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55화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하나 그때의 그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 아니, 바라였다.”
아미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나 이 세상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그때의 그 아이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있던 과거와 현재의 그 간극은 너무나 컸다.
아무리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그녀라 할지라도 커다란 시간의 차이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이미 이종족을 잊어버린 인간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기에 나올 수 있었던 이종족에 대한 차별과 정복에 대한 욕구, 욕망이 사라졌다.
지금의 이 시대는 이종족에게는 굉장히 안정적이며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이종족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종족으로서의 이름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달란트 부족의 그 아이들도 이미 자신들이 무엇인지 잊었지.”
그녀가 없는 사이, 그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된 것인지 직접 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달란트 부족의 모습에서 있었다.
“하나 그렇기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가진 채 인간들의 사회와는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단체로서 인정을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대륙의 인간들과는 제대로 된 교류가 없는 남부 대밀림의 달란트 부족이긴 하나, 그들을 인간 외의 존재라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그저 적대시하면 골치 아프고, 그렇다고 한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힘든 야만적인 존재들.
하지만 같은 인간이다.
그들이 끝까지 자신들을 이종족이라 생각하고 나섰다면,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인 일이긴 하였다.
잊었기에 인간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았고, 그렇기에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달란트 부족은 많은 것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하였고, 그 뿌리에 대한 것은 잊었다 해도 선조에 대한 기억은 여전했으니까요.”
“그래. 그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구나.”
이종족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간직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선조로부터 내려온 굳건한 정신이 온전하다면 이름이 무엇이 되었건 그들 본질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기에 아미엘은 이종족이라는 이름이, 달란트 부족이 잊은 오크라는 이름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이름을 잊었다고 해도 그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달란트의 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마를렌의…… 엘프들의 그 모습이 여전할 것인지, 매우 불안하구나.”
아미엘의 말에 솔직히 주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위로해주기 이전에 엘프들의 그 행동이 너무나 수상쩍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알려준 것처럼 엘프들이 차지하고 있는 교단의 움직임 자체가 이상하였다.
인간을 원망하고, 인간을 증오했을 엘프들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교단의 창시자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리고 아미엘은 주안의 머뭇거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되는 의문이었으나 알 방도는 없었다만……. 이 세상의 비틀림의 진원지에서 만난 문지기가 나의 의문에 답을 한 가지 제시하더구나.”
“문지기요?”
“이 세상의 말로는, 용이라고 하더구나.”
“동방 대륙의 용을 만나셨다고요?!”
아미엘이 몬스터에 대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설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곳에서 용을 만났다는 사실에는 주안이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냐는 이런 두 사람의 놀람이 이상하다는 듯했지만, 용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을 보며 아미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룡 하랑이라는 아이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용마저 그대에겐 아이였구려.”
평등하다고 해야 할지…….
아미엘의 말은 마누엘 대신관은 정말 할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들었다.
“궁룡 하랑이면 분명 동방 대륙의 신령산에 있다던 그 용인데……. 아미엘 님, 그곳까지 갔다 오신 거예요?”
“그러하다. 그곳이 바로 크세니아와 모든 드래곤이 만들어 놓은 봉인지, 문이 있는 장소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곳을 고치는 역할이 바로 주안의 역할이었고, 아미엘이 먼저 가서 상황을 살핀 것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장소가 만들어지고, 그곳이 용의 둥지가 되었다는 것에는 주안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주안의 복잡함을 이해한 듯, 아미엘이 조용히 말했다.
“이 세상의 용들은 드래곤의 창조물이니라. 봉인지와 문을 지키는 문지기로서 드래곤들이 남겨 놓은 마지막 유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이 드래곤의…….”
“나 역시 그 사실을 직접 들었을 땐 매우 놀랐었구나.”
인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어 낸 드래곤은 대체 어떠한 존재들인지, 정말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먼 이들로 인식이 되었다.
마치 그들은 신과도 같아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이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안다고는 하지 못 하나…… 용이 만들어지고, 그 용들을 창조해낸 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구려.”
“이해한다. 하나 거짓이 아니니 부정하지는 말라.”
“그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고 있소.”
