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10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주안은 잠시 심호흡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바로 녹음이었고, 넓게 펼쳐진 초원은 시야를 탁 트이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주안은 소니아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도 아니었고, 세 요정 꼬맹이처럼 날아다니며 부산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함을 유지하고 조용히 아미엘의 곁에 서서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왜 이렇게 침착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그저 아미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곳이네.’
주안은 차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까지 있었던 텅 빈 공간과 비슷하나, 처음 그 공간에 워프했을 때의 차갑던 온도와 축축하고 습함은 전혀 없는 공간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것은 주안도 잘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 설마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바로 자신의 집.
주안이 만들었던 성흔으로, 신성력의 빛으로 가득 채운 성지와도 같은 그러한 느낌이었다.
“이 공간을 만들 때 마를렌이 도움을 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창조해 낸 것은 크세니아이나 신의 힘을 깃들게 한 것은 성흔의 힘이니 말이다.”
“아…….”
아미엘의 말에 주안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마를렌도 자신처럼 그러한 장소를 만들어줄 수 있었다는 것에 신기해하였다.
게다가 이를 인공적으로 만든 드래곤의 힘도 놀라웠다.
그럼에도 주안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주변을 제대로 살피며 눈에 담아 나갔다.
풀이 무성하고, 꽃이 피었으며 멀지 않은 곳에 숲이 어우러져 있었다. 바위나 산, 하늘과 구름, 잔잔한 호수 등등…….
자연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저…….
‘살아 있는 생명체는 전혀 보이지 않아…….’
그제야 주안도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공간 내에 살아서 움직이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곤충, 새와 물고기…….
아니, 바람조차 불지 않았으며 태양 역시 진짜가 아닌 가짜로서, 햇볕의 따스함은 전혀 없었다.
‘이질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모든 것이 다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누군가가 잘 만들어놓은 모형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안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듯했다. 주변을 열심히 살펴보던 소니아나 세 요정 꼬맹이 역시 이러한 이질감을 느낀 듯 주안과 아미엘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주안은 조용히 아미엘에게 말했다.
“그러면 마를렌 님도 이곳에 오셨던 거군요.”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싶구나. 이 장소에 초대한 것은 크세니아였으며, 열쇠를 쥐여준 것도 그였으니…….”
“열쇠라…….”
주안은 그 열쇠라는 것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한때 함께했던 아미엘과 요정들을 그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내며, 이곳과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역할을 하였던 것.
이 장소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는 것.
‘이 장소는, 그래도 이해되지만, 요정들과 통하는 문은 대체 왜…….’
그 부분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미엘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주안보다 먼저 아미엘이 조용히 말했다.
“하나 그렇다 해서 쉽게 올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치는 나에게, 열쇠는 그 아이에게 맡겼으니 말이다.”
이 장소를 알고 찾아올 수 있음에도 열쇠가 없어서 들어올 수 없는 아미엘.
이 장소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그저 열쇠만 가지고 있어 찾아올 수 없는 마를렌.
복잡하고 번거로우나 나름 안전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성흔도 아니고, 제가 가진 이 성흔에…… 마를렌 님에게 그런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맡긴 이유가 있나요?”
분명 이종족에게 내려진 성흔은 세 개다.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오크.
하지만 유독 엘프들의 성흔, 자애의 성흔이 중요한 곳에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의문에 아미엘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명 오크는 강하나, 생각이 깊지 못하고 우직하며 고지식하다. 때문에 그들에게 열쇠를 맡긴다면,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겠지.”
“……좀, 그렇게 보이긴 했죠.”
소니아는 오크, 달란트 부족을 만나본 일이 없었기에 주안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갸웃했지만, 주안은 곁에서 지켜본 오크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참 충성심이 강한 기사들과도 같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답답하고 고지식한 이들은 없을 것이다.
믿음직하다고는 하나, 융통성이 없기에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타입이라는 게 바로 그들을 일컬어 하는 말일 것이었다.
“그리고 드워프는 재주가 남다르나, 고집이 많고 꽤 독선적인 이들이지. 또한 욕심이 있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이 생겼을 때, 어찌 할지 장담할 수 없느니라.”
“헤에, 드워프가요?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르네요.”
이 말에는 소니아가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확실히 주안에게도 드워프가 손재주는 매우 뛰어나다는 인식은 강했지만, 그들이 고집이 많고 독선적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아미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했다.
“장인이란 그러할 수밖에 없지. 고집과 독선이 없다면 타인에 휘둘려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터이니.”
“그렇긴 하죠. 저희 마법사들이랑 성향이 꽤 비슷하네요.”
마법사들 역시 자신들의 연구에서만큼은 고집과 독선이 대단했다.
