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72화
“이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느니라.”
하지만 아미엘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이대로 이곳을 그냥 둔다는 것은, 언젠가 터질 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이다. 그게 무너진다면, 거기에 휩쓸리는 것은 이 대륙만이 아니라 바닷길 너머의 대륙…… 이 세상 모두가 되는 것이다.”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말해주었었다.
이미 망가지고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은 언제가 되었든 무너진다고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아미엘로서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대륙의 인간들은 확실히 과거보다 약해졌다.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세상은 보다 평화로웠고, 그들을 뭉칠 수 있는 거대한 국가들이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모든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만큼 몬스터란 위험하고, 재앙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이게 최선이고 모두에게 평화로운 방법이라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파사가 차가운 눈으로 아미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문을 서방 대륙에 임의로 열어, 그곳을 새로운 몬스터의 터전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겠지요.”
“그게 무슨…….”
“터질 게 뻔한 둑이라면, 차라리 새로운 둑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러운 물은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흘려버리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절반을 내어 준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주안은 카르카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흠칫 놀랐다.
‘가능해…….’
이미 남부 대밀림에 나타난 몬스터, 마물들이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카르카노에게 들었으니 말이다.
“바닷길을 막고, 하늘 길을 막고, 땅을 지키며 수호한다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이 대륙은 안전해질 터이니 말입니다. 더해서 해충 같은 엘프 놈들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있으니, 제게는 그게 더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그리고 언제가 되었든, 그렇게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 주안에게는 매우 섬뜩한 일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파사가 생각을 바꾸기만 한다면 그런 재앙은 언제든 서방 대륙에 닥칠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그 말에 동의해줄 것 같아요?”
“그딴 짓에 동의해줄 줄 알아?!”
주안의 말과 동시에 카르카노가 소리쳤다.
“우리가 그동안 해온 모든 것은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위한 일이었어. 그런데 넌 지금, 그 절반을 버리겠다는 소리야?”
“그러지 않길 바랄 뿐이지. 하지만 그 전에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희가 떠나도 나 역시 말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으며, 그때까진 아직 용들의 힘이 필요한 때이다.
이곳, 슌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파사가 왜 하랑을 대신해 이곳을 차지한 것인지, 주안도 이제는 깨달은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런 주안의 모습에도 파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카르카노와 사련화에게 말했다.
“그러니 그땐, 그 육체는 놓고 가라. 카르카노. 사련화.”
파사의 뒤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그림자.
바로 하랑의 육체인, 용의 육체였다.
그 눈에는 빛이 없었으며, 의지가 없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이 미친 자식이……?!”
그제야 카르카노도, 사련화도 파사가 하랑을 인간의 형태로 따로 분리해 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였고, 또 다른 의미로는 그들이 가진 힘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너희들을 떠나보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용은 어느 순간부터 두 가지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드래곤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준,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육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느 순간 자신들만의 자아를 가진 채 신이 가장 사랑스러워하던 인간의 모습.
언젠가 육체의 껍질을 벗어 던진 채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날,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그 모습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만들어낸 일종의 기적과도 같았다.
모든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아니나, 그들의 정신적인 부분은 온전히 담을 수 있었기에 하랑을 제외한 용들은 인간의 모습을 사랑하였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파사 그 자신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 저주와도 같은 속박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만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 방해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딴 짓을 저질렀다고? 네 멋대로 하랑의 육체를 빼앗는 게, 네놈이 하려는 그 의무라고?!”
“하랑에게 제안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언젠가 그 정신체를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나의 의지이기도 하다.”
단순히 하랑을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랑의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일종의 실험이자 방법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그 행동에 카르카노와 사련화, 아니, 아미엘마저 표정을 굳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카르카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아하, 그러셔? 그리고 우리 육체는 네가 쓴다고?”
“어차피 너희들에겐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것 아니더냐.”
“미친 변태자식이…….”
파사의 이러한 행동에 카르카노의 입에서마저 험한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주안이 생각하여도 파사가 하는 행동은 미친 짓과 다름이 없었다.
‘대체 저 용에게 이 동방 대륙이, 아니, 슌 제국의 황족이 뭐기에 이렇게…….’
이전의 삶에서도 파사의 이런 집착을 보여주었던 예가 있었다.
유일하게 파사에 대한 존재가 확인되었던 그 때.
