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54화
아미엘의 방은 매우 조용했다.
딱히 이렇다 할 장식도 없었으며, 주안이 올 때를 위해 만든 테이블과 의자 몇 개.
그리고 주안이 선물한 책들을 꽂아놓은 책장과 비어 있는 몇몇 곳에는 마찬가지로 주안이 선물한 비싼 술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주안은 이 조용하면서도 익숙해진 이 장소에서 낯선 새로운 물건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놀란 눈으로 그것을 보며 말했다.
“아미엘 님도, 낮잠을 자시긴 하시는구나.”
그것은 부드러운 덩굴줄기를 엮어 놓은 그물침대였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 아미엘이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모습에 주안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아미엘이 자는 그 모습은 정말 평화로워 보였고,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미소가 지어지게 만들 만큼 귀엽기도 했다.
실제로 작은 체구의 아미엘은 단순히 겉모습만 본다면 주안의 동생처럼 보일 정도로 어려 보였고 품에 꼬옥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으니 말이다.
물론 그러한 티를 낼 수도 없었고, 그러한 동생 취급을 하기엔 이분이 너무나 대단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주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에서 주안은 조금 기뻤다.
늘 차분하고 큰 짐을 짊어진 아미엘만 보다,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주안으로선 다행스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상한데……. 아미엘 님이 저렇게 주무실 리는 없으신데.”
“그래?”
세냐가 갸웃하였지만, 주안은 오히려 저렇게 자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한다……. 깨우기 죄송할 정도로 푹 주무시고 계신데.”
하지만 이런 주안의 고민과는 달리 아미엘이 조용히 눈을 뜨더니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멍한 모습 그대로 주안을 바라보다 갸웃하였다.
“…….”
하지만 이내 흠칫, 놀라더니 아미엘이 황급히 눈을 또렷하게 뜨고는 황급히 그물침대에서 내려와 평소처럼 허공에 둥둥 떠오르며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을 한 채 주안에게 말했다.
“언제 온 것이더냐.”
“아하하……. 그게, 방금…….”
금세 돌변한 아미엘의 모습에 주안이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었고 세냐는 작게 한숨마저 포옥 내쉬었다.
“그보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이렇게 곤히 잠드신 아미엘 님은 처음 봤어요.”
“아, 아니다. 단순한 명상이었느니라.”
“그런 것치고는 입에 침 자국이…….”
“웃?!”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볼이 발그레 물든 아미엘.
그것만이 아니라 꽤 오래 잠들었던 것인지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뻗쳐 단정치 못했다.
이런 아미엘을 보다 주안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성흔에서 신성력을 끌어내어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반짝반짝해진 아미엘이었지만, 어쩐지 그 볼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 그보다 갑자기 말도 없이 웬일이더냐.”
주안이야 말없이 늘 찾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듯했다.
“실은 아미엘 님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생겼거든요. 아, 이분은 아시죠? 마누엘 신관님이세요.”
“오랜만이구려.”
“그래. 어린 신자여. 오랜만이로구나.”
주안의 말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아미엘에게 인사를 해주었지만, 아미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할 뿐이다.
여전히 백에 가까운 나이를 자랑하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어리게 보며 그렇게 대하는 아미엘의 행동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이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실은 아미엘 님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리고 주안이 조심스레 나서며 그렇게 권했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나 아미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겨 덩그러니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대신 아미엘은 허공에 손짓하는 것만으로도 테이블 위에 나무 찻잔을 만들어내더니 허공에 떠오른 주전자가 알아서 각자의 앞에 놓인 찻잔을 채워 나갔다.
따뜻한 차는 아니지만, 주스에 가까운 차가운 차는 과일의 향이 매우 강했고 금세 방 전체에 퍼져나갔다.
“한데 할 말이라니. 무엇이더냐.”
주안이 찾아올 때면 이유가 있었고, 이번에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함께라는 것에 아미엘에게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안은 잠시 찻잔을 기울이다, 아미엘의 말에 조용히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실은 다예프에서 신관이 저희 제국의 황도로 오고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다예프…….”
다예프라는 말에 아미엘이 흠칫 놀라며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런 아미엘의 반응을 주안은 예상했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이유를 몰라 잠시 의아한 듯 주안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주안을 대신해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말했다.
“이 아이에게 듣기도 하였지만, 나 역시 그대의 부탁으로 조사를 하다 알게 되었소만……. 그들이 당신이 찾던, 엘프들이라는 게 사실이오?”
“맞다. 나 역시 최근에 알게 된 일이니라.”
“후우……. 역시 그렇구려.”
주안에게도 들었기에 그다지 충격이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듯하니 조금 씁쓸하고도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보다, 아미엘이 물었다.
