어. 다만…….”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이 있다면, 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 말까지는 세냐에게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주머니를 매만지며 주안이 말을 이었다.
“아미엘 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존중해주었으면 해.”
“…….”
“그것만큼은 약속해 줘, 세냐. 우린 무엇이 되었든 아미엘 님의 선택을 존중해 줄 의무가 있어. 그리고 그 선택을 도울 의무도 있고. 안 그래?”
주안의 말에 세냐가 잠시 고민을 하였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미엘이 이곳에 남길 바라는 것은 세냐만이 아니라 주안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런 주안의 말에 세냐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주안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자, 그러면 일단 올라가자. 여긴 대충 끝난 거 맞지?”
“일단은요.”
드래곤들의 마법보단 실력이 떨어진다 해도 세냐 역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이이다.
주안이 완벽하게 복구해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기에 주안 역시 세냐의 말에 안심하며 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자, 가자. 세냐. 아미엘 님…… 도와드려야지.”
“흥. 알았어요.”
작게 콧방귀를 뀌면서 세냐가 주안의 곁으로 날아온 뒤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와 앉았다.
그리고 허공에 손짓을 하자, 이곳으로 왔던 길이 다시 생겨났다.
“설마,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니지?”
“설마요. 이렇게 날아가면 되죠.”
“아깐 왜 이렇게 안 해준 거야?”
“귀찮고 피곤하니까요.”
“……지금은 아니고?”
“지금은 아미엘 님에게 가는 게 우선이잖아요.”
“쳇…….”
아미엘보다 뒷전으로 밀린 것은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입술을 삐죽 나오게 하며 투덜거리게 만든다.
다만, 쿠후후 장난스레 웃는 세냐의 모습은 아미엘로 인해서 혼란스러운 기분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함이기도 하였고 주안 역시 그것을 알기에 적당히 맞춰 주는 것도 있었다.
“자, 갈게요. 꽉 잡아요.”
“내가? 대체 어떻게……. 으에엑?!”
세냐의 말에 갸웃했지만, 순간 몸이 떠오르며 빠르게 물의 길을 따라 날아가자 세냐의 말대로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전해준 주머니를 두 손으로 꼬옥 잡을 수밖에 없는 주안이었다.
* * *
파사는 분명 강한 힘을 지닌 용이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생명체였으며, 그의 힘이 제대로 발휘되는 이 공간. 이 장소에서는 드래곤들마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런 파사는 지금 호수의 수면 위,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아미엘은 이런 파사의 앞에 서서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짧은 힘의 대결이었지만, 그 결말은 매우 간단하게 끝이 났다.
인간의 마법처럼 상대방의 허점을 보고, 환경과 상황을 생각하며 수많은 계산을 통해 마법을 사용하지만, 이들에겐 그러한 과정은 불필요하다.
순수하고 본질적인 힘과 힘의 대결일 뿐이다.
그리고 그 힘의 대결에서 파사가 아미엘에게 완벽하게 밀렸다는 것이다.
“파사…….”
이런 파사의 모습에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하랑 역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의 본질을 잊은 채 인간을 사랑하는 용, 인간으로서의 모습으로 아미엘을 상대한 것이 현재 그의 마음가짐을 알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용의 본 모습이었으면 오히려 더욱 까다로웠을지 몰랐다.
그 육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강력한 무기이며 갑옷이다.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도, 어떤 마법적인 힘으로도 뚫을 수 없는 절대적인 방패이기도 했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에 가까운 재앙을 일으키는 무기이기도 한 그것은 드래곤들의 육체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파사는 그 절대적인 무기와 갑옷, 방패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그에겐 오히려 그것이 더욱 큰 짐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하랑을 상대할 때와는 본질적으로 달랐으니 말이다.
“너는 이 세상에 미련이 매우 많나 보구나.”
파사는 말이 없었지만, 아미엘을 바라보는 그 눈빛만으로도 아미엘은 파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한 듯했다.
그렇기에 조용히 파사에게 더 이상의 힘을 행사하지 않으며 말했다.
“한 가지만 묻고자 한다.”
“말씀하시지요.”
“너는 너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그 후손들의 짧은 생을 바라보며 그들이 하나둘 떠나는 것을 반복함에도…… 그런데도 그 곁에 남아 계속 그들의 후손을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더냐. 어이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더냐. 괴롭지는 않은 것이더냐.”
파사는 어떻게 보면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아이였다.
다른 용들과는 달리 소중한 이들을 곁에 두고, 그들이 하나둘 떠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그러한 존재다.
그 감정, 그것을 파사는 어떻게 견디고 있는 것인지 아미엘은 궁금하였다.
그리고 이런 아미엘의 뜬금없는 질문에 파사가 아미엘의 말에 답했다.
“약속일 뿐입니다.”
“약속?”
“예. 약속입니다. 그 아이들을 계속, 쭈욱 지켜 봐주고 지켜달라는 약속.”
파사가 조용히 아미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을 지키는 것만이 저의 삶이자 의무.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너는 그 약속 외에는 그들에게 그 어떠한 감정도 없는 것이더냐.”
“없습니다.”
단호한 파사의 말에 아미엘은
“너는 역시 집착만이 남은 낡은 존재일 뿐이로구나.”
“제 존재를 당신이 멋대로 정의하지 마십시오.”
“아니. 나뿐만이 아니다.”
아미엘이 조용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파사 역시 고개를 들고 아미엘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랑이 그렇고, 사련화가 그랬으며, 카르카노의 눈동자가 그러하였다.
안타깝다는, 가련하다는, 그리고 안쓰러운 형제를 보는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