마누엘 전대 대신관으로선, 아니, 인간으로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일이고 힘든 일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미 눈앞에 규격 외의 존재인 아미엘이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더한 일이 있다 해도 충격은 있을지언정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면 하나만 묻겠소. 봉인지는 무엇이고, 그 문은 또 무엇이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그저 아미엘에게서 성흔과 관련된 것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주안과 아미엘이 크세니아의 그림자를 만나고, 세상이 비틀리고 마물과 요물이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아, 실은 그게…….”
“네가 알고 있는 마물과 요물이라는 그 존재를 더 이상 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마물과 요물을……?”
주안을 대신해 그렇게 말을 해준 아미엘이었지만, 그 말 자체가 이상하다는 듯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갸웃하였다.
애초에 몬스터에 대한 것도 일종의 전설과도 같았기에 서방 대륙과 동방 대륙에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한 그것들을 몬스터라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기이한 현상이기도 하였고, 제각각 이름을 붙였을 뿐 연관성을 찾는 이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주안은 잠시 머뭇거리며 크세니아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도 괜찮을지 고민했지만 아미엘이 이런 주안을 보며 생각하는 바를 다 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아미엘의 행동에 주안이 안심하며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말했다.
“말씀을 드리긴 조금 길긴 하지만…….”
그리고 주안은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크세니아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 * *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찻잔에 가득하던 차를 입에 한 번에 털어 넣은 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치 내가 알던 이 세상이 아닌, 정말 다른 세상의 일들 같구려.”
“이해하는구나. 나 역시 이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서로가 다른 시간대에 오래 살았기에 서로가 정말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결국, 그곳을 찾은 이유도, 이 녀석을 통해서 그 봉인지든 문이든 고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구려.”
“그러하다. 그리고 그리 해야만 하는 일이니 말이다.”
비틀린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것에 세상을 구할 용사가 아닌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가 나선다는 것이 정말 애들이나 좋아할 책에서만 나올 이야기와도 같았다.
다만, 그다지 용사 같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웅장하거나 대단해 보이는 것도 아닌 것이 참 신기했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자신을 바라보며 갸웃하고 있는 주안을 보다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한숨만 내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모험과 위험이 도사리는 일이 아닌, 그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용과 아미엘이라는 엄청난 존재의 보호 속에서 그저 성흔의 신성력을 이용해 고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맥이 탁 풀렸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진 않은 듯했다.
“그런데 궁룡 하랑을 만나셨다니……. 아니, 저도 만날 수 있는 거죠?”
“용이 궁금하느냐.”
“그게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용이라는 것은 서방 대륙에선 정말 이야기만 무성한 존재일 뿐이었다.
특히나 주안은 동방대륙과의 통로 역할을 하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출신답게 바다를 오가는 수많은 상인의 입으로 전해진 용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특히 바닷사람이라면 해룡 카르카노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주안의 모습에 아미엘이 살풋 미소를 지었다.
“만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입이 아닌 너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너의 기대감을 더욱 충족시켜 줄 것이다.”
“아하하, 네…….”
주안이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나 세냐의 눈총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한데 그곳에서 나를 맞이하던 아이가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말을 해주더구나.”
아미엘의 안색이 조금 어두운 것도, 그리고 주안이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보는 시선 역시 썩 좋지 않았다.
그것은 미안한 감정이기도 했고, 매우 복잡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가 말하더구나. 이 세상에 몬스터를, 수많은 병마와 고통을 불러들여 한때 이 세상을 멸망에 가까운 일을 벌인 이가 마를렌의…… 엘프들이라고 말이다.”
“몬스터를 마를렌 님이?”
먼 선조이긴 하나 마를렌은 주안의 가문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시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마를렌이 몬스터를 불러들였다는 것에 주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한편으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멸망이라는 건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마물이나 요물들이 크게 피해를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물론 이후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미엘과 함께 주안이 그 봉인지로 가서 비틀린 것을 바로 잡는다면 해결이 될 문제였다.
그렇게 들었기에 주안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병마와 고통, 멸망……. 설마……?”
하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아미엘의 말을 곱씹으며 그 속에 담긴 그 뜻을 이해해버린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암흑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에 주안 역시 놀란 눈으로 아미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미엘은 마치 자신이 지은 죄라는 듯 어두운 안색을 한 채 고개를 무겁게 끄덕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