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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270화 (270/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270화

“이게 대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주안으로선 이해를 아득히 벗어난 것들이었다.

핏빛에 물든 호수와 하얀 몸에 붉은 피로 더럽혀진 하얀 용.

그리고 검은 몸체를 일으킨 채 자신을, 아니 다른 모두를 바라보며 서 있는 검은 용.

주안은 용의 본 모습을 처음 보나, 낯설지 않은 모습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가 있었다.

바로 크세니아의 그림자. 아니, 그의 본체였던 드래곤의 신체를 봐서였을까.

용과 드래곤의 묘하게 겹치는 부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크세니아에게선 느껴지지 않았던, 죽은 자와 다른 엄청난 압박감과 함께 경외심을 가지게 만드는 그 모습은 주안을 잔뜩 움츠러들게 만든다.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말거라.”

“아미엘 님…….”

곁에서 아미엘이, 앞에서는 카르카노가,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세냐가 없었다면 주안은 그대로 졸도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용은 그렇다.

절대자의 앞에 선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마치 개미와도 같았다.

손짓에 짓눌러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그러한 미물.

호의적인 카르카노에게선 절대 느껴지지 않았던, 적대감이 가득한 용의 본 모습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세차게 뛰는 심장을 단번에 멈추게 만들, 그러한 힘이 있었다.

“파사……! 너 대체, 하랑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카르카노가 소리를 치며 나아가자, 뒤이어 아미엘이 주안을 데리고 산 정상의 호숫가로 내려갔다.

그리고 앞서간 카르카노가 호수 위의 수면에 착지하자 호수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이건…….”

호수를 물들였던 핏빛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카르카노의 아래로 모여 뭉치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것은 호수를 물든 핏물만이 아니라 하랑의 순백의 몸체를 더럽히던 핏물마저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말해, 파사!”

“…….”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넉살 좋게 다가오던 카르카노는 더 이상 없었다.

파사가 아무 말 없이 그저 카르카노를 내려다보자, 카르카노가 재차 소리쳤다.

“말하라고!”

그리고 드러난 용안이 빛나자 순식간에 카르카노의 몸을 감싸더니 수면 아래에서 일어난 거대한 파문과 함께 뭉쳐진 핏물을 뚫고 거대한 푸른 몸체가 튀어나왔다.

“……카, 카르카노 님……?”

순백의 하랑, 칠흑의 파사.

그리고 푸른 카르카노.

하지만 카르카노의 거대한 푸른 몸체는 하랑의 피를 뒤집어쓴 섬뜩한 모습이었다.

아니, 실제로 카르카노의 현재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듯 호수의 물이 세차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진정해라. 카르카노.”

“진정? 진정하라고? 지금 이 모습을 보고 나보고 진정하라고?! 대체 하랑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호수의 파문은 물보라가 되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동방 대륙에서 말하는 용오름이 일어나며 파사를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하랑을, 형제를……!”

그것은 순수한 분노였고, 실망이었으며, 슬픔이 혼합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카르카노의 모습에 주안이 흠칫 놀라며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확실히 이 장소에 있는 그 누구보다 연약한 인간이나, 다른 그 누구에게도 없는 능력이 주안에겐 있었다.

성흔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수많은 감정.

카르카노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파사의 결의와 카르카노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카르카노 님! 멈추세요!”

주안이 황급히 카르카노에게 소리쳤고, 아미엘 역시 무언가를 느낀 듯 주안의 목소리를 크게 울리게 만들어 카르카노에게 전달되도록 해주었다.

이런 아미엘의 도움을 받으며 주안이 재차 소리쳤다.

“하랑 님은 무사하세요!”

“……뭐?”

그리고 주안의 말이 전해진 것인지 카르카노가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고, 파사를 찢어발기듯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물줄기들이 점차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카르카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랑과 파사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파사…….”

“저 열쇠의 아이의 말이 맞다, 카르카노.”

카르카노가 조금은 진정이 된 것을 확인하고는 파사가 말했다.

“다툼은 있을지언정, 더러운 인간들과 우리는 근본이 다르다.”

“말해.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하랑을 왜 저렇게 만든 거냐고!”

하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잔뜩 가진 채 파사를 노려보는 카르카노의 모습에 파사가 작게 혀를 차며 하랑의 거체에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하랑의 거대한 몸의 비늘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내 비늘은 서서히 형태를 바꾸더니 한 남성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뭐……?!”

그 모습에 카르카노의 눈이 부릅떠졌고, 주안 역시 자신이 느꼈던 그 특이한 생명의 기운의 정체를 깨닫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랑 님……?”

하랑을 만나 본 일은 없었다.

다만, 저 거대하고 하얀 용이 하랑이라면 그에게서 느껴졌던 독특한 생명의 기운이 갑작스레 나타난 저 남자에게서도 똑같이 나는 것에서 저 남성이 하랑일 것임을 추측하였다.

