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95화
“일정을 아직 생각해 봐야겠지만, 일단 저는 가능하면 빠르게 일을 진행하고 싶어요.”
주안은 할아버지와 가론 노밀 자작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한 부분을 세 사람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차피 메데아 대족장님이 오시기로 한 이상, 워랜 경과 토미, 록산느 경을 배웅하면서 모시고 왔으면 해요.”
록산느는 메데아 대족장이 누군지 몰라 갸웃하였지만, 토미는 뭐든 주안이 하는 일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워랜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딱히 나쁘진 않은데, 안젤라 님이 허락하실까?”
“이번에는 정말 금방 갔다가 금방 올 거니까 괜찮아요.”
남부 국경이 황도에서 마를렌 만큼의 거리도 아니고, 더욱이 마를렌에 올 때처럼 빠르게 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더욱이 마를렌에서 머물다 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메데아 대족장을 모시고 사람들에게 보일 때만 품위를 지킬 뿐, 빠르게 달려올 생각이니 말이다.
“그리고 남부 국경에서 직접 만나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제대로 모시고 제국으로 들어온다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 싶어요.”
무엇보다 주안 남부 국경에서 만나는 것보다 조금 더 아래, 아스란 왕국에서 직접 모시고 오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물론 메데아 대족장은 매우 귀찮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우나 공주님에게 부탁해서 아스란 왕국 북부에 있는 슬렌더 백작가까지 메데아 대족장님과 미리 동행시키면 어떨까 싶어요.”
무엇보다 그러면 워랜이나 토미, 록산느는 그대로 유우나와 함께 올 풍신과 아스란 왕궁으로 가면 되니 말이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와 가론 노밀 자작이 주고 싶은 선물을 안겨주어 마르티네스 공작가와의 친밀도를 더욱 높일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워랜은 주안의 말을 들으며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듯했지만 이내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 완전 허례허식인데.”
“그런 것도 중요하죠. 한번 얕보이면 한도 끝도 없이 물어뜯으려고 하는 게 바로 귀족들이니까요.”
“흐음, 그런 거라면 유우나 공주가 직접 메데아 대족장님을 모시고 올 필요가 있을까? 그분이라면 그냥 달려오는 게 훨씬 빠르잖아.”
워랜의 말에 주안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 역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에요. 우리 가문과 연결된 것만이 아니라, 아스란 왕가와도 연결된 존재……. 그리하면 적어도 아스란 왕가에 큰 힘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풍신 경 역시 아스란 왕가를 위해 힘써준 우리 가문, 워랜 경과 토미. 록산느에게도 잘 대해주시겠죠.”
물론 거기에 선물까지 더할 생각이니, 풍신으로서는 유우나 공주를 위해서라도 무언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할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풍신은 자신의 제자에 대해선 늘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주안이 바라는 것은 그런 재능 넘치는 정식 제자, 워랜과 토미만이 아닌, 록산느를 위함도 있었으며 함께 호위로 갈 밀리오 경과 자밀 경 그리고 베일 리 준남작을 위한 것도 있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고 이런 얽히고설킨 내용을 모두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겉만 본 것인지 몰라도 워랜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에게 말했다.
“……잔머리가 엄청 늘었어, 주안 공자.”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요.”
힘도, 뛰어난 지식도, 그렇다고 타고난 마법적 재능도 없다.
주안에게 가문과 갑작스럽게 생긴 신성력을 뺀다면, 정말 그냥 이도 저도 아닌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변 사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는 잔꾀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주안은 이런 잔꾀만 부리는 자신을 너무 낮게 보고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자, 워랜은 이런 주안의 모습에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대단해서 그래. 인맥도 능력이고 그 인맥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인지도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하하……. 그런가요.”
“적어도 주안 공자는 그것을 이상하고 나쁜 곳에 사용하지 않잖아. 가문에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워랜의 말에 토미와 록산느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주안은 큰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
“뭐, 이왕이면 우리 스승님에게 폭력만 좀 줄여달라고 해줘. 그 정도 부탁은 해줄 수 있잖아.”
“……그런 짓 안 당하게 좀 제대로 하세요. 풍신 경이 손을 쓴다는 것은 정말 워랜 경이 잘못하고 있다는 의미잖아요.”
예의를 중시하는 동방 대륙의 사람 중에서도 풍신은 굉장히 고지식하면서도 예의를 차리는 인물로서, 웬만한 귀족보다도 더 귀족다워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 겉모습이 비록 큰 상처들로 인해서 처음 만나는 이들에겐 첫인상이 썩 좋지 않다지만, 그와 몇 시간만 같이 있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가 얼마나 예절에 능통하고 차분한 인물인지 알 수가 있었다.
‘아마 풍신 경도 동방 대륙의 귀족이 아닐까 싶지만…….’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과거의 삶 속에서나 지금의 삶 속에서도 거의 없다시피 하였지만, 그의 행동을 조금만 보더라도 다들 주안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여전히 의문스러운 존재이긴 하나,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법도를 중시하는 제대로 된 무사답게 적어도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은 확실했다.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면서 최대한 시간도 줄일 방법이 있다면 일단 그쪽으로 나아가는 게 맞겠죠. 그래도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도록 할게요.”
