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마마보이-256화 (256/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256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정말로 멸망이라는 단어가, 국가의 이름이 아닌 세계의 종말이라는 단어가 오간 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대암흑기.

제대로 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역사의 한 부분이 뚝 잘려 나간 것처럼 기록 대부분이 사라져 있었지만, 수많은 역사가와 학자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세상의 종말의 때였다.

……라고 말이다.

“대암흑기가, 의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씀이세요? 그것도 엘프들의 손에 의해서? 게다가 그 원인이, 마를렌 님이라는 말씀이시고요.”

“그러하다.”

“…….”

주안의 말에 담담하게 답하는 아미엘이었지만, 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는 주안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미엘에게도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대암흑기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인지는 주안이 건넨 책을 통해서 느껴보았기에, 주안이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심각한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아니, 그녀 역시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꽤 복잡한 심정이긴 하였으나, 그러한 감정을 오래 간직한 채 혼란스러워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을 이끌고, 그들의 위에 서서 나아가는 자신에게는 보다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혼란스럽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나 그렇다 해서 마를렌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행한 행동이라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예? 하지만 그분은…….”

몬스터를, 병마를, 고통을 세상에 풀어내어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 원인이 된 존재다.

주안이 직접 그 용이라는 존재에게 들은 것은 아니나, 아미엘이 이렇게 말을 할 정도면 확실하다 봐야 할 것이다.

그만큼 주안은 아미엘을 믿었다.

“마를렌이 진심으로 그 일에 동참하였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무사했을 리가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미엘은 주안이 자신을 믿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마를렌을 믿었다.

“그렇지만…….”

“문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은 닫을 수도 있다는 의미. 내가 본 그것은 이미 닫혀 있던 문이다.”

완벽하게 닫히지 않았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

어찌 되었든, 열었던 것을 도로 닫았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아미엘의 말에 주안은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였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가문이 짊어진 큰 죄악과도 같은 일.

마를렌이 한 행동은 인류 그 자체에 큰 죄를 지은 일이었으니, 그녀를 선조이자 가문의 시조라 알고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에겐 매우 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주안으로선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온다는 그 아이를, 나도 만나 보아야겠구나. 만나 봐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어이해서 마를렌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 왜 함께하였던 것인지…….”

“저도 묻고 싶어요. 정말로 인간들을, 모두 없애고 싶었던 것인지 말이에요.”

아미엘은 요정의 여왕이자 마를렌과 엘프들의 친우로서, 그리고 주안은 인간의 입장에서 다예프에서 온다는 교단의 사람, 엘프일지 모르는 그 사람을 만나야만 하였다.

“애초에 함께해주길 바라기에 이곳에 온 것인데……. 참으로 엄청난 말들을 들은 것 같구려.”

“그대에게도 큰 짐을 짊어지게 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니오. 나 역시 만나봐야 하는 입장이고, 이러한 일을 알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니 신경을 쓸 필요는 없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아미엘의 사과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분명 입은 웃고 있으나, 그 눈은 무섭도록 날카로워져 있었다.

“마누엘 신관님……”

“교단은 나에게 희망이자 빛이었다만……. 그게 거짓된 희망이자 빛이었구나.”

주안은 그의 본명을 알고, 가문이 어디인지 안다.

다만, 그가 자신의 가문을 버리고 교단에 귀의해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을 바치고 교단을 위해 애쓴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행동에 거짓은 없었고 교단을 위하는 마음이 진실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교단이,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이들이 거짓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마누엘 신관님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쓸모없는 질문이로구나. 당연하지 않느냐.”

그리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 메데아 대족장을 제외한 가장 강한 이들을 모조리 꺾어버린 그 기세를 그대로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신의 거룩한 이름을 이용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존재들이자 인간의 적이다. 모조리 신의 곁으로 보내어 줘야지.”

“…….”

“그리고 그곳에서 참회하라, 일러 주어야겠지.”

참으로 살벌하고 섬뜩한 말이지만,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에 주안은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아미엘마저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지켜볼 뿐, 그들이 엘프이고 자신이 지켜줘야 할 아이들이라는 사실임에도 나설 수가 없었다.

엘프들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아니, 한때 인간들이 행한 행동을 반대로 되돌려 주었다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증오는 증오를 낳는 법.

