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14화
주안과 크세니아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한동안 말없이 그저 빤히 바라만 보았다.
주안으로서는 마를렌이 그러한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크세니아는 그저 미소를 짓고 지금의 이 상황, 아미엘이 혼란스러워하는 그 모습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주안은 크세니아의 이러한 행동에서 심술궂은 아이의 모습을 느끼고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크세니아라는 그 드래곤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 걸까.’
아미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나름 친근했지만 어째서인지 악의마저 느껴지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그의 모습은 이해되지 않았다.
주안은 크세니아와 아미엘이, 그리고 요정들이 꽤 친밀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아미엘이 크세니아를 언급할 때는 그를 존중하고, 믿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크세니아 또한 그녀에게 중요한 것을 맡긴 것을 보면, 아미엘이 그를 믿는 만큼, 크세니아 역시 아미엘을 신뢰했다.
무엇보다 깐깐한 세냐가 크세니아를 할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친근하게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가 남긴 잔존사념이자 그림자라 하여도, 눈을 감을 당시의 모든 것을 넘겨받은…… 또 다른 크세니아나 다름없을 그가, 아미엘을 이렇게 대한다는 것이 주안으로선 의아했다.
“좋다. 마를렌이 네게 그것을 묻고 그대로 따라 나를 이 땅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틀림없는 진실일 터. 결국,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마를렌뿐이었니 말이다.”
“흐응~ 믿으라니까.”
“아미엘 님…….”
아미엘의 말대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마를렌과 주안.
단 두 사람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도 성흔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결국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아미엘을, 요정들을 이 땅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를렌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 그 아이가 나에게 악의를 품고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유가 있었기에 그 아이 역시 그 땅을 떠났을 것이니 말이다.”
“너는 정말 그 아이를 지독할 정도로 잘 믿는구나.”
“내가 보아온 마를렌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아이였으니, 믿지 못할 이유는 없느니라.”
“…….”
오히려 아미엘이 고민을 털어내고 미소를 짓자, 크세니아의 표정이 조금 굳더니, 이내 살짝 찌푸려졌다.
“하면 두 번째 질문에 답하거라.”
그리고 도도한 그 모습 그대로 크세니아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 땅에서 분리시켜 놓은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너희가 만들어낸 결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더냐?”
“글세, 완벽을 기한다고 하나 우리 역시 신의 피조물. 완벽함을 추구할 뿐, 불완전한 존재라서 말이지.”
“……말장난하자는 것이더냐.”
“그런 게 아니야. 우리가 만든 결계는 완벽했어. 단지, 그 당시에 한해서일 뿐이라는 게 문제지. 그저 우리조차 어쩌지 못 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을 뿐이야.”
크세니아의 말에 주안이 갸웃했지만, 아미엘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로군.”
“그래, 시간. 아무리 단단한 물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변질되지. 그러지 않기 위해선 항상 관리를 해줘야 하는 법. 하지만…….”
“그 관리를 해야 할 너희나, 우리는 없었다…….”
“정답.”
드래곤들은 결계를 만들고 육체를 벗어나 신의 품으로 돌아갔고, 요정들 역시 마를렌으로 인해 자신들의 세상으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결계를 관리해 줄 이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며 풍화된 결계에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뭐, 그것도 문제였지만…… 아미엘, 네가 더 큰 문제였지.”
“내가 말이더냐?”
“그런 게 있어. 다만, 지금으로선 그것을 고칠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뭐긴 뭐야. 저 아이의 성흔, 저거지.”
“아…….”
크세니아가 손으로 주안의 왼손을 가리키자, 지목당한 주안은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왼손바닥을 펼쳐 바라보더니, 크세니아에게 말했다.
“제, 성흔이요?”
“그래, 우리의 결계는 결국 신의 힘을 끌어내 우리의 방식으로 만든 것. 그것을 고치는 데는 내 힘이나 아미엘의 힘만이 아니라 신의 힘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단순히 마나라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신의 힘.
신성력을 빌려 만든 것.
그것을 고치는 것에 신성력만큼 탁월한 것이 없음을 아미엘 또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흔의 힘이라면…….”
“무엇보다 자애의 성흔은 고치는 것에서는 탁월하니까. 성흔의 힘을 끌어낸다면 문제없겠지.”
그리고 크세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구멍을 메우고, 문을 쾅! 하고 닫으면 만사 해결.”
너무나 간단히 말하였지만, 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주안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구멍이니, 문이니, 표현의 방식 자체를 주안에게 맞추어주려는 듯한 배려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거기에 아미엘 너의 전폭적인 도움과 결단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
아미엘을 흘겨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크세니아.
이런 크세니아의 말에 아미엘은 그저 말없이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런 아미엘의 모습에 크세니아는 다시 크게 과장된 몸짓을 하며 아미엘과 주안의 주변을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해. 저 아이가 가진 속성력이라는 건, 우리 용언의 찌꺼기가 확실해.”
