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27화
수많은 배가 오가는 마를렌은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이기도 하였다.
밤낮없이 움직이는 뱃사람들이 다수였다.
일에 치여 사는 상인들과 함께 시간이 곧 돈이라는 상인 중에서도 동방 무역상들은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마를렌으로 들어오고 마를렌을 떠나 동방 대륙으로 향하였다.
거친 뱃사람들이 많은 탓에 마를렌의 경비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이면서도 다수가 포진되어 있어서 웬만한 난동 정도는 치안청이 움직이기 전에 경비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안전이 보장되어 있어서 이렇게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낮처럼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늦은 밤, 마를렌의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외곽의 거대 창고들이 다수 세워져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물류창고에 다수의 사람이 몰래 숨어들었다.
“저, 저기, 도련님. 여긴 창고 아니에요?”
앞서 나가는 워랜이 경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일행들을 인도하였고, 뒤따르는 주안의 등을 그저 따라만 가던 토미가 조심스레 주안에게 물었다.
그리고 주안은 이러한 토미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우리 가문의 창고긴 해. 딱히 중요하지는 않은 곳이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세수를 모아 놓는 창고들은 그 용도에 맞춰 따로따로 지어져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물품들은 공작성 내부에 존재하였다.
그리고 마를렌 시내와 항구에 위치한 곳, 외곽 등등 중요도와 물건의 양에 따라 위치가 정해졌다.
주안이 몰래 숨어든 이 창고에는 대부분 오래된 식량들이나 가뭄과 같은 큰 재해가 일어났을 때 마르티네스 공작령 혹은 제국 전체로 보내질 구휼미가 있었다.
매해 새로운 구휼미가 들어오면, 가장 오래된 것들은 다시 내보냈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는 이 창고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내륙에 위치한 이런 식량창고야 마르티네스 공작령에선 흔하였고, 사실 이 창고 역시 정말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한 마를렌 인근의 백성들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니 말이다.
“이런 곳에, 그, 비밀통로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응. 나도 얼마 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었거든.”
이전 삶에서 이것을 이용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주안은 바로 얼마 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는 말로 적당히 둘러댔다.
하지만 그것을 거짓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이런 곳에…….”
“조금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만한 장소는 없다니까.”
마를렌 외곽에 위치한 창고이며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들이 보관된 장소다.
게다가 이곳은 위치도 썩 좋지 않았다.
다만…….
“…….”
워랜이 조용히 주안에게 팔을 뻗어 창고 벽 쪽으로 밀더니 토미나 솔이 황급히 창고 벽 쪽으로 몸을 딱 붙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세 명의 병사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침을 꼴깍 삼킨 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워랜과 토미가 구해온 어두운 로브의 모자를 끌어내렸다.
“허름하고, 위치도 안 좋고, 중요한 것도 없지만…… 경비는 삼엄하지?”
“……네.”
어둑어둑한 부분도 많았지만, 대부분 환하게 밝혀져 있는 창고단지는 지키는 병사들도 상당히 많았다.
주안의 말대로 이상하리만치 많은 인원이었기에 갸웃하게 만들었지만, 주안에게서 미리 비밀통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기에 다들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매해 직접 이곳에 오셔서 점검해. 구휼미, 사실 말이 좋아 구휼미이지 몇 년이나 큰 가뭄이 들지 않는 이상은 사실 사용할 일이 없는 곳이 바로 이 창고단지야.”
그런데도 경비가 삼엄하고 매년 직접 점검을 하러 가주가 나선다는 것은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영지민들을 아끼는 영주로서의 의무를 잘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사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우리 가문은 정말 자손이 귀해서 그런지, 이런 안전장치는 심할 정도로 잘 되어 있거든. 이것도 그 안전장치 중 하나인 비밀통로이고, 그게 이 창고 중 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아…….”
토미도 그제야 조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토미뿐만이 아니라 워랜이나 솔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대귀족들, 그리고 황가의 황성에도 이런 비밀통로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공작성까지의 꽤 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공작성까지 이어져 있는 비밀통로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 비용과 시간을 보내며 인내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역대 가주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자손이 귀한 것을, 그리고 그 귀한 자손을 지켜내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하였는지, 주안도 이제는 조금 깨달았으니 말이다.
‘사실 이 비밀통로 외에도 외부에는 더 많은 장소가 있지만…….’
마르티네스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자손만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을 알기에 역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가주들은 이러한 비밀통로를 통해 만약의 사태를 피한 자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남겨 두었다.
동방 대륙으로 떠날 수 있는 비밀 상선이나 자금, 북부나 서부, 남부 어디든 몸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 등등.
주안 역시 이 비밀통로를 이용해 동방 대륙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토미로 인해서 그러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러한 토미와 함께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저 창고 맞지? 7번.”
“예. 맞아요. 저 창고에요.”
워랜의 말에 숨어서 그곳을 지켜보던 주안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여타 창고들보다 작고 허름하며 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의 7번 창고는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도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저,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이들이 다수였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워랜이라는 제대로 된 실력자로 인해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가자.”
“예, 워랜 경.”