하지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저 거대한 용에게서 느껴졌던 생명의 기운이 어느새 사라지더니 비늘에서 나타난 남성에게만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게 대체…….”

그리고 그 현상에 대해 카르카노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어야 할 파사가 용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 하랑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그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카르카노에게 파사가 말했다.

“순리대로, 원래 되었어야 할 모습으로…… 그리고 그 역할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르카노. 우리가 하나였을 때, 모든 것을 함께 하였다. 바다를 지키고, 대지를 지키며, 하늘을 지키고…… 이 장소를 수호하였던 것, 모두를 우리는 다 같이 하였지.”

“…….”

그때의 기억이야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각자의 역할에 눈을 뜨고 흩어졌을 때, 가장 먼저 떠난 것이 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네가 가장 먼저 도망쳤으니까.”

“도망쳤다, 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

카르카노의 날이 선 말에도 파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카르카노가 어느새 물보라를 일으켜 인간의 모습을 한 하랑을 감싸더니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왔다.

그 행동에도 파사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며, 카르카노는 하랑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살아있음을 확인하였다.

“나는 의무 따위 관심 없었다.”

“알아. 그래서 나나 사련화는 널 싫어했으니까.”

카르카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련화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나타내며 파사를 욕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런 둘과는 달리 하랑은 그러지 않았다.

파사가 하려는 일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졌으니.

희생이라고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제멋대로인 형제들은 모두 나름의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하랑만은 달랐으니까.

그렇기에 파사도, 사련화도 하랑에 대해선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워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 의무를 나 역시 짊어지도록 하마.”

“아하, 그러셔? 그런데 그 의무를 하려면 알아서 하시던가, 왜 멀쩡한 하랑에게 이딴 짓을 저지르셨나.”

비꼬는 듯한 카르카노의 말에, 자신을 싫어할 것이 한 가지 더 추가되었다는 것에 파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카르카노가 파사를 노려보았지만, 파사는 여유롭게 그를 보며 말했다.

“빼앗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그리고 조용히, 카르카노에게…… 아니, 아미엘과 주안, 그리고 세냐.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말하였다.

“바다는 네가. 대지는 사련화가. 하늘은 하랑이. ……그리고 이곳의 수호는, 이제 내가 한다.”

“뭐……?”

“처음부터 정해진 순리대로……. 수호자로서의 나의 의무를 지겠다.”

그리고 그 순간, 파사를 중심으로 거대한 물리적인 압력이 카르카노를 밀어내고 아미엘과 주안, 세냐를 덮쳤다.

하지만 그 순간, 마찬가지로 파사를 덮치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 * *

“하, 하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던 주안이 겨우 숨을 토해내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숨이 턱 막혔고 그렇게 한동안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겨우 정신이 든 주안이 또렷해진 시야의 너머로 비친 한 사람의 모습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미엘 님……?”

주안의 앞, 아미엘이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주안은 자신의 주변에 투명한 막이 형성되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그 투명한 벽의 너머, 일그러진 공간과 뒤틀린 공간 너머로 수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대체…….”

“정신이 좀 드느냐?”

“오빠, 괜찮아요?”

주안의 작은 중얼거림에 아미엘이 조심스레 주안을 돌아보았고, 세냐 역시 주안의 얼굴 앞으로 날아왔다.

그런 두 여성을 보며 주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뭐긴 뭐예요. 정신 나간 용이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른 것이지.”

말투가 꽤나 과격한 세냐였지만, 주안은 잠시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파사의 모습은 확실히 세냐의 말처럼 보였기에 딱히 뭐라 다른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카르카노 님이랑 하랑 님은……. 게다가 파사 님은 또…….”

주안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이긴 하나, 파사가 무언가 하였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거대한 두 마리의 용과 인간 모습의 하랑이 보이지 않는 것에 주안이 의아함을 느끼며 그렇게 물었다.

“하랑이라는 용은 오빠 뒤에 있거든요.”

“뭐? ……아.”

세냐의 말에 주안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하랑이 있었다.

대체 언제,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 주안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주안이 하랑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신성력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분이 진짜, 용인 하랑 님이세요?”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느냐. 나 역시 이 모습은 처음 본다만.”

하랑의 이러한 모습은 처음이나, 카르카노나 사련화. 거기다 파사의 인간 모습까지 보았던 아미엘이긴 하였다.

“파사 님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랑이 용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은 채 지낸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일이긴 하였다.

단지, 지금의 이 모습을 보니 그가 원해서 변한 모습 같지는 않았다.

파사가 무슨 짓을 하였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이 봉인지의 수호라……. 그 아이의 원래 의무이고 역할이라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보다 카르카노 님과 파사 님은 어디로 가셨어요?”

주안의 그런 물음에 세냐와 아미엘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행동에 주안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

거대한 검은 용.

그리고 푸른 용.

그 곁에는…… 모래 빛의 노란 용이 함께였다.

“저건…….”

파사와 카르카노, 그리고 사련화.

세 마리의 용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모습이 주안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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