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08화
거대하고 텅 빈 공간이었지만 앞서 나아가는 아미엘을 뒤를 주안과 소니아가 조용히 따라갔다.
“그래도 참 놀랍긴 해요. 그때의 사람들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 정도로 대단했다니…….”
그리고 소니아는 아미엘이 해준 말들을 생각하며, 넌지시 그렇게 말을 건네었다.
“뭐, 그보다 우리 도련님이 엘프와 피가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옅게나마 이어져 있다는 게 가장 신기했지만.”
“왜 ‘아주’라는 말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건데요.”
“그렇잖아요. 전설에 따르면 엘프는 여리고,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고들 하는데……. 도련님은 영…….”
“저, 저도 우리 엄마한테는 충분히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거든요?!”
“……징그러워요.”
“으윽…….”
다 큰 애가, 곧 어른이라는 녀석의 말투와 행동으로는 정말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거의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이해는 하고, 이제는 어른스러운 모습도 자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 이야기나 엄마의 앞에만 서면 아이로 돌아가는 상반된 모습을 자주 보였다.
놀리는 것도 있었지만, 소니아는 진심으로 걱정되기에 주안에게 한 소리 하는 것이었다.
“이제 곧 성인인데, 그런 말투는 좀 고치시는 게 어때요? 가만 보면 어른스럽다가도 안젤라 님 이야기만 나오면 한참 어려지는 것 같잖아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어쩔 수 없는 것을 고치시란 말이에요.”
“……잘 안 되는데.”
주안도 고치지 않으려던 것도 아니었다.
할 만큼은 했고 지금도 노력은 하지만, 번번이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이상한 쪽으로 흘러 들어가서 문제였다.
“그런데 이 일은 공작님이나 안젤라 님, 벡브란 전대 공작님도 모르시는 일이죠?”
“예. 아직 말씀은 못 드렸어요.”
“말씀드린다고 해도 과연 믿으실지…….”
소니아가 걱정하는 그 부분을 주안 역시 똑같이 걱정하고 고민하였기에 괜히 웃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고민에 공감한다는 듯 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드리기는 참 힘들 듯하네요.”
“그렇긴 해요. 토미나 워랜 경은 갑작스럽게 알게 된 것이긴 하고, 사실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하지만……. 부모님이나 할아버지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어요.”
“그 둘한테 관심은 효율적으로 게으름 피우는 것과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아하하…….”
워랜과 알고 지낸 시간이 주안보다도 긴 소니아였기에, 적절한 말이었고 토미의 꽉 막힌 성격과 답답함을 역시 잘 알기에 그 역시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주안 역시 동감하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그만큼 든든하잖아요.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말이에요.”
“그건 보통 부모님의 심정 아니에요?”
“뭐, 워랜 경은 모를까 토미는 제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피터 아저씨가 키운 거겠죠. 도련님은 토미를 놀리고 괴롭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셨으면서.”
“그렇게 따지면 누나도 솔을 괴롭히고 놀리는 것에 최선을 다하셨으면서.”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숙하다고 해야 할지.
토미와 솔은 그 외모는 전혀 달라도 성격은 꽤나 비슷했다.
순둥순둥하면서 놀리면 금세 재미난 반응을 보여서 그런지, 자꾸 괴롭혀 주고 싶은 그런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키득거리며 서로 솔이나 토미를 어디를 자극하고 놀리고 괴롭히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참으로 엄한 대화를 나누는 주안과 소니아의 모습에 아미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친구를 놀리고 괴롭히면 못 쓰느니라.”
“……네.”
“죄송합니다.”
어른으로서, 혹은 엄한 선생님이나 부모님처럼 아이를 달래듯 말하는 아미엘의 그 행동에 소니아와 주안이 움찔 놀라, 몸을 잔뜩 움츠리며 아미엘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두 사람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세냐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언젠가 혼날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게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건데…….”
“……그러는 넌, 간식 몰래 훔쳐 먹는 거, 아미엘 님께서 아셔?”
“누, 누, 누, 누가, 누가 후, 훔쳐 먹, 먹었다고……!”
주안의 작은 중얼거림에 세냐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주안의 시선이나 소니아의 시선을 마주 보며 견디기 힘든 것인지, 세냐가 움찔 놀라며 두 여동생을 앞세워 그 시선을 피하였다.
“세냐, 너도 그러하였느냐?”
“으…… 그, 그치만, 마냐가 자꾸 먹고 싶다고 해서…… 가, 가끔 그런 것뿐이에요.”
“동생 핑계를 대는 것은 나쁜 것이니라.”
“……죄송합니다.”
마냐를 앞세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하였지만, 전혀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런 세냐가 혼나는 모습에 주안과 소니아가 작게 웃어주자, 도끼눈을 뜬 채 두 사람을 노려보는 세냐였다.
주안은 솔직히 무서워서 슬쩍 시선을 피했지만, 소니아는 당당하게 그런 세냐와 눈을 마주한 채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다른 이종족들도 다 이렇게 유쾌했었어요?”
“유쾌하다라…….”
소니아의 말에 아미엘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종족이나 인간이나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란다. 그리고 그때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그 본성 역시 크게 변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아하,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라는 동방의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거네요.”
“동방 대륙이라…….”
그리고 그 말을 작게 중얼거리던 아미엘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참 신기하구나.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땅에, 그 주인이 사라지니, 멀고 먼 대양을 건너 자리를 잡고 발전하다니……. 인간의 잠재력이란 정말 언제나 나를 놀라게 만드는구나.”
“동방 대륙에, 주인이 있었어요? 인간들이 아니라?”
“그래, 그때 그곳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개척하기 힘든 그런 땅이었다.”
“네? 정말요?”
