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13화
“어이해서 그 아이가…….”
아미엘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그 안색은 주안으로선 처음 볼 정도로 창백해졌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아이처럼 보였다.
주안은 조심스럽게 아미엘을 품에 안아주며 신성력까지 동원하여 아미엘을 진정시켰다.
다행히도 주안의 행동 덕분에 아미엘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지만, 크세니아의 잔존사념인 그림자가 콧방귀를 뀌며 아미엘의 말에 답했다.
“알 게 뭐야.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죽기 직전의 크세니아가 남긴 바람을 간직한 채 이곳을 찾아오는 이종족들을 돕는다, 이거밖에 없다.”
“하면 너는 왜 그 방법을 알려준 것이더냐. 그게 정녕 이종족들을, 그 아이를 돕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더냐.”
“그 역시 알 게 뭐야.”
그림자는 역시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 행동에 주안이 재차 발끈했지만, 소니아가 자신을 말리던 것을 상기하며 그저 그를 노려보는 것으로 참아내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서 말이지.”
“웃기는군. 너는 역할을 부여받았다지만 너는 너의 의사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지 않았나? 크세니아라면 자신의 명령대로 그 자리를 지키는 인형을 이 중요한 장소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헤에, 역시 나를…… 아니지, 이전의 나를 너무나 잘 안단 말이지. 하지만 말이야…….”
빙글빙글 웃는 그림자의 행동에 아미엘은 이제 더 이상 동요하지 않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여유로움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나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이, 선택받은 이종족이 원하는 답을 알려주는 인형일 뿐이지.”
그리고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주안과 아미엘을 보며 당당하게 답했다.
“마를렌은 그것을 원했고, 원했기에 나는 알려주었다. 간단하지 않아?”
표정 변화 없이, 진실로 당당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그 모습에 주안은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알려줄 생각은 애초에 없어 보였기에 주안은 조금 짜증이 났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주안은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아미엘을 품에서 조심스럽게 벗어나게 한 뒤 크세니아의 그림자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자신보다 큰 그를 올려다보며 주안 역시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면 제가 물어봐도 괜찮겠지요? 그 문을 연 것은 저이고, 이곳에 발을 디뎠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제 말을 따를 의무가 있다, 이 말이 아닌가요?”
“어이구, 말이 그렇게 되나.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겠지.”
“…….”
능글맞은 그의 행동과 말에 주안은 애써 그 행동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말씀해 주세요. 정말로 마를렌 님이 이곳에 찾아와서 아미엘 님을 쫓아내는 방법을 당신에게 물어본 건가요?”
“맞아. 너처럼 문을 열고 직접 찾아왔지. 그리고 문을 닫는 방법에 대해서 내게 물었고, 나는 또 다른 나인 크세니아가 남겨놓은 역할에 따라 말해주었지.”
“마를렌 님은 이 장소를 모르세요. 대체 어떻게 찾아왔다는 거죠? 그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잠시 멍하니 주안을 바라보던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이내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질문이네. 그게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이 장소를 아는 것은 아미엘 님뿐이시고 마를렌 님은 그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그래, 아미엘뿐이지. 아미엘뿐이야. 그렇다면 간단하잖아?”
“설마…….”
주안은 그림자의 말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아미엘을 바라보았다.
이런 주안의 눈을 마주한 아미엘은 그저 주안의 눈을 마주 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안은 그런 그녀에게 확인하고자 재차 물었다.
“아미엘 님이 말씀드렸었어요?”
“…….”
아미엘은 침묵을 지켰지만, 그것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침묵이었다.
“어째서…….”
“뭐가 어째서겠어. 아미엘에겐 마를렌은 친동생, 아니, 친딸과도 같은 아이. 만약 이 세상이, 이종족들이 잘못되어도 마를렌 하나만큼은 살리고자 알려준 것이겠지. 안 그래?”
아미엘에게 마를렌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주안은 여전히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만큼은 이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해서, 무언가 일이 잘못된다면 그녀 혼자만이라도 살리고자 이 장소를 알려주었다는 것에 주안은 공감이 갔기에 그녀에게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비슷한 처지였었고, 자신은 이러한 아미엘과 같은 엄마에게 구원을 받고 도망쳤었던…… 살아남게 되었던 그러한 존재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마를렌과 같았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하지만 그런 분이 왜 아미엘 님을 쫓아내는 방법을 크세니아 님에게 물어본 거예요. 아미엘 님은 이렇게 그분을…….”
하지만 주안은 흠칫, 놀라며 말을 멈추어 버렸다.
‘마를렌 님도, 같은 생각이셨을까…….’
순간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사랑을 준다고 해서 상대방 역시 그 사랑을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보다 주안이 가장 잘 안다.