워랜은 잠시 주변에 퍼진 경비들의 기척을 쫓다, 이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주안과 토미, 솔을 인도하여 창고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안 역시 이런 워랜의 뒤를 빠르게 쫓은 뒤 주머니에 있던 세냐를 조심스레 꺼내어 말했다.
“세냐, 부탁해.”
“흐흥~ 잘 보시라고요.”
주안의 부탁에 세냐가 잽싸게 나오더니 자신의 마법 솜씨를 한껏 뽐내며 그대로 창고의 문과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각종 마법적 장치들을 멈추며 나갔다.
그리고 이런 세냐의 행동이나 창고에 걸어져 있는 마법적 기운에 워랜과 토미, 솔이 적잖이 놀란 듯했다.
이들을 보며 주안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허름하다고 얕봐서는 안 된다.’
이곳 창고 중 이 7번 창고는 마법적인 방비가 잔뜩 깔려 있는, 말 그대로 요새와도 같은 장소였다.
허락되지 않은 이들은 절대 열 수 없고, 강제로 열려고 하면 공작성에 그대로 전달이 되었으며, 벡브란 전대 공작의 방으로 신호가 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군사 요새와 각 경비대, 치안청에서 포위하고 달려들 것이다.
‘워랜 경 정도의 실력자라면 부술 수는 있지만, 소리 없이 부수긴 힘들지.’
주안이 이들에게 알려준 이유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곳의 방비를 적어도 인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뚫을 수 없다는 자신감, 그리고 워랜과 같은 실력자라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제로 연다고 해도 순식간에 공작성, 가주에게로 연락이 전달되기에 이러한 실력자를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능력에 포함이 되지 않는 세냐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좋았어. 열었어요.”
“……빠르네.”
“흐흥~ 이 정도야 쉬워서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거든요.”
“왠지 화가 나는 말인데. 그래도 우리 가문에 계시던 역대 최고의 마법사인 솔론 공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부은 걸작인데…….”
이 비밀통로를 만드는 것에 사람의 손이 전혀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바로 4대째의 가주였던 노라 마르티네스 공작의 최측근이자 현재의 가론 노밀 자작의 위치에 있던 당대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던 솔론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능력과 마법적 지식, 그리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지원한 수많은 마법적 물건을 쏟아부어 만든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작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니, 세냐에 대해서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솔론 공이 너무나 안타까운 주안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곧 경비들이 다시 올 거야.”
워랜의 말에 주안이 씁쓸한 미소를 짓다, 자신의 능력에 감동을 하고 있는 세냐를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안과 함께 일행들 모두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워랜이 창고의 문을 닫았다.
“세냐, 다시 부탁할게.”
“맡겨두시라고요.”
그리고 주안은 재차 세냐를 주머니에서 꺼내 부탁을 하였고, 세냐는 별다른 불만 없이 자신의 능력을 한껏 뽐내며 자신이 멈추어 놓았던 창고에 걸린 모든 마법을 재가동시켰다.
“몇 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데, 괜찮죠?”
“……영광이지.”
“헤헷.”
주안의 말에 세냐가 기쁜 듯 웃어주며 무언가 마법진들을 잔뜩 그려 창고의 문이라거나 벽면, 지붕, 바닥 할 것 없이 그려주었다.
“여기 열려면 기존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돼요. 단지 강제로 열거나 몰래 숨어들려면 통구이가 될 각오를 해야겠지만.”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마법을 걸어 두었구나.”
“이 정도는 해야 딴생각을 못 하겠죠. 안 그래요, 오빠들.”
세냐의 무시무시한 말에 토미나 솔이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들도 세냐의 마법 솜씨가 남다른 것을 알아버렸기에, 감히 이곳을 침입한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 않았음에도 재차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도전 욕구가 불타오르긴 하는데.”
“……제발 그만두세요. 만약 정말 그랬다가는 가론 자작님에게 다리가 부러지는 것으로 안 끝나실 거예요.”
“농담이야, 농담.”
“워랜 경의 말은 농담처럼 안 들리거든요?”
워랜의 작은 중얼거림에 주안이 기겁했다.
다만 워랜은 이내 피식 웃어버리며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주안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였다.
“그보다 그 비밀통로는 어디야?”
깜깜한 어둠을 물리치듯, 세냐가 빛을 밝히자 주변을 둘러보던 워랜이 갸웃하며 주안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그냥 일반적인 창고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창고에는 차곡차곡 곡물 자루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주안은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다, 한쪽 기둥으로 걸음을 옮기자 모두 그 뒤를 따라갔다.
‘여기던가……. 아, 여기다.’
주안은 기억을 되짚어 보며 기둥을 살피다가 무릎 부근에 위치한 부분을 발로 톡톡 치다 꾸욱 눌렀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 옮겨 바닥을 톡톡 치다 꾸욱 눌렀다.
그리고 한쪽 벽에도, 다시 끝에 위치한 기둥 등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똑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 행동이 무엇인지 몰라 갸웃하던 이들도 이내 작은 소리를 내며 창고 구석진 곳의 바닥이 서서히 일어나 문이 열리자 그제야 주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자, 갑시다.”
그리고 주안은 싱긋 웃으며 이들에게, 처음으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비밀통로를 가주와 가족들 외의 외부인에게 공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