누군가 조언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남겨놓은 조언의 글귀를 스스로 찾아내어 받아들이는 것에는 매우 개방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열쇠라는 중요한 것을 맡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인으로서의 그들은 대단하나, 중요한 것을 맡길 존재로 보면 믿을 수 만한 이들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씁쓸한 듯, 아미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드래곤보다 드워프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은 없으니, 아마 신의 명이라 하여도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전설, 이라기보단 아미엘에겐 그저 한때의 추억과도 같았기에,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선 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주안이나 소니아처럼 책을 통해 이종족을, 전설과 신화와 소문을 통해 접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여 다른 이를 보살피는 것에 남다르며, 그만한 힘과 지식, 지혜을 갖추고 있고, 배려심이 강한 엘프들에게, 마를렌에게 이 열쇠를 맡긴 것이겠지.”
그리고 아미엘은 주안의 왼손을 조심스레 붙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언젠가 중요한 순간, 이종족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나를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결국 마를렌뿐이라는 것을 크세니아는 알고 있었다.”
아미엘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아마 세상에서 단 하나, 마를렌뿐이라는 것처럼 말하였다.
확실히 그동안 아미엘이 보인 마를렌에 대한 태도는 호의를 조금 넘어선, 친밀하고도 따뜻한 것이었다.
친분이 매우 두텁다는 것을 주안도 지금은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아미엘의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미엘 님, 여기서 그 크세니아 님에게 어떻게 물어보실 생각이세요? 여긴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장소라는 말까진 할 수가 없었다.
황량한 것은 아니나 이질적이고, 푸르러 보이나 인공적인 분위기가 가득하였다.
매우 이상하였고, 주안으로선 조금 꺼림칙하고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신성력이 가득하다 해도, 그 신성력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좋으나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금세 그러한 기분이 가라앉아 버린다.
포근함과 이질감이 동시에 찾아오니, 주안으로선 매우 꺼림칙했다.
그것을 몰랐다면 괜찮았겠지만, 이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걱정 말거라. 크세니아는 멀리 있지 않으니.”
“예? 멀리 있지 않다니요?”
갸웃하는 주안을 보며 아미엘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뿐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런 아미엘의 행동에 주안이 그녀를 황급히 뒤따르자, 소니아 역시 조용히 주안의 곁에 나란히 서서 따라갔다.
“그런데 소니아 누나.”
“네?”
이질적이긴 하나, 소니아는 그래도 주변을 계속해서 둘러보는 그 모습에 주안이 갸웃하며 물었다.
“마법이라는 것으로, 이런 것도 다 만들 수 있어요?”
“무리죠.”
그리고 매우 간단하고도 빠르게 답하는 소니아의 행동에 주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소니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적어도 현세대, 인간의 마법으로는 말이에요.”
“역시, 드래곤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전설이 괜히 전설이 된 것은 아니겠죠. 게다가 마법은 드래곤에게서부터 전해진 것이니까요.”
“하긴…….”
여전히 드래곤이라는 생명체가, 그 힘의 실체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은 분분하나 마법이 드래곤에게서 전해져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법으로 이러한 공간을, 세상을 만든 것에 소니아는 워프와 룬 문자 이후로 더 이상은 놀랄 것도 없다 생각을 했음에도
“하지만 드래곤이 진짜 있다니……. 지금 정말 그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거죠?”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무덤이라고도 하셨으니까요.”
“아……. 그건 아쉽네요. 진짜 드래곤을 만날 수 있었다면 소원이 없었을 텐데.”
마법사로서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는 듯했다.
이미 사라진 마법인 워프와 워프 게이트, 룬 문자와 룬 마법까지 모두 보고 경험했음에도 소니아는 아직도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듯 호기심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로서는 그게 당연하였기에 그 말을 들으며 앞서 나가던 아미엘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주안과 소니아에게 말했다.
“아마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지, 진짜요?!”
주안이 갸웃하자, 소니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을 보지 않은 채 아미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나는 지금 그에게 나의 의문을 풀기 위해 찾아가는 것.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나의 앞에 나타나 나의 의문에 답해줄 것이니라.”
“우와…… 우와, 우와……!”
주안의 손을 잡은 채 방방 뛰며 좋아하는 소니아를 진정시키며 주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무덤…… 아니었어요?”
“무덤이지. 하나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무덤은 아니니라.”
확실히 이곳을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였다.
무언가 불안하였지만, 아미엘은 그저 그 말만 해준 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소니아는 매우 들뜬 걸음으로, 그리고 주안은 의문이 남은 채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아미엘의 뒤를 따라가던 주안은, 어느새 아미엘이 우뚝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미엘 님……?”
“도착하였느니라.”
“도착이요?”
주안은 그렇게 말하며 갸웃하였다.
도착이라고는 하나, 아미엘이 멈추어 선 곳은 허허벌판과도 같았고, 그 근처에는 거대한 바위산 하나만이 달랑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 자체가 이질적이긴 하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은 더욱 이질적이고 이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저게 아미엘 님이 오신…… 이유에요?”
주안의 말에 아미엘이 주안과 소니아를 돌아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하다. 이게 드래곤 크세니아의 유산이다.”
크세니아의 유산.
아미엘의 그 말에 반신반의하며 거대한 바위산을 살펴보던 주안은 이내 경악으로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드래곤……?!”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의 거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