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24화
점심을 먹고 슬슬 출발을 하러 짐을 챙겨 든 주안은 세냐를 잠시 토미에게 맡긴 뒤 자신은 할아버지를 만나러 집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짧은 시간만 오갔던 이전과는 달리 주안의 기억 속의 마를렌의 공작성은 매우 익숙한 장소나 다름없었다.
‘계속 여길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과거에 얽매여 그 화려했던 생활을 계속해서 붙잡고 떠올렸던 주안이었기에, 수십 년의 삶 속에서 공작성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잊어본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굉장히 익숙하게 공작성을 오갔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 것인지, 적어도 그 장소나 위치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느긋하게 공작성 복도를 걸으면 이전과는 달리 주안, 자신을 보면 피하는 것이 아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조금 부끄럽긴 해도 기분이 매우 좋은 일이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참…….’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해도 이처럼 많은 이들이 따라주는 자리임에도 그땐 대체 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뭐, 이제부터라도 잘 하면 되니까. 앞으로가 중요한 일이니…….’
이제 과거를 많이 떨쳐내고,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아 그때의 그러한 일들을 다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가 있는 집무실로 향하면서도 주안은 요령 좋게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이들이나 반겨주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답해주며 그렇게 집무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안이 온 것을 안으로 알린 뒤 문을 열었다.
주안은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간 후 소파에 앉아 동방 대륙의 곰방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담배는 좀 끊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다행이라면 곁에 있던 가론 노밀 자작이 주안이 오기 전에 집무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두어 이러한 독한 담배 연기를 어느 정도 내보낸 뒤인지라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슬슬 집으로 갈 생각이더냐.”
“네, 할아버지. 그래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인사는 무슨…….”
퉁명스레 그렇게 말을 했지만, 조금은 쓸쓸한 듯 곰방대를 입에서 떼어낸 벡브란 전대 공작이 주안이 다가와 소파에 앉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곧 떠날 손자 녀석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듯한 그 모습에 가론 노밀 자작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의 맞은편에 앉아 주었다.
“그래도 조만간 다시 보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황도로 올라가시면 느긋하게 쉬시다가 오십시오.”
“느긋하게는 무슨……. 네 녀석에게 이 자릴 맡겨두고 가려니 불안해서 못 살겠다만?”
“……어차피 제가 다 하는 일 아닙니까.”
“크흠. 내 결재가 없으면 하나도 안 돌아가잖나.”
“아니, 결재야 당연히 해주셔야 하는 거잖습니까?!”
투덜거리는 벡브란 전대 공작의 그 말에 가론 노밀 자작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의 툴툴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는 두 어르신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웃어주며 말했다.
“가론 자작님 말씀처럼 이번에 오시면 오래 있다가 가주세요. 제 동생도 곧 태어날 건데, 그 모습은 보셔야죠.”
“크흠…….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썩 싫지는 않은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잠시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주안 역시 자신이 올 걸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앞에 놓여 있던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아마 이번 황도로 오시면 정말 오래 계셔야 할 거예요. 풍신 경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린다 해도, 할아버지께서도 만나 보시는 게 좋을 듯하거든요.”
“네 아비가 있지 않으냐?”
“아빠, 아니, 아버지도 그렇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계셔야 일이 수월하게 풀릴 듯하니까요.”
아빠라는 그 말에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잔뜩 찌푸리자, 주안이 잽싸게 아버지라는 말로 바꾸었다.
주안 역시 눈치가 있기에, 아무래도 할아버지 앞에선 엄마, 아빠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권유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주안이 그와 인연이 있다 해도 실질적으로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것은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고, 황도, 그리고 황성의 일이라면 자신의 아버지인 주레인 공작이 맡는다 해도 이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메데아 대족장님도 모실 거고,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도 있으니……. 금방 끝나지는 않겠죠.”
“쯧. 그래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으니 편하긴 하겠구나.”
“하하……. 전 오히려 복잡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인걸요.”
한 가지 일만 해도 주안으로선 벅찬데, 이런 많은 일을 마주한 채 질려버린 주안과는 달리 벡브란 전대 공작은 오히려 귀찮게 하나하나 해결하는 것보단 한 번에 모아서 해결하는 게 편해 보였다.
참으로 화끈한 그 성격에 주안은 부럽기도 하고, 이런 성격을 아버지나 자신이 전혀 물려받지 않은 것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피는 진하다고는 하나, 할아버지의 좋은 점은 어째 아들이든 손자든 하나도 가지 않은 듯했다.
“어쨌든 가서 전부 해결을 보는 것으로 하자꾸나. 그리고…… 시간이야 남는다면 좀 있다가 가도 좋긴 하겠구나.”
“예. 꼭 그렇게 해주세요.”
“그래…….”
주안의 이런 부탁이 뭔가 참 낯설게만 느껴지는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지만, 그런데도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이전의 주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잔뜩 찌푸리기만 하고 화만 버럭 내던 그였지만, 주안이 변한 만큼 자신 역시 많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걱정거리와 그 큰 짐이 사라지니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찾아온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주안이라는 사랑스러운 손자가 제대로 자라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랑스러움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한데 이 할아비가 가서 눌러앉으면, 네 어미가 참 싫어할 텐데 말이다.”
