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31화
“그러면 앞으로도 그런 인간들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겠군.”
메데아 대족장의 말에 주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죄송해요. 메데아 대족장님이 황도로 오시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솔직히 예상을 못 했거든요.”
“쿠후후. 세상이 제 뜻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러니 너무 괘념치 않아도 된다, 마르티네스의 주안.”
“예…….”
사실 주안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메데아 대족장을 황도로 초대를 하고 모두에게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끈끈한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그들의 헛된 생각을 아예 하지 못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안의 생각보다 한 발 빨리 먼저 나서는 이들이 있을 줄은 솔직히 생각을 못 했다.
황도의 귀족들이 나서는 것도, 황가에서 나서려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며 가까운 아스란 왕국이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터이니 말이다.
“쯧. 이것 때문에 많은 아이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다, 작은 손님.”
꽤나 골치가 아픈 것인지 메데아 대족장이 드물게 잔뜩 찌푸리자, 주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침입했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일단 바깥경계에 위치한 부락 중 한 곳에 가두어 두었다. 하나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메데아 대족장님은 반대를 하시죠?”
“쓸데없는 살생은 바깥 주민들을 자극만 하는 법.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아니나 우리는 우리에게 칼들 들이대지 않는 이상 우리 역시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
참으로 이성적이었고 충분한 힘을 가졌음에도 그러지 않는 고고한 그 모습에 주안은 솔직히 그녀에게 존경의 마음까지 조금 가져버렸다.
힘이 있는 자는 단순히 그 힘이 있다 해서 모든 이들에게 우러러 보이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는 성군이 될 수 있고 폭군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주안이 본 메데아 대족장은 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힘을 써야 할 때는 주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힘을 아무 곳에나 사용하지 않고 충분히 보고 생각하고 주변과 의견을 나눈 뒤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왜 성군보다 폭군이 많은지, 그리고 성군이 되지 못 한 존재들이 많은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기도 하고.’
아직 그러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나, 메데아 대족장은 그러한 자질이 충분한 존재였다.
그리고 과거의 토미 역시 그 실력뿐만이 아니라 전쟁 이후 그가 보여주었던 많은 행동으로 인해서 단순히 힘만 센 무식한 이가 아닌, 모든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영웅이 된 것이었으니까.
“바깥 주민으로서, 메데아 대족장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허…….”
주안이 조용히 일어나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메데아 대족장뿐만이 아니라 파나르나 아미엘마저 놀란 듯 주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주안의 그 행동에 잔잔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참으로 예의바르구나. 마르티네스의 주안, 너를 만날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너의 모습에 크게 놀라게 된다.”
메데아 대족장이 푸근한 미소를 짓자, 주안 역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든 후 말했다.
“이곳을 침범한 죄는 무겁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살생을 저지르거나 더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선처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들은 너의 사람들도 아니고 네가 아는 이들도 아닐 것이다. 한데 마르티네스의 주안, 네가 고개를 숙여 나에게 부탁을 할 정도의 이들인가?”
주안은 스스로를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들을 돕는 것에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싶은 마음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단지 주안이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아닌, 바로 메데아 대족장과 그녀가 이끌고 있는 달란트 부족에 있었다.
“만약 그들을 처단한다면, 남부 대밀림……. 달란트 부족이나 메데아 대족장님을 보는 시선이 좋지 않게 변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조용히 메데아 대족장을 마주보며 주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살려준다면, 바깥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던 이곳, 원주민들이 사실은 예의를 알고, 기사도를 아는 존재들이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거든요.”
“호오……. 그들을 살려둠으로써 우리들의 인식을 개선하겠다는 소리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얻을 것은 제대로 얻으셔야죠.”
“쿠후후……. 확실히. 괜한 분란만 생겨서 우리만 손해였는데, 조금은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군.”
“그리고 그들에 대한 처분은 제게 맡겨주시겠어요?”
“마르티네스의 주안, 너에게?”
“예.”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은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부 대밀림의 주인, 달란트 부족의 땅을 멋대로 침범한 범죄자예요. 살려는 주되,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게 만들어야죠. 이건, 일종의 경고이기도 해요.”
“경고라……. 하긴. 우리들의 경고보다는 너와 너의 가문의 경고가 바깥 주민들에게는 더 잘 먹힐 것이겠군.”
“하하……. 저희 가문이 조금 유명하거든요. 특히 아스란 왕국에서는 더욱…….”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말 한마디면 아스란 왕국은 너무나 쉽게 흔들린다.
그들에게 아직도 공포라는 것을 깊이 심어주고 있는 이들이 바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였고, 그토록 빠르게 남부 대밀림으로 온 이들이라면 아스란 왕국의 이들밖에 없음을 주안은 알고 있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것인지, 확실히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니 주안의 입장에서도 결코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메데아 대족장이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마르티네스의 주안. 그 녀석들에 대한 처분은 너에게 맡겨주마.”
“반대하는 이들이 많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마르티네스의 주안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팔다리를 뽑아낸다고 하였다 하면 된다.”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리고 저 그렇게 안 할 건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살벌한 말이었다.
그리고 주안 역시 작게 웃어주며 다시 자리에 앉아 말했다.
“일단 그 외에도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니, 이건 부탁 겸 작은 거래가 될 수도 있겠네요.”
“음? 부탁 겸 거래?”
갸웃하는 메데아 대족장을 보며 주안이 말했다.
