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94화
주안은 할아버지와 가론 자작과 함께 한 아침 식사와 티타임을 끝내고 곧바로 명상을 빙자한 수면을 취하던 워랜을 깨운 뒤 워랜의 방으로 토미와 록산느를 불렀다.
그리고 풍신에게 검을 배울 세 사람이 모이자, 주안은 그들에게 할아버지와 가론 노밀 자작과 한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가 아스란 왕국으로 가실 때 호위로 자밀 경과 밀리오 경, 그리고 노밀 자작 가문의 베일 리 준남작님이 이끄시는 기병 일개 조가 함께 가도록 힘써주셨어요.”
“밀리오 경이랑 자밀 경을?”
워랜도 조금 의외라는 듯 반응을 보였지만 록산느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토미야 아직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이이다 보니,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랐기에 록산느가 놀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굉장한 사람들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록산느를 그리고 로마니아 백작가를 안심시켜 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한 듯했다.
“그런데 베일 리 준남작님이랑 우리 가문의 기병 일개 조라면…….”
잠시 갸웃하던 워랜이 이내 그 숨은 의도를 알아차린 듯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거 완전 날 감시하겠다는 의미잖아.”
“더해서 사고 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으셨죠. 그러니까 잘하세요, 워랜 경.”
“나보다 우리 아버지를 더 잘 아네, 주안 공자.”
“그야…….”
‘어떻게 보면 워랜 경보다 더 오래 곁에 두고 함께했던 분이셨으니까요.’
그 말까지는 해주지 못한 채 주안은 그저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을 이어받은 주안으로 인해서 워랜은 사실상 마를렌으로 발을 끊었고, 그 때문에 주안의 곁에 남아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을 지키려던 가론 노밀 자작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그 때문에 워랜과 가론 노밀 자작은 거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소원한 관계가 되었지만, 반대로 주안은 자신의 곁에 남아 잔소리를 해대는 가론 노밀 자작으로 인해서 매우 귀찮았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땐 몰랐지만…….’
곁에 훌륭한 조언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든든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도 가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숙한 후계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 곁으로 다가오는 날파리들을 쫓아내 주며 가문을 제대로 이끌어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그 역할은 실로 대단했다.
그 조언을 듣고 참고하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가문을 운영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주안은 가론 노밀 자작을 그저 늙은 잔소리꾼으로 취급하며 그를 멀리했다.
무엇보다 엄마인 안젤라가 곁에 있는 이상,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주안은 멍청했다.
‘그래도 이제는 아니야. 제대로 조언을 듣고, 경청하자. 그리고 많은 공부를 해서 그 조언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닌, 참고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자.’
주안은 작게 다짐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생각에 반응이라도 하듯 성흔에서 하얀빛이 서렸다.
아니, 그 이전에 주안의 이런 모습을 보며 워랜이나 토미, 록산느는 조금 놀란 듯했다.
분명 주안은 검을 배운 이도 아니지만, 묘한 기세를 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도 아니었으며, 무언가 주안에게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이 이야기를 로마니아 백작님과 스타크 경에게 말씀을 드린다면 록산느 경이 아스란 왕국에 동행하는 것에 이의를 가지지 않겠지요?”
“물론입니다. 밀리오 경과 자밀 경만으로도 충분한데, 베일 리 준남작님과 노밀 자작가의 기병까지 따라간다면 아버지께서도 더 이상 반대를 하시지 못하실 겁니다.”
주안이 포함되었던 사절단의 황실근위대만큼의 단단함은 없지만 반대로 유연함은 남달랐다.
오히려 노밀 자작가의 기병으로 인한 만약의 사태에서의 이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속도를 자랑할 것이기에 크게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록산느가 안심하며 기뻐하자 몇 번이나 검을 맞대고 대련을 한 사이라 그런지 토미 역시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소리쳤다.
“정말 다행이에요, 록산느 경!”
“웃?!”
토미가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으며 곁에 앉아 있던 록산느의 손까지 잡고 환영하자, 그 행동에 록산느가 크게 당황하며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토미야 별다른 의미 없이 순수하게 기뻐서 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남자들과는 검과 검으로 마주하던 록산느에게 이런 토미의 행동은 익숙하지 않은 그런 일이었다.
“고, 고맙네……. 토미, 경…….”
“에이, 저 아직 기사가 아니라니까요. 그냥 토미라고 부르세요.”
“그, 그래도…….”
토미의 이런 과감한 행동에 록산느가 당황하며 검을 들었을 때와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워랜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람둥이가 될 소질이 큰데?”
“그러게요.”
워랜의 작은 중얼거림에 주안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쌀쌀맞은 냉혈한이 이렇게 순진한 꼬맹이였을 줄이야. 뭐, 록산느 경도 비슷하지만.’
확실히 과거의 이들과 지금의 이들은 그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주안이 알던 사람들과는 완벽히 다른 인물들이었다.
그저 조금의 변화, 이들에게 희망이라는 작은 씨앗을 주었을 뿐임에도 사람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주안은 크게 놀랄 정도였다.
‘그 절망을 안겨준 것은 결국 나였지만…….’