분명 주안은 엄마를 좋아했고, 사랑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러한 엄마를 원망했다.
원망하고 원망하며,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낸 끝에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다시 엄마를 떠올리며 그때의 그 사랑했던 감정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바람 때문에 다시 이곳에, 이 세상에,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미엘이 생각하는 마를렌과 마를렌이 생각하는 아미엘이 같은 생각이었던 것인가에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생각을 마치 읽기라도 한 듯, 크세니아의 그림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짝사랑은 괴롭지. 그것도 벗어날 수 없는, 부모님의 속박은 정말 짜증이 난단 말이야.”
“크세니아 님……!”
“아, 이건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야, 주안 마르티네스.”
“…….”
“나도 뭐, 딱히 그런 건 느껴본 일은 없지만 말이야. 이전의 나는 참 많은 것을 알던 존재였거든. 호기심이 많았다고 할까, 정말 다양한 것을 쓸데없이 많이 공부했었어.”
주안을 다독이며 크세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세상은 말이지, 정말 이상해. 다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나서는 부모님들은 말이야, 정작 그 아이들의 바람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자신들의 생각만을 밀어붙인단 말이지.”
“그건…….”
“아마 이건 너도 잘 알고 있는 일 아니야?”
잘 안다.
너무나도 잘 알아서 문제다.
그렇기에 크세니아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기에, 발끈하면서도 뭐라 말하며 말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마를렌은 아미엘의 품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 아니, 마를렌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종족이 다 그랬겠지.”
그는 주안이 아닌, 아미엘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과보호도 적당해야 하는 거지. 아이들이 다 컸으면 독립시켜 주어야 할 때도 있고, 곁에 서서 그저 바라만 봐줄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안의 어깨를 붙잡아 옆으로 살며시 밀어낸 뒤, 아미엘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주안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가 아미엘의 옆에 섰다.
하지만 이런 주안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미엘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크세니아의 그림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놀랍도록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아미엘의 마음을 찌르는 한마디를 해주었다.
“보호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면, 그것은 강요고, 결국 위선이 될 뿐이거든.”
“…….”
보호가 지나치면 과보호가 되고, 과보호는 상대방을 억압하며 언젠가 상처를 준다.
그것은 자신의 만족일 뿐이며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모두가 그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며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벌이기도 한다.
주안은 그 끝을 경험하였고, 그 처절한 기분을 느꼈으며 절망과 함께 한편으로는 그 품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후회도 하였다.
‘마를렌 님은 그렇게 벗어나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까. 하지만…….’
마를렌 역시 자신처럼 그랬었을까.
멍청하고, 엄마 품에 있는 것을 세상 전부라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
‘아니야. 마를렌 님은 적어도 그러실 분이 아니야.’
단편적으로 마를렌에 대해 알았을 뿐임에도 주안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초대 공작이자 시조인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이 사랑했던 마를렌 마르티네스는 그가 반할 만큼 어진 여성이었고, 남편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으나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세냐에게 들었던 마를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로 다른 이종족들을 이끌 만큼 그녀는 포용력이 있었고, 모든 이종족들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인자했다.
성흔을 가질 만큼 신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신성력을 사용할 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단지 과보호를 한다는, 그런 아미엘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아미엘을 이 세상에서 추방시켰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주안은 아미엘을 보호하듯,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크세니아를 마주한 채 말했다.
“그 말을 지금 저희보고 믿으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응? 어째서?”
“저는 그분을 잘 몰라요. 제 선조라고는 하나, 본 적도 없는 그분에 대해서 알 방법은 그저 곁가지 식으로 듣는 것뿐이었어요.”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시조인 힉스 마르티네스가 마르티네스 공작가문을 세운 일대기를 다룬 내용은 책으로도 만들어져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며 아이들에게 반강제로 주입시킬 정도였지만, 마를렌 마르티네스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내조를 잘하였던 아름다운 여성, 그리고 힉스 마르티네스가 너무나 사랑했던 여성.
딱 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선조, 힉스 마르티네스가 남겨놓았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
아미엘이 그리워하고 소중히 여겼던 여성.
세냐가 좋아하고 자매처럼 지냈던 여성.
많은 이종족의 사랑을 받으며 이끌었던 여성.
“하지만 아미엘 님이나 세냐. 그리고 제 선조께서 남기신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적어도 그런 냉정한 일을, 이유도 없이 벌일 분은 아니라 생각돼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들었는데. 아니야?”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말했다시피, 내가 이 공간에 있다 해도 바깥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찾아올 녀석들에게 무슨 조언을 하고 답을 주겠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동방의 속담을 저렇게 잘 구사하는 것에 주안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당히 미심쩍은 그의 행동으로 인해서 더더욱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