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15화
너무나 악의적인 그 모습에 아미엘은 뭐라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그를 그저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남아 있는 사념이고 그림자라고 하나 크세니아의 이전 삶을 그대로 간직한, 또 다른 크세니아와 같은 존재.
하지만 그런 그가 너무나 달라져 있다는 것에 아미엘은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란, 그들의 육체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망가뜨려 버린 것일까.
그 어떤 종족이나 심지어 요정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한 정신력을 가진 그였다.
그런 그였지만 기약도 없이, 그저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만을 주고 혼자 이곳에 남겨진 것이 그가 망가진 원인이었을까.
아미엘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가 안쓰러웠다.
“너는…….”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니까. 난 말짱하니까. 오히려 조금 더 세상을 잘 살펴볼 수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을 뿐이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크세니아의 잔존사념이라는 그림자의 눈은 강한 분노만이 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상해…….’
그리고 주안은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겉모습은 인간이나, 그 속은 인간 따위는 그저 길가의 개미처럼 사뿐히 짓밟을 수 있는 거대한 존재였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마치 인간과도 같았다.
원망하고, 증오하고, 분노하고, 그것을 가감 없이 뿜어내는 그러한 존재.
‘인간을 싫어하는데, 그만큼 증오하시는데 어째서…….’
어째서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 그러면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해결 방법 모두를 알려 주었는데. 뭔가 더 바라는 거라도 있어?”
“그건…….”
순간 주안은 그에게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었다.
주안보다 앞서 아미엘이 나서서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너는 이 장소에서 마를렌을 만난 이후로도 쭈욱 세상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말에 거짓은 없는 것이겠지.”
“딱히 거짓말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나? 지금까지 내가 한 말에 거짓이 있어 보였어?”
“…….”
미심쩍은 부분은 있을지언정, 그가 무언가를 꾸며내고 거짓을 하였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부분을 느꼈지만, 주안보다도 아미엘이 먼저 눈치를 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미엘은 그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엘프들은, 드워프들은 아직 이 대륙에…… 세상에 존재하고 있느냐.”
많은 것이 궁금하였고, 주안을 통해 알아가려 했었지만 남겨진 자료와 지식이 거의 없었다.
알고자 하는 것에는 확실한 한계가 있었고 많은 부분이 부족하였으나, 아미엘은 크세니아가…… 그의 그림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 그 이상으로 많은 지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작은 희망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 아미엘의 모습에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야,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알고 싶어 했어?”
“답이나 하거라.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느냐.”
빙글빙글 웃는 그에게 아미엘은 보다 냉정하게 물었고, 딱히 더 이상 장난을 치거나 할 생각이 없는 듯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존재하고 있지. 그 궁핍한 남부를 벗어나 자신들의 의지로 잘 살아가고 있어.”
“…….”
크세니아의 그림자의 말에 아미엘은 오히려 매우 다행이라는 듯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세 요정 꼬맹이들마저 표정이 확 밝아졌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오크를 제외한 다른 이종족들의 존속 여부였다.
엘프와 드워프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그 말에 안심하면서도 기대했다.
그것은 주안이나 소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아무리 대륙이 넓다 해도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이미 오크들처럼 잊혀진 것인지, 그들에 관한 부분도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지워져 버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하면 어디에 가면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냐.”
“성격도 참 급하네. 너 원래 그런 성격이었어?”
“어서 답이나 하거라.”
“쯧…….”
그들이 존재한다는 말에 아미엘은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듯 크세니아의 그림자를 재촉했지만,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오히려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그 녀석들은 네 방식이 싫어서 떠났던 아이들이야.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 아이들의 후손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할까?”
“…….”
그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남부를, 함께 살던 오크들을 떠나 자신들의 삶을 찾아 가버린 이들이었다.
크세니아의 말을 전적으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한 말이 정말 진실이라면 아미엘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듯 아미엘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만나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무사히 지내는 것을 확인만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니까요.”
“너랑은 별로 상관이…… 있겠구나.”
주안의 말에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주안이 어쨌든 순수한 인간이 아닌…… 한때 엘프들을 이끌었던 그들의 수장인 마를렌의 직계 후손임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 했다.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다, 이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미엘과 주안을 보며 말했다.
“가르쳐 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쉽게 만날 수 있지는 않을 거야.”
“그 방법까지 네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어디 있는 것인지, 그것만 알면 되느니라.”
“뭐가 되었든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주안과 아미엘에게 말했다.
“북쪽. 눈과 얼음의 그 척박한 땅에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집을 짓고 의미 없는 희망을 전파하고 있지.”
“지금 나에게 문제를 내는 것이더냐?”
“그런 것 같아? 나는 나름 재미나게 표현을 하였다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너는 아니겠지만, 저 아이는 무언가 아는 눈치인데 말이야?”
