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20화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봐요. 적어도 그런 부탁에 관해선 제가 직접 그분을 뵙고 부탁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호오…….”
주안 정도의 위치라면 그저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 대리인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은 답이 아니다.
저쪽은 아쉬울 것이 크게 없고, 이쪽은 반드시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을 때와 숙여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것은 많은 이들을 이끌어 갈 사람의 덕목 중 한 가지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동안 주안은 지나칠 정도로 고개를 숙여 벡브란 전대 공작에게 실망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기에 납득을 하고 주안을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난다는 것은 네가 직접 다시 아스란 왕국까지 가야 한다는 의미란다. 가능하겠느냐?”
“일단 아스란 왕국 북부에 있는 슬렌더 백작가의 영지에서 만나면 어떨까 싶기도 해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직접 아스란 왕국의 왕도로 가는 방법도 있고요.”
“……네 어미가 굉장히 싫어할 일이로구나.”
“하하…….”
벡브란 전대 공작의 걱정만큼, 주안 역시 그 생각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황도로 오시고, 링베르가 공작가와의 일을 매듭지은 후가 될 거니까요. 무엇보다 그 일은 엄, 아니, 어머니의 출산 이후가 되지 않을까 싶거든요.”
“하긴……. 임신 중인 네 어미를 버려두고 가기에는 네 성격이 모질지는 못하지.”
“버, 버리다니요?!”
말이 지나치게 과격한 할아버지의 말에 주안이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오히려 작게 웃어주며 말했다.
“하나, 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답이 있지 않으냐?”
“예? 그런 답이 있어요?”
주안이 갸웃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주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풍신이라는 자를 황도로 부르거라.”
“할아버지. 그건 그분을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 수가 있어요. 반감을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에요.”
풍신에 대해서 주안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실력에 맞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대우와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평민이 아님을 그와 대화를 나눈 이들이라면 모두 눈치를 채고 있었다.
주안도 그가 동방 대륙에서 확실히 높은 자리에 올라 있던 인물이라는 것을 대충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능력과 지위에 맞는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예의였기에, 할아버지가 한 말에 반대의 의견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이런 주안을 보며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말했다.
“반감이라……. 그런 것을 가지지 않게끔 좋은 선물을 쥐여주면 될 것이 아니더냐.”
“하지만, 아무리 돈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어요. 그리고 풍신 경의 성품으로는 오히려 그게 더 큰 반감을 가지게 만들 수 있는,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안 좋게 볼 수가 있어요.”
오히려 더욱 일을 밀어붙이려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주안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할아버지답지 않다는 것도 그렇지만, 주안은 할아버지가 결심하고 일을 밀어붙이면 막을 수 없음을 알기에 황급히 할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그 제자가 된 워랜 경이나 토미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가 있으니, 보다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할아버지.”
“걱정 말거라. 그들에게도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닐 터이니.”
“예?”
이미 이전에도 이런 논의가 오가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안이 가서 풍신을 만나서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에서 주는 선물이었고 지금은 반대로 불러서 명령을 내리며 수고비로 주는 선물이었다.
그 차이는 너무나 크고, 명성에 누가 되는 행동을 극히 꺼리는 서방과 동방의 기사와 무사 계급의 이들에겐 치욕이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오히려 별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에 주안이 갸웃하자,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며 주안에게 말했다.
“아스란 왕국의 공주라던, 유우나 아스란이란 아이가 네 아비와 작은 거래라도 좋으니 사업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당돌하게 제안을 하였다 들었다. 맞느냐?”
“아, 그런 일이 있긴 했었어요.”
아스란 왕국으로 떠나기 전날, 유우나 공주가 주안을 만나 그러한 부탁을 하였던 것을 떠올리며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참으로 절박해 보였던 유우나 공주였고, 반대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하려는 모습이 너무나 빛나 주안은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을 하거라. 그리고 황도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정식으로 초청을 한다고 말이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문에서 아스란 왕국의 공주인 유우나 공주에게 보내는 정식 초청이다.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것이며, 이 초청에는 그녀가 바라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와…….”
“풍신 경을 위한 선물, 록산느 경과 가문의 기대주인 두 기사를 떠넘기기 위한 자리가 되겠군요.”
“그래. 제대로 파악을 하였구나.”
“하아, 할아버지…….”
주안이 내린 답에 대해 만족을 하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싱긋 웃어주자 주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면 때때로 이렇게 주안을 시험에 들게 할 때가 있었다.