바로 슌 제국의 황제와 여러 황족이 당시 황실 중앙군 소속 좌장군이었던 금오의 반란에 의해 참살당하였던 그때였다.
파사는 제국의 심장부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황도를 불태우고 자살하였던 사건은 주안에게도 꽤나 큰 충격을 주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은 진정 슌 제국의 황제를, 그 가족들을 자신들의 형제보다 더 아끼는…… 가족으로 생각하는 거야?’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떠난 최초의 용.
의무를 버린 채 새로운 의무를 가지게 된 용.
그 어떤 용보다 사람을 아끼게 된 용.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핏줄에게만 적용이 된다는 점이 주안으로선 오싹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그 하나의 핏줄이 사라졌을 때, 파사는 삶의 의지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던 이가 지키던 것을 모조리 불사르고 스스로 자살을 결심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그저 슌 제국의 황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차지하고, 모두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정의와 의무에 빠져버린 용의 미친 짓을 세상 전체가 겪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돼.’
다른 용들을 위해서? 슌 제국, 이 동방 대륙을 위해서? 서방 대륙, 그리고 인류를 위해서?
아니다.
주안은 그러한 정의감에 불타는 인간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할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이들을 위할 뿐이다.
그렇기에 주안은 파사의 이런 행동을 막아야만 하였다.
반드시, 그를 말려야 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파사 님에겐 정말 좋으신 거예요?”
“의미 없는 말이로구나. 나에게 이보다 나은 일은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은 슌 제국, 황가를 위하여.
그 외의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런 그의 당당한 모습에 주안이 카르카노와 사련화. 그리고 하랑을 번갈아 가며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요?”
파사가 단순히 혼자라면, 단 하나뿐인 존재라면 주안은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인간을 더 생각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같은 피를 나눈 형제, 카르카노 님이나 사련화 님. 하랑 님은요?”
그에겐 같은 날 함께 태어나 한때 자아를 공유하고 한 몸처럼 움직였던 형제들이 있었다.
주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고, 그렇게 살아왔던 바로 그런 가족이 말이다.
“제멋대로 의무를 팽개칠 땐 언제고 자신이 급하니 그 의무를 행하시겠다고요? 그동안 쭈욱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셨으면서, 인제 와서?”
어떻게 보면 파사나 주안이나 비슷한 생을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긴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살았다.
주변에 피해를 주며, 가장 가까운 이들을 아프게 하면서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이다.
그렇기에 파사의 이런 행동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면서도, 안타까웠다.
“정말 무책임하세요.”
어쩌면 이 말을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약 그때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은 말이었다.
“흐응~ 인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잘 말했어. 인제 와서 의무를 하든 뭐든 너 혼자 실컷 하라고. 우리한테 피해 주지 말고!”
사련화는 분명 인간을 지독하게 싫어한다.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이 있는 그들을 사랑했지만, 그러지 않은 채 야만스럽게 서로 싸워대는 그들을 미워하였다.
작은 부락을 일구고, 마을을 만들며, 도시를 건설하며 나날이 발전하는 그 모습은 경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차 주변을 파괴하고, 쓸데없는 살생을 일삼았기에 사랑하면서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인간에게 기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을 거부한 채 관심 자체를 끊어버린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미엘이 데리고 온 주안이라는 인간은 조금 달랐다.
아니, 기대하던 인간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좋아하고 싶었던 바로 그러한 인간의 모습 말이다.
“그리고 나도 내 몸 따위 네놈이 마음대로 하게 놔둘 생각은 전혀 없거든? 이 변태 자식아.”
“내 말이 그 말이지.”
안 그래도 파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련화였기에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속 시원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늘 아웅다웅하던 카르카노마저 사련화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 한번 잘 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런 두 용의 모습에 주안이 어색하게 웃어 주었지만 정말 머나먼 존재인 용이 아니라 옆집에 사는 사이좋은 남매 같은 카르카노와 사련화의 모습이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그만하자, 파사”
그 목소리에 주안이 옆을 돌아보자, 언제 깨어난 것인지 하랑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며 파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파사가 침묵을 지키자, 하랑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만 그 아이들을 놓아주거라.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너를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하여야만 한다.”
“네가, 무엇을 한다고…….”
“안다. 알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하랑의 말에 파사의 눈이 어느새 용의 눈으로 돌아가 있었다.
“너의 그 행동은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하랑은 그런 파사를 보며 말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것은 집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