그리고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손가락으로 주안을 가리키자, 아미엘 역시 주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러한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도 주안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크세니아가 한 말을 곱씹다가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북쪽의 땅이라면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희망이라는 그 말이 어울리는 곳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무라디안. 그리고 성도 다예프.
“설마, 교단……?”
“정답. 상을 주고 싶지만, 줄 만한 게 마땅찮네.”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웃는 그의 행동이 거슬려도 그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교단은 인간들을 구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 설립된, 신의 말을 전하는 집단이에요. 그런데 그 교단의 중심지인 북부에, 이종족들이……?”
인간을 증오하던 이종족이 인간을 보듬고 희망을 주기 위해 설립된 교단에 있다는 그 말을 주안으로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니, 이것은 오크들이라는 달란트 부족과는 애초에 그 궤를 달리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을 무조건 믿지 못하는 이유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있었다.
“그래서 성흔이 다예프의 대신전에서 성녀와 성자라는 이름으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건가…….”
“일전에 네가 말을 하였던 그 교단이라는 곳 말이더냐?”
“예. 만약 정말 그렇다면, 성자와 성녀라는 존재는 이종족…… 드워프일 가능성이 커요.”
주안과 마찬가지로 혈연으로 이것이 이어져 내려온다면 현재 다예프의 대신전에 있다고 하는 성녀는 드워프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오크의 성흔은 세계수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엘프들의 성흔은 주안이 가지고 있다.
남은 성흔이라고 한다면 결국 드워프의 성흔이다.
이 성흔을 가진 채 그동안 계속해서 성자와 성녀가 이어져 내려왔다면, 결국 답은 하나라는 의미다.
“하지만 드워프의 모습은 확실하잖아요? 꽤 작고, 다부지고…… 수염도 잔뜩 나 있다고 들었는데…….”
이게 그저 전해져 내려오는 동화와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런 주안의 말에 아미엘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을 보아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님이나 황도의 대신관님에게 들었던 다예프의 신관들은 폐쇄적이긴 하나 이상한 부분은 전혀 없다고 들었어요.”
주안은 성흔을 가졌다는 성자와 성녀로 인해서 이미 한 번 알아보았었다.
아니, 그 이전에 아미엘은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부탁을 해놓은 상태였고, 그 사이 주안도 알아본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주안은 자신이 아는 두 대신관을 통해서 다예프의 폐쇄적인 이야기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상한 점이라고는 말 그대로 지나칠 정도로 폐쇄적인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외모가 특이하였다면 그 부분을 알려 주었겠지만, 그 역시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다.
“……교단에 있는 것은 엘프라는 의미이군요.”
엘프의 외모는 인간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귀가 조금 더 뾰족하고 그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이 전설로 전해져 오지만, 그 말대로라면 귀만 가리면 인간과 다른 점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엘프가 그곳에 있다면 드워프들도 그들과 무언가 연관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네요.”
인간을 위해서 일어나 인간을 위해 일을 하였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들을 보살폈던, 신의 말을 전하고 신의 힘을 행사하며 인간들을 이롭게 해주었던 그들이…….
“……하지만 어째서 이종족들이 교단에서 그런 일들을…….”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닌,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을 줄은 주안으로서도 생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주안은 그런 고민에 잠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이내 무언가 훌훌 털어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교단에 이종족들이, 엘프와 드워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면 만날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게 정말이더냐?”
“예. 저희에겐 마누엘 전대 대신관님도 계시고 저희 가문과 친밀한 황도 대신전의 대신관이신 페트롤 대신관님도 계세요. 두 분을 통한다면 성도 다예프의 고위 신관과 접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주안의 가문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힘이라면 시간이 조금 걸려도 그들에게 접촉하고 알아보는 것은 큰일도 아니었다.
이런 주안의 자신감 어린 말에 아미엘은 이 장소에 와서 처음으로 그녀다운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일단 만나보면 뭐든 알 수 있겠죠. 그들이 왜 숨어 지내지 않고 교단에 몸을 담고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주안 역시 이런 아미엘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를렌 님에 관한 이야기도 알 수 있겠지요. 적어도 그쪽에는 엘프들이 있다는 확률이 매우 높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그리고 엘프들의 삶은 매우 길단다. 우리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느니라.”
그녀의 말대로 엘프들의 삶은 인간들이나 다른 두 이종족들을 아득히 초월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당시 아미엘과 함께 살아가던 엘프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아미엘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떠나고, 내친 것에 대해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일단 만나 봐요, 아미엘 님.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세요. 그리고 정말 그들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하시는 게 마음이 편해요.”
“참으로 태평한 말이로구나. 하지만…… 그 말이 옳다. 지금 고민해봐야 얼굴에 주름만 질 것이니 말이다.”
“주름이라……. 뭐, 그땐 제가 피부를 팽팽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거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장난 가득한 주안의 그 말에, 그가 자신을 위로한다는 것을 느낀 아미엘은 주안이 참 대견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여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줄 수가 있었다.
단지, 그런 주안과 아미엘의 모습을 보며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