그렇다면 이전 삶과는 달리 이번 삶에서는 자신의 잘못으로 어그러진 이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줄 때였다.
“자, 그보다 록산느 경이 풍신 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지만 풍신 경이 록산느 경을 만난다고 해서 검을 가르친다는 확신은 없어요.”
주안의 말에 이제야 한 단계 넘어섰다고 좋아하던 토미나 당황하던 록산느가 움찔 놀라며 금세 시무룩해진다.
토미의 다양한 감정에 조금은 영향을 받은 듯 얼마 전까지 보이던 칼날 위에 서 있는 느낌의 록산느도 무언가 작게 변한 듯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워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 더 좋아하게 내버려 둬도 괜찮잖아?”
“나중에 안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미리 알아두는 게 더 낫죠.”
“흠…….”
오히려 이런 일은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 실망을 더 크게 가져올 수가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워랜도 더 이상 주안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대신 토미가 붙잡고 있던 록산느의 손을 조심스레 놓아주며 주안에게 말했다.
“도련님이 부탁하셔도 안 되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해서 검을 배울 수 있게 해주셨잖아요.”
“나는 만능이 아니거든? 그리고 너는 풍신 경이 먼저 탐냈었으니까 이야기가 쉽게 풀어졌던 거야.”
“하지만…….”
애초에 토미는 주안이 먼저 언급하기 전에 풍신이 토미의 재능에 놀라워하며 진지하게 검을 가르치고 싶어 했었다.
다만 토미에게 스승이 있었다는 것에 그 역시 크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안의 설득과 피터의 허락하에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주안이 무언가 할 필요 없이, 풍신에게 토미가 검을 배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해진 수순이었고, 운명이었다.
이전 삶에서도 토미의 스승은 풍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시무룩해진 토미를 보며 주안이 싱긋 웃으며 손을 뻗어 토미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주며 말했다.
“뭐, 만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능에 가깝긴 하니 믿어봐. 록산느 경도 안심하고 계셔도 괜찮아요.”
“완전 잘난 척이네?”
“흐흥~ 잘난 척해도 될 만한 능력…… 을 가진 가문의 후계자거든요.”
뭐, 결국 가문의 힘이긴 하나 그 힘도 주안의 힘이나 마찬가지이니, 이렇게 잘난 척하는 것이야 어찌 보면 작은 애교 정도였다.
가문의 힘을 가지고 좋지 않은 곳에 쓴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콧대가 높아진 주안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워랜이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할아버지나 가론 자작님과는 아직 이야기를 나누고는 있지만, 할아버지께선 풍신 경이 모시고 있는 유우나 공주님에게 식량을 원조하는 조건이나 가론 자작님은 종마를 포함한 백여 마리의 말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싶어 하세요.”
“완전 과하잖아?!”
식량은 언제 어느 때라도 중요하고 무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제국 최대의 곡창 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요 식량 생산지였다.
다양한 작물이 많았지만 역시나 주력은 밀이었고, 그러한 밀은 썩어날 만큼 많았으니…… 그것을 이용한다면 식량난에 허덕이는 아스란 왕국을 휘두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노밀 자작가의 말은 전략 병기나 마찬가지인 명마 중의 명마들이었다.
그런 명마 중에서도 종마까지 포함시킨다는 것은 아스란 왕국에서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일이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검을 가르치는 것을 잘 봐달라는 것으로는 너무 과하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금 과하긴 해도 위험성 없는 투자예요.”
“웬 투자?”
워랜이 갸웃하자 토미나 록산느 역시 의아하다는 듯 주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주안은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밀리오 경과 자밀 경이 괜히 따라가는 게 아니지요. 그리고 베일 리 준남작님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에요.”
“……그러면 그렇지.”
워랜은 그 세 사람이 포함된 이유에 대해서 의문이 풀린 듯 작게 웃었다.
그런 어이없는 투자를 계획하고, 또 실행해서라도 하고자 하는 일들.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런 과한 투자를 해서라도 록산느 경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게 있어요.”
“예? 저를 통해서라니요?”
갸웃하는 록산느를 보며 주안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분명 워랜 경과 토미는 풍신 경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제자이지요. 하지만 록산느 경은 아니에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것은 재능의 문제이고 동방 대륙의 사람에겐 그 재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주안은 주저 없이 그 말을 꺼냈고, 록산느 역시 그것을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 대륙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이곳, 서방 대륙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록산느 역시 알고 있었다.
“배움을 내려준다 하여도 기초적인 것과 알맹이가 없는 것일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공자님.”
“예, 그렇기에 저는, 아니, 할아버지와 가론 자작님은 이것을 통해 가문의 힘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릴 생각이에요.”
“한마디로 록산느 경 같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맞는 검술을 보급할 생각인 것이겠지. 그 선두주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말 그대로 록산느 경이 될 것이고.”
“제가…….”
그제야 록산느도 깨달은 듯 놀란 눈으로 주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안은 이런 록산느를 마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록산느, 그녀는 더 이상 가문과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검을 놓고 불행하고 쓸쓸한 생을 살아가선 안 되었다.
가문을 위해 검을 들고,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검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여성이었다.
주안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