“그곳에서 사람이 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더냐.”
“말 그대로요. 얼마 전에 연락이 와서, 주안 마르티네스, 이 아이와의 만남을 바란다며 황도 대신전의 대신관에게 연락을 하였다는구려.”
“이 아이와?”
주안과의 만남을 원한다는 것에 아미엘 역시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주안을 보았다.
그리고 아미엘 뿐만이 아니라 세냐 역시 주안이 이곳으로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함께 오게 된 이유를 듣지 못하였기에 그 말에 크게 놀란 듯했다.
“어이하여?”
“그것은 아직 모르오.”
“몰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기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이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대신해 주안이 말했다.
“예. 그 이유는 말씀하지 않았다고 해요. 단지 저를 만나러 그 먼 북부에서 제국의 황도까지 오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는 듯해서요.”
“무언가를 있다, 라…….”
“일단 이 성흔이 그 이유이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이 성흔이 교단에선 매우 중요하기도 하고 또…….”
“……엘프들에게 내려졌던 성흔이었으니…….”
“예. 맞아요. 저희가 그들에 아는 것처럼, 그들도 저에 대해서 알지 않나 싶거든요.”
주안의 말대로 성흔의 원주인은 마를렌이었으며 마를렌은 엘프였다.
그러한 엘프들이라 알려진 교단의 성도, 다예프에서 사람이 온다면 이유는 그게 아닐까 싶었다.
주안의 말에 아미엘 역시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 나를 찾아온 이유라는 것은…….”
“아미엘 님도 같이 가주셨으면 해서 부탁을 드리러 왔어요.”
“…….”
주안의 말에 아미엘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주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안은 담담하게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저나 마누엘 신관님은 엘프들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 그들이 왜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도 명확하진 않아요.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그들에 잘 아는 분이라면, 아미엘 님밖에 없으세요.”
아미엘도 그렇지만, 세냐도 엘프에 대해선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엘프에 대해서, 그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던 것은 결국 아미엘이었고, 그들을 통해 마를렌에 대해서 알고자 하였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스스로 찾아오는 이상, 아미엘이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아미엘 님이시라면, 그 사람을 통해 마를렌 님에 대해서 알아내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요.”
주안이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나, 아미엘이라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여전히 아미엘에 대해, 요정들에 대해 기억을 하고 있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주안의 말에 아미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겠다. 그 찾아온다는 이의 이름을 혹 들은 바 있느냐. 몇 명이나 온다더냐.”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은 바로는 다예프의 대신관과 그와 친분이 있는 이만 한 명이 같이 온다는구려.”
이에 대해 전달받은 마누엘 전대 대신관 역시 이게 사실인가, 싶었다.
괜히 페트롤 대신관을 닦달하여 사실인지 알아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알아본다고 해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디를 통해 오는 것인지도 모를뿐더러 언제 출발했는지조차 모른다.
그저 누구와 함께 언제 도착할 것이다, 라는 말만 들었으니 말이다.
이게 참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만나 본 뒤에 따질 일이었으니 마누엘 전대 대신관 역시 뭐라 하지는 못 하였다.
“대신관? 그대와 같은 지위에 있는 이가 온다는 말이더냐.”
“지금의 나와는 아니지만, 그 역시 대신전을…… 다예프라는 성도를 이끌고 우리 교단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는 이라는 사실은 부정을 못 하겠구려.”
대신관은 모두 동등하고 신전들은 독립성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하나의 교리라는 것에 묶여있는 이상, 모든 것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정신적 지주이자 신의 힘을 나타내는 성자이며 성녀가 성도 다예프에 모셔져 있는 이상, 모든 신전이 같다 하나 다예프만은 조금 달랐으니 말이다.
사실상 교단을 이끄는 일이 성도 다예프의 신관들이자 그들의 정점에 오른 것이 바로 다예프의 대신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만나 본 일은 없으나, 꽤 젊은 나이로 대신관에 올랐다고 들었소. 이름이 아마…….”
대신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그였기에, 이후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이에 대해서…… 성도라고는 하나 저 먼 다예프의 대신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이런 이가 대신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기에 그에 대해 떠올리는 것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케들락. 케들락 대신관이라 들었소만.”
“케들락……?”
그리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에 아미엘과 세냐가 흠칫 놀랐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주안과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의아해하였고, 주안이 조심스레 아미엘에게 물었다.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안다.”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아미엘.
그리고 이런 그녀 대신 세냐가 먼저 조용히 말했다.
“엘 하임 케들락.”
“엘 하임? ……그 이름은 분명…….”
엘 하임이라는 낯이 익은 말에 주안이 곰곰이 생각하다,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고는 놀란 눈으로 아미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미엘은 이런 주안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네 선조의 동생의 이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