주안은 제시할 수 있는 이였지만 결정할 수 있는 이는 아니었다.
아직은 후계자였고 자신의 위로 아버지가 있었으며 할아버지가 있었다.
또한 가론 노밀 자작 역시 주안이 제시한 것을 듣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런 윗사람들에게 먼저 주안이 생각한 것을 알린 후 허락을 받아야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멋대로 일을 진행했다가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주안은, 조금 더 생각해야 했고, 판단을 내릴 때 주변의 도움과 할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다.
‘수정할 것은 수정하겠지만, 이 일은 가능하면 설득해야겠지.’
다만, 허락하지 않는다 해서 실망하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듣는 것이 조언이었고, 그 조언을 참고해서 수정하여 허락을 받아낼 것이니까.
무엇이 되었든 일은 가능한 빠르게 진행해야 하였다.
“그러면 일단 그렇게 아시고 준비해 주세요. 아셨죠?”
주안이 박수를 한 번 치며 주변을 환기하자, 워랜이나 토미, 록산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과는 곧 헤어지겠지만, 그렇다고 아쉽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주안으로선 언제든 만날 수 있었고, 더욱 성장할 기회였기에 그들을 위해서라도 주안이 그런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됐다.
* * *
주안은 록산느와 로마니아 백작가의 일은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된 듯하여 다행스러웠다.
특히 록산느의 호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스타크 로마니아는 여전히 불만스러웠지만, 한 약속이 있어서 그런지 반대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고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로마니아 백작님은 스타크 경까지 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이 연륜이었고, 더욱이 거대 가문의 수장을 오래 맡아온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그 검술 실력만큼이나 생각이 깊은 인물이었다.
밀리오 경과 자밀 경 그리고 노밀 자작 가문의 일등 기사인 베일 리 준남작에 기병 일개 조까지 함께 보낸다는 말을 듣고는 대번에 그 의도를 파악한 로마니아 백작은 가문의 능력 있고 미래가 밝은 인재들을 보내려는 생각까지 햇으니 말이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반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제지할 방법이 없지. ……록산느 경의 가족이니까.’
손녀를, 그리고 딸아이를 곁에서 지키고 수발을 든다는 것에 다른 이들이 반대할 수는 없었다.
단지…….
“선물을 준비하라니…… 할아버지도, 가론 자작님도 정말 대단하셔.”
주안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주안을 뒤따라오던 하인이 그 말의 뜻을 몰라 갸웃하였지만, 물어보지는 않았고 주안 역시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복도를 걸어가며 자신의 방으로 갈 뿐이었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노골적이셨어.’
두 어르신도 가문의 젊은 인재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니, 슬쩍 끼어든 로마니아 백작가에게도 똑같이 준비하라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참 치사한 일이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노밀 자작가에서 준비하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는데 말이다.
‘유우나 공주님이 굉장히 좋아하시겠는데. 아니, 어쩌면 크게 당황하실 수도 있겠어.’
그 강단 있고 이전 삶 속에서는 마녀라고 불리던 여성이 거대한 세 가문에서 준비한 선물을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할 것을 생각하니, 왠지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걸로 일은 잘 해결될 듯하니, 이제 주안은 집으로 돌아갈 것만 생각하면 되었다.
집으로 가서, 아버지와도 이야기를 나눈 후 일정만 잡으면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일정에 가장 큰 힘이 되는 인물이 있는,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한 주안은 하인이 문을 열어주기 전 먼저 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뒤따라오던 하인에게는 자신이 부를 때까진 찾지 말라는 말을 전한 후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작은 요정 꼬맹이를 불렀다.
“세냐, 준비 끝났지?”
주안의 말에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난간에 앉아 밖을 구경하던 세냐가 조심스럽게 주안을 돌아보며 작은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당연히 끝났죠. 바로 갈 거죠?”
“응, 바로 가야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주안은 세냐가 있는 테라스 쪽으로 향하며 테이블 위에 정리해 둔 마를렌에 관한 자료들을 집어 든 후 가방에 조심스레 넣었다.
그러자 세냐가 테라스 난간에서 날아올라 주안에게 다가오더니 머리 위에 조심스레 내려와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주안은 이런 세냐의 행동에도 그저 웃어주며 가지고 온 작은 쿠키를 세냐에게 전해주었다.
그 후 테라스의 양쪽 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진을 보며 우뚝 멈추어 서서 작게 심호흡을 하였다.
“엄마 보고 싶다고 집에 가시면 안 돼요.”
“……내가 그럴 것처럼 보여?”
“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냉정하게 말하는 세냐의 그 행동에 주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주 잠깐 집에 들렀다 엄마만 보고 갈까,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정말 아주 잠깐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갈게.”
그리고 주안은 살짝 투덜거리며 마법진이 설치된 곳에 왼손을 뻗었다.
어느새 성흔에서는 새하얀 빛이, 등 뒤로 후광이 비치면서 마법진의 빛마저도 집어삼킬 듯했다.
하지만 이내 열린 테라스의 문 너머로 새로운 빛이, 문이 생겨나며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계수, 아미엘의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