그게 싫지는 않지만,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모습에도 벡브란 전대 공작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조건을 내걸어 주마. 아스란 왕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이미 이전 세대의 정신 나간 녀석들이 벌인 일이 아니더냐. 그리고 이미 그 녀석들은 모조리 죽었지.”
살벌한 말을 내뱉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주안이 움찔하며 놀랐다.
그 모조리 죽었다는 이들은 할아버지의 손으로 모두 처단을 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후회도, 미안한 감정도 보이지 않은 채 당당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주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한 일에 일말의 후회도 없는 그 당당함이 부러웠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조용히 주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주안아. 네가 보기에 아스란 왕국의 녀석들은 충분히 반성하고, 제국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느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주안이 잠시 침을 꼴깍 삼키며 생각에 빠졌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주안 역시 할아버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아스란 왕국의 이들은…… 아직 제국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있어요. 그것은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가족이, 친우가, 연인이…….
그 전생 속에서 스러졌기에 제국을,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을 원망하는 아스란 왕국의 사람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다만, 주안은 거짓 없이 할아버지에게 아스란 왕국에서 보았던 그들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이에요. 그들 역시 이전 전쟁에 대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윗세대의 이들이 어떤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고 반성을 하고 있어요.”
그 전쟁을 직접 겪었던 이들조차도 자신들의 조국이 벌인 어이없는 짓에 대해서는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슬렌더 백작가나, 동부의 반란군이나, 현 왕가나……. 일반 백성들조차 말이죠. 그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되는 전쟁이었으며, 있어선 안 되었다 생각을 해요. 물론 제국에 대해 원망도 있지만, 그보다 그 전쟁을 일으켰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으니까요.”
“역사 교육을 게을리하였다면 원조 따윈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황가가 나서서 그들에게 무상 원조를 그냥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잘못을 세대를 거쳐 이러 나가며 기억하고, 교육하고, 알리고 반성을 하게 만들었기에 그러한 원조를 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굶어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거나, 혹은 남부군을 통해 완벽하게 지워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살육자가 아니다. 그들의 윗세대…… 일부가 저지른 잘못을 모든 이들에게 짊어지게 만들지는 아니한다. 단, 반성하지 않는 이들에겐 반드시 징벌을 가한다.”
역사에 대해선 거짓 없이 똑바로 기록을 해놓아야 한다.
그게 설령 자국이 벌인 부끄러운 짓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반성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미래란 없는 것임을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주안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주안에게 제대로 기억시키려는 듯, 혹은 주안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바람을 담은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주안에게 말했다.
“잘 기억하거라, 주안아. 일부의 잘못에 대해 모두에게 징벌하는 애먼 짓은 절대 하지 말거라. 그들이 단체로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 그때 징벌을 해도 늦지 않는단다.”
“예. 명심할게요, 할아버지.”
힘이 있는 자에겐 어느 정도 관용이 필요하다.
다만, 그 관용이란 언제나 약자에게 보일 필요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약자로서의 아스란 왕국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본능이니 말이다.
그저 다수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강자인 제국의 징벌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주안은 이러한 할아버지의 말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기에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일방적인 원조가 아닌, 정당한 거래가 될 것이니 양보 따윈 있어선 안 된단다.”
“……서부로 가는 군량미를 모조리 줘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크흠. 그것은 투자라는 것이지.”
“투자가 지나칠 정도로 과하세요.”
쓴웃음을 지으며 지적하는 주안의 모습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주안의 시선을 슬쩍 피할 뿐이었다.
뭐가 되었든 풍신에게서 배우는 검은 반드시 필요했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과할 정도로 투자를 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할아버지 말씀대로 해볼게요. 이 일은 저한테 믿고 맡겨주세요.”
“어차피 네 손에 달린 일이었으니, 네 재량껏 해 보거라. 그리고 이 할아버지나 가론 녀석이 했던 그 말은 빈말이 아니니, 안 되면 그때 언급한 것을 말해보고 말이다.”
“……절대 그런 일까지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서부 국경을 지키는 이들에게 가던 군량미라든지, 노밀 자작가의 말 백여 필이라든지, 정말 지나칠 정도로 과한 조건은 오히려 풍신이나 유우나 공주가 부담스러워 할 수가 있음을 주안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면 오히려 크게 당황할 수 있었다.
‘……만약, 진짜 할아버지 말씀대로 해보면 유우나 공주가 놀라시겠지?’
왠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한 번 언급을 해보고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마저 들어 주안이 피식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