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93화
“흠흠, 그보다 그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에 대해서 좀 말해보겠느냐?”
“아, 네.”
할아버지가 가론 노밀 자작의 눈치를 보기에 주안이 어색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일단 사실만 말씀드린다면, 그분은 확실한 랭크 8의 실력자예요. 워랜 경의 검기가 맺힌 검을 맨손으로 붙잡은 분이셨어요.”
주안은 그 외에도 메데아 대족장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두 어르신에게 말해주었다.
물론 여기에서 왜 그곳을 찾게 된 것인지,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그리고 아미엘에 관한 부분은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의 강함에 대해서 바스티아노 백작에게 말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가론 노밀 자작에게도 똑같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은 주안의 이 이야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무언가를 물어보기보단 오히려 끝까지 들어주었다.
전적으로 주안의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판단한 그 모든 것을 믿는다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주안의 이야기가 끝나자 가론 노밀 자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랭크 8의 존재가 확실한 듯하군요.”
“끄응, 이거 참. 이 대륙에서 처음으로 나온 랭크 8의 존재가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이라니.”
애초에 맨손으로 검기가 실린 검을 막는다는 것은 아무리 이 서방 대륙의 기사들의 육체가 황당할 정도로 단단하다 해도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무식하다는 몸을 가진 바스티아노 백작도 서방 대륙의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검이라면 모를까, 모든 것을 잘라내는 검기를 맨몸으로 막아낼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워랜이 그것을 인정하였고, 그들 역시 잘 알고 있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마저 그것을 인정하였다고 하니,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이 그것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조차 없어졌다.
그리고 오히려 표정이 조금 밝아진 가론 노밀 자작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이가 주안 공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만……. 끄응,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구나. 나름대로 열심히 검을 휘두른다는 녀석들을 다 제치고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이…….”
이 두 어르신에겐 주안이 걱정하던 타 가문의 견제에 대한 부분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아니, 주안 역시 이제는 그