“그러하다. 그곳은 인간이, 그리고 이종족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땅이었지.”
아미엘의 말에 세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잔뜩 찌푸렸고, 이러한 세냐를 조심스레 달래며 아미엘이 말을 이었다.
“그 땅의 주인은 몬스터들이었으며, 다른 이들은 발을 디딜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장소였느니라.”
“동방 대륙이…….”
그러한 사실을 처음 듣는 주안은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동방 대륙은 단순 인구의 숫자로만 보면 서방 대륙보다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땅이었다.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웠고, 그 문명은 현재의 서방 대륙에 견주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군사력이나 문화, 역사 등을 보아도 늘 서방 대륙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앞서나가거나 조금 뒤처지거나 그렇게 반복해 온 이들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금 혼란스럽긴 하더라도 그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동방 대륙에, 한때 인간이 존재하지 않고 몬스터들만이 가득 했다는 것을 주안으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주안보다 많은 지식을 가진 소니아에게도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하였다.
“드래곤들의 대부분은, 동방 대륙에 머무르며 몬스터들이 그 땅을 벗어나 너희가 말하는 이곳, 서방 대륙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했다.”
육지에만 몬스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땅속이나 강, 바다, 그리고 하늘까지.
몬스터는 하나의 대륙을 이미 집어삼키고 있었고, 언제든 인간들과 이종족들이 있는 곳까지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세력이 강성하였다.
그 때문에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드래곤이었으며, 보호를 받는 것이 인간과 이종족들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드래곤들은 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파제의 역할이었지.”
“드래곤이라……. 정말, 그게 존재하고, 그런 역할을 했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전설을 넘은 신화시대의 이야기 같았다.
신이 존재하고, 신의 명을 받은 드래곤들이 몬스터를 몰아내며 대륙을 인간과 이종족의 땅으로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는 말을 아미엘을 통해 들었음에도 소니아는, 아니, 주안마저 여전히 믿기가 힘든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에게 아미엘이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네가 있는 이곳도 드래곤의 유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저 크고 긴 동굴처럼 느껴졌지만, 이곳이 바로 드래곤이 만든 장소이자 그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주안이나 소니아가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그런데 정말 전설이나, 역사 자료들에서 나왔던 드래곤이 있던 장소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네요.”
“음? 그러하느냐? 무언가 많이 다르더냐.”
“엄청나게 달라요. 뭐라고 할까, 전 드래곤이 살던, 아니, 무덤이라고 해서 드워프들이 손수 만든 거대한 장소에 금은보화가 가득하고, 그곳을 지키는 엄청난 괴물들과 함정들…… 그런 게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아무 장식도 없는, 그저 인위적으로 만든 거대한 동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미미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흔적으로 이곳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뿐, 신기하긴 하지만 그리 대단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한 방향으로 소문이 난 듯하구나. 기대한 것을 앞으로도 보여주지 못할 듯하니, 미안하기까지 하구나.”
“왠지 좀 아쉽네요.”
헛된 욕망을 채우기 위한 욕심이 아닌, 드래곤과 관련된 많은 것을 보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 하나라도 배울 기회라 생각하였던 소니아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고, 텅 빈 공간만이 있는 이러한 장소가 바로 드래곤들의 집이자 무덤이라는 것에 조금 실망한 듯하였다.
그리고 이런 소니아의 모습에 아미엘이 살풋 웃어주며 말했다.
“하나 그러한 것으로 너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보다 세냐, 이 아이에게서 듣는 것이 더욱 큰 도움과 너의 호기심을 원 없이 채워줄 것이니라.”
“들었지, 세냐?
“적당한 거래 조건이 있다면 허락은 해드릴게요.”
“공짜가 아니야?!”
“세상에 공짜는 없거든요. 완전 순진하시네.”
“그러는 넌 세상에 너무 찌들었잖아?! 순수하고 귀여운 요정들의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었어?!”
“그딴 요정 없어요.”
“아……!”
세냐의 냉정한 말에 소니아가 당황하였다.
하지만 세냐는 새침하고 도도하게, 절대 공짜로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벌꿀 과자면 다 해결되던데.”
“…….”
주안의 작은 중얼거림에 아미엘의 곁에서 조용히 날아가던 세냐가 움찔 놀라며 당황하였다.
“뭐, 뭐, 왜요? 뭐요. 뭔데요. 왜 그렇게 보는 건데요.”
“아항……. 그러고 보니 세냐 넌 세라타가 만들어 주던 간식을 굉장히 좋아하긴 했었지.”
“나만 좋아하던 거 아니거든요?!”
세냐의 그런 항변에 앞서 걷고 있는 아미엘의 어깨에 앉아 있던 마냐와 아냐가 세냐를 돌아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니, 손까지 들고 좋아한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과자라도 던져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던져주다니?! 던져주다니! 제가 무슨 애완동물이에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주안 도련님~”
“으극!”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과자의 유혹인지라, 뭐라 말을 하고 소리칠 수도 없는 세냐였다.
이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아이들의 모습에 아미엘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앞서 나가며, 한참을 걷던 아미엘이 어느새 우뚝 멈추어 섰다.
“자, 여기다. 도착하였구나.”
거대한 공간은 여전히 펼쳐져 있었지만, 아미엘 그저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몰라 갸웃하던 주안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왼손바닥의 성흔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기 시작하였다.
“……문?”
그리고 성흔의 빛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는 거대한 구조물, 거대한 문의 모습에 주안이 놀란 눈으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안을 보며 아미엘이 조용히 돌아보며 말하였다.
“환영한다, 열쇠의 아이, 주안이여.”
완전히 드러난 거대한 문을 등진 채 아미엘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후의 드래곤, 크세니아의 무덤으로 향하는 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