“에이,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를 좀 무서워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흠…….”
그리고 주안은 조심스레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물론, 그, 어머니의 취미 생활을 조금만 여유 있게 바라봐 주시면 어머니도 충분히…….”
“그것은 취미가 아니라 돈 지랄……. 아니, 씀씀이가 너무 큰 것이야.”
“그나마 어머니의 개인적인 돈으로 사용하는 것이니까……. 그게…….”
“후우…….”
자신의 엄마에 대해 변호를 하는 주안의 모습에 여전히 남아있는 마마보이의 기질을 보며 벡브란 전대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주안의 행동에 여전히 가르칠 게 많다는 것에서 벡브란 전대 공작이 말했다.
“황도로 가서도 공부는 계속하거라. 그리고, 이 할아비가 가서 단단히 가르쳐 줄 것이니 말이다.”
“으윽…….”
뭔가, 기쁘면서도 조금 무섭기까지 하는 바람에 주안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무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기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자,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공자님이 떠나는 자리에서 하지 마시고……. 그보다 황도로 돌아가시는 데 뭔가 더 챙겨 가실 것은 없으신 겁니까?”
가론 자작의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다시 곰방대를 입에 물고는 담배를 뻑뻑 피워댔고, 주안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론 자작을 보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도 않았다.
“이미 많이 챙겨서 더 가져가면 오히려 큰일이 나겠어요.”
“그래도 동부의 특산물이라거나 안젤라 님의 몸을 위해서라도 동방 대륙의 좋은 약재들도 좀 더 챙겨 가시는 것이…….”
“외할아버지, 아니, 황제 폐하께서도 어머니 몸을 위해서 많이 힘을 써주시고 계시거든요. 게다가 황도 대신전의 대신관님도 매일 오셔서 엄마를 봐주시고요.”
“호오, 그렇습니까. 그러면 정말 다행이군요.”
아무리 영약들이 많다 해도, 역시 황성에서 난다긴다하는 의사들이나 대신관급의 신성력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게다가 황제가 가장 아끼는 딸이기에, 황실 차원에서도 몸에 좋은 약들을 많이 보내어 안젤라의 건강은 정말 지나칠 정도로 좋을 정도였다.
그것을 알고는 가론 자작 역시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을 느끼고는 웃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과 가론 자작의 모습을 뚱한 표정을 지으며 보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며 주안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
“펼쳐서 읽어 보거라.”
“네?”
잠시 갸웃하던 주안이 그런 할아버지의 말에 조심스레 손에 든 종이를 펼쳤다.
뭔가, 중요한 것이 담겨있나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이름 두 개가 적혀 있는 것에 주안이 갸웃하며 말했다.
“로엘린 마르티네스? 라스 마르티네스?”
“딸아이면 로엘린, 아들이면 라스. 어떠하느냐?”
“……설마, 제 동생 이름이에요?”
“밤새 고민을 해보았다만, 저 두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더구나.”
“…….”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주안은 그저 말없이 자신의 손에 들린 곧 태어날 동생의 이름과 할아버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할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가론 노밀 자작 역시 한 마디 거들었다.
“딸아이 이름은 제가 추천을 드렸습니다. 망할 아들 녀석이 아니라 딸이었으면 했을 때 지은 이름이었지요.”
“……워랜 경이 아니라 로엘린 양이 될 뻔한 노밀 가문의 자손 이름이었군요.”
“뭐 어떻습니까. 예쁜 이름이면 되지.”
“하하…….”
동방 대륙에서는 별의별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서방 대륙 역시 유수의 가문들은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담았지만, 이 동부에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다.
그저 이름이 마음에 들고 멋지고 예쁘면 끝이라는, 참으로 쿨한 바닷사람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저기……. 그런데 이름은 엄, 아니, 어머니랑 아버지가 생각하시고 계신 게 있으신 듯한데…….”
최근 사이가 무척이나 좋아진 부모님이었다.
서로 아들인지 딸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름은 뭐로 지을 것인지 주안에게도 의견을 구할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았기에 주안으로선 참으로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곰방대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임신 사실도 숨기더니, 이제는 손자, 손녀의 이름을 짓는 것까지 제들 멋대로 할 생각이었더냐?”
“그, 그게……”
“자고로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정해주는 것은 이 동부의 오랜 전통으로서 그것을 깨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공자님.”
“그런 전통이 있었어요? ……그보다 제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준 건데…….”
“그 전통을 처음으로 깨뜨린 것이 안젤라 님이셨죠.”
“…….”
대단하다고 하면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주안으로서도 뭐라 할 말이 없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주안은 할아버지와 가론 노밀 자작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뜻을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그 강한 의지를 느끼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할아버지가 건네준 종이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일단 말씀은 드려 볼게요…….”
“명령이라고 전하거라.”
“……예.”
“이번에는 딸아이이길 바란다고 전해주십시오. 아들 키워봐야 소용이 없더군요.”
“……저도 아들인데요.”
앞으로 태어날 동생의 이름을 가지고 이토록 진지해질 수 있다는 게 주안으로선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거절을 할 수도 없는지라, 일단 말은 전하겠지만 들어줄 것인지는 사실 주안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은 이런 두 어르신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