“황도로 오실 날짜는 거의 정해졌어요. 저희 할아버지도 황도로 오시게 되어, 그날에 맞춰서 도착하시면 될 것 같거든요.”
“호오. 마르티네스의 주인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보구나.”
“주인은…… 맞으시네요. 일단 작위는 아버지에게 있지만, 가문의 모든 건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니까요.”
“쿠후후. 누구든 부모님을 쉽게 넘을 수 없지.”
“그렇긴 하죠.”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보호를 받다 걷고 뛸 수가 있게 되면 그 품을 벗어나 아버지의 등을 보고 달려가게 된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다치면 치료해주고……. 하지만 그런데도 걷고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언젠가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아버지를 넘어 당당하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등을 보고 따라올 아이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다만, 나나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넘어서긴 좀…….’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해야 할까.
너무나 거대한 산, 아니, 산맥처럼 우뚝 서서 가문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의 등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그러한 존재였다.
“할아버지가 마를렌을 출발하시면 대략적인 시간은 알 수가 있어요. 그때 한 번 더 와서 정확한 시간을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주안이 잠시 메데아 대족장의 눈치를 살피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메데아 대족장님, 동행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동행이라니? ……라쿰바는 안 데리고 갈 거다. 그 녀석, 너무 무식해. 카마르는 할 일이 많고, 파나르는 늙었어.”
“……늙어서 죄송하군요, 대족장.”
메데아 대족장의 말에 파나르가 조용히 차를 마시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주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말이다.
“아뇨, 아뇨. 부족민들을 동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대밀림과 가까운 아스란 왕국의 공주님과 함께 와주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주안은 남부 대밀림의 달란트 부족, 남부의 아스란 왕국.
그리고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하나의 끈으로 묶어 두고 싶었다.
달란트 부족의 메데아 대족장은 적어도 서방 대륙 최고의 실력자임을 주안은 자신했고, 아스란 왕국은 아무래도 풍신을 통해서 동방 대륙의 검을 일부나마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담을 수 있는 이유 때문이었다.
끈끈한 동맹, 그런 것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한 그 끈을 놓지 않는 그러한 관계를 바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주안은 메데아 대족장과 아스란 왕국, 정확히는 유우나 공주와 접점을 만들어주는 한편 그녀의 안전도 보장시켜 주고 싶었다.
주안과의 인연 때문에 귀족파가 예전처럼 유우나 공주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하고는 있다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느린 것은 딱 질색이지만…….”
그녀가 혼자 오려던 이유도 빠르게 올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던 메데아 대족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느긋하게 유람하는 것이라 생각을 하도록 하지.”
“고마워요, 메데아 대족장님.”
“그러면 거래라는 것은 무슨 말이더냐.”
“이것은 아직 제 생각일 뿐이지만, 달란트 부족이 만든 가죽 공예품과 남부 대밀림에 퍼져있는 많은 과일……. 그것을 판매해 볼 생각은 없으세요?”
“이거랑 과일을?”
메데아 대족장이 갸웃하며 근처에 놓여 있던 가죽 장식품 하나를 들어 주안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란트 부족의 가죽 공예품은 예술품으로서 매우 뛰어나요. 이곳, 서방 대륙뿐만이 아니라 바다 건너 동방 대륙에도 통할 정도로 말이죠.”
예술품이라고 하면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두고 보고 자랐던 주안이었다.
웬만한 이들보다 안목이 더 뛰어났으며, 주안이 보기에는 이 가죽 공예품은 정말 있는 이들의 수집욕을 자극하는 매우 뛰어난 예술품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자고로 예술품이란 그 숫자가 적을수록 가치는 오르게 되어 있거든요.”
귀족들과 대상인들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것은 역시나 희귀품에 있었다.
매우 한정된 소량의 예술품이란, 그들이 기를 쓰고 구하려고 하는 욕망의 덩어리들이니 말이다.
“몇 개 준다 해서 상관은 없다만……. 이런 걸 산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구나.”
“원래 바깥 주민들이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마련이거든요.”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메데아 대족장이 팔짱을 끼며 갸웃하긴 했지만, 이러한 가죽 공예품이야 집마다 알아서 만들어 사용하다 보니 주안에게 좀 준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대신 과일은 좀 많이 주셔야 해요. 가죽 공예품은 귀족과 대상인을 위한 물품이지만, 과일은 많은 이들이 찾는 것이라서요.”
“술을 담그는 것을 뺀다면 얼마든지 줄 수야 있지. 하지만 거래라 하면 너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의미인데, 무엇을 줄 생각이더냐.”
달란트 부족은 과일을 그냥 먹는 것보다 독한 술을 담그는 것에 사용했으며, 남부 대밀림 지천에 널린 과일 중 정말 극히 일부만 사용하였다.
때문에 사냥을 갔다 오거나 혹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시켜 과일을 가져오면 되니 이 역시 달란트 부족의 입장에선 크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다만, 거래라 하면 서로 주고받는 것이니 달란트 부족이 이것을 주면 주안은 무엇을 줄 것인지 메데아 대족장은 그것을 물었고, 주안은 당당하게 미소를 지어주며 답했다.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다 구해다 드릴 수 있어요. 물론 불법적인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무엇이든, 이라…….”
메데아 대족장의 입장에서도 크게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주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메데아 대족장 대신 파나르가 말했다.
“저희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입니다.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
의약품도 아니고, 의류품도 아니며, 식료품도 아니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마물, 몬스터를 때려잡을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