크세니아가 소니아를 손으로 가리키자, 이번에는 그 행동에 지목당한 소니아가 움찔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다만, 그런 소니아의 행동 자체가 귀여운 듯 아미엘이나 크세니아는 주안을 대하던 태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소니아에게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크세니아의 행동에 작게 한숨을 내쉰 아미엘이 말했다.
“왜 그딴 짓을 저지른 것이더냐.”
“말했잖아, 찌꺼기라고.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냐.”
“의도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더냐. 그딴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결국 너희뿐이었다.”
아미엘이 노려보자, 크세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고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우리가 신의 품으로 돌아가며, 세상에 남겨진 육신은 그대로 시간이 지나며 풍화되었지. 다만…… 문제는 우리 마나의 근간인 심장이었어.”
“드래곤 하트…….”
“뭐, 너희는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지만.”
별로 달갑지 않은 명칭인 듯 크세니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딱히 별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크세니아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육신만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 그 모든 것을 가진 심장 역시 시간 속에 휩쓸려 가면서 세상에 분포된 마나에 섞여 들어가 버렸어.”
그리고 그는 소니아를 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속성력이란 그런 거야. 우리의 육체가, 심장이, 마나가 이 세상과 하나가 되면서 생겨난 또 다른 형태의 힘이라는 것이지.”
“그게 가능한 일이더냐?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래, 나도 놀랐어. 인간의 잠재능력이 그딴 방향으로 발전할 줄은, 세상이 변한 만큼 인간들 역시 그에 맞춰서 다시 변화하더군. 지긋지긋할 정도로, 정말 바퀴벌레 그 이상의 적응력이야.”
그는 확실히 아미엘과 친했던 만큼, 이종족들을 도왔던 만큼…….
‘인간을 굉장히 싫어해…….’
주안은 처음으로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을 본 듯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들의 힘에 적응하며 변했다는 것에 불쾌함을 넘어 경멸을 느끼는 듯 소니아를 노려봤다.
단지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목을 조르는 듯 엄청난 압박에 소니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아미엘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그 곁에 세 요정 꼬맹이가 자리 잡자 금세 그 기세는 지워졌고, 아미엘과 요정들은 소니아를 포근하게 다독여 주었다.
“그게 결국 인간의 손에 들어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아미엘과 요정들의 행동에 크세니아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런 인간의 편을 들고, 인간을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솔직히 몰랐어. 저 아이는 마를렌과 인간이 섞여 있질 않나, 그런 녀석에게 성흔까지……. 세상은 확실히 재미없게 흘러가나 보군.”
“크세니아, 아니, 그림자여…….”
단순한 중얼거림일 뿐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주안과 소니아를 옥죄어왔고, 그 말투에서는 인간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저 그림자의 생각인지, 크세니아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그것을 느낀 듯 아미엘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때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들은 다르니라. 너는 세상을 보고 있다 하였다. 하면 느꼈을 것이지 않더냐.”
“그래, 느끼고 있지. 적어도 아미엘, 네가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본 인간들이 저 성흔의 아이와 그 주변의 이들뿐이라면…… 네 눈에는 현재 인간들이 확실히 이전의 인간들과 다르다고 생각되겠지.”
하지만 크세니아의 생각은 아미엘과 전혀 다른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멀리, 좀 더 많이, 좀 더 다양하게 오래 보았어.”
‘오래’라는 말에 아미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긴 삶을 그저 바라만 보았던 것에 대해 안쓰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크세니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구역질 나는 인간들이 이종족들을 짓밟고 일어서서 비합리적이고 여전히 이성적이지 못 한 삶을 사는 것을, 그러면서도 끝없이 번영하고, 또 멸망에 가깝게 망가지고,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수백, 수천 년을 보아왔지.”
그 지독한 적의에 소니아는 기어이 주안의 등 뒤에서 옷깃을 꼬옥 잡고 몸을 떨었지만, 주안은 이런 적의는 수도 없이 받아왔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크세니아가 의외라는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안을 바라볼 정도였다.
“오히려 나는 잘되었다 생각되는데. 이왕이면 네가 우리의 결계를 고치는 데 실패하면 좋겠어.”
“어이하여 너는…….”
“왜? 이상한 거야?”
중립에 서서 인간과 이종족들을 바라보며, 한마음이 되어 몬스터를 몰아내었던 존재.
세상을 바라보며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의 역할.
그것은 드래곤에게 주어진 삶이었고, 그녀가 알던 크세니아였다.
비록 그림자라고는 하나 그의 인격, 그의 삶, 그의 능력 모든 것을 가진 눈앞의 크세니아의 잔존사념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아미엘의 생각을 안다는 듯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게 내 본성이고 내게 삶을 주었던 크세니아의 바람이었을 뿐이야. 언젠가 이종족들이,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나에게 간청하여 나의 안배를 받아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서는 것. 그리고…….”
그리고 조용히, 처음 그와 눈을 마주했을 때의 뱀과도 같은 그 눈으로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주안을 훑어보며 사납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인간들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또 다른 역할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