여기 새로운 증오가 생겨나고 있기에, 자신은 무슨 말을 하여 이 끔찍한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 * *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은 굉장히 살벌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하였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은 당연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안은 조심스레 아미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아미엘 역시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에 매우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네 말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만남을 요청하였다 들었다. 그들과 만나, 무슨 이유로 만남을 청했던 것인지…… 그리고 어떤 연유로 그래야만 했던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아미엘은 아미엘 대로 이종족, 엘프들을 이해하고 싶었고 대화를 바라는 듯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분쟁이 아니며, 자신을 떠났던 그 아이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그 대화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하였다.

인간의 시점에서, 인간으로서의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이종족의 시점에서, 이종족으로서의 아미엘.

이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이해가 되나, 주안으로선 조금 고민이 되는 일들이기도 하였다.

‘하아……. 어렵구나.’

비록 한때 그러한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하나, 다행히 지금의 세상은 인간들의 세상이자 평화로운 시기였다.

분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오랜 역사 속에서 이토록 평화로웠던 시기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세상도 한때 세상이 무너질 뻔한 것을 겪고 혼란 속에서 벌어진 엄청난 일들을 보고 겪은 이들이 나서서 쌓은 평화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그 처참함을 역사로 기록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륙의 사람들은…… 욕심이 가득한 귀족들이나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도 이해하고 노력한다.

제국이 힘이 있어도 팽창정책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스란 왕국과의 분쟁 속에서도 극단적인 살육을 저지르지 않은 것도 그 마지막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이미 다 겪어 보았고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주안은 엘프들이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엘프들이 왜 그런 것인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다만, 일부나마 그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너…….”

주안의 말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살짝 찌푸렸다.

그 역시 주안이 어떤 아이이고 이종족, 엘프들과는 어떠한 관계인 것인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의 편에 서서 말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다만, 주안은 오히려 담담하게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아미엘 두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그렇다 해서 복수가 정당화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한때 인간이 그들에게 위해를 끼쳤다 해서, 또다시 그들이 복수로 우리에게 위해를 끼쳤고 그것을 이유로 우리는 다시 그들을 적대시한다……?”

과거의 일을 잊으면 안 된다지만, 이미 인간들에게 그러한 과거가 있었던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그게 과연 올바른 답일지 모르겠어요. 결국, 그 끝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 잘 아는데 말이죠.”

또다시 그러한 일을 일으킬지, 아닐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해서 이를 드러내는 것 역시 아니라고 보았다.

물고 물리는 분노와 증오는 마지막에 가선 결국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주안의 말을 이해하기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도 조금 전과는 달리 그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진 채 주안을 보며 말했다.

“무조건적인 적대적 행동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혹여 그들이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맞서야 한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예. 맞아요. 그들이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저를 위해서, 제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막을 것이니까요.”

이종족의, 엘프의 피가 섞였다 해도 주안은 인간이다.

인간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인간 사회에서 삶을 살았고 인간들과 함께 생각을 공유하며 의지하고, 그렇게 나아간 인간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인간이지 이종족의, 엘프들이 아니다.

피가 이어졌다 해서 그들이 자신의 가족도 아니고 만나 본 일도 없는 타인일 뿐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이들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제 모든 것을, 가문의 모든 힘을 이용해서라도 제가 그들을 막을 거예요.”

단순히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주안이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의 힘까지 움직일 능력이 있었다.

제국 황제의 외손자.

제국 황녀의 아들.

제국 제일이라는 공작가의 후계자.

사람이라는 힘이 있었고, 가문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을 벌하고, 처단할 생각인 것이더냐.”

그리고 이런 주안의 힘을 아미엘도 이제는 잘 알기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주안에게 물었다.

실제로 주안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엘프들의 일을 세상에 밝히고 인간들이 들고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주안만이 아니라 곁에 있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힘까지 있다면 충분히 가능했기에 아미엘은 매우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주안은 이런 아미엘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막을 거예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죠.”

물리적인 힘과 폭력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주안은 아미엘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아미엘 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들이 정말 엘프이고, 마를렌 님의 동생이라면 다른 누구보다 아미엘 님의 힘이 필요할 거예요.”

“그래……. 그러하지.”

주안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고, 또한 주안이 배려해준 것을 알았기에 아미엘은 주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미엘이 조용히 주안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정말 고맙구나.”

한때 세상을 무너뜨리고 인간을 멸하려 했던 이들임을 알면서도 증오로 인한 복수가 아닌, 설득을 택한 주안의 행동이 아미엘로서는 너무나 고마웠다.

엘프들이란, 아니, 모든 이종족들이란 그녀에게도 아이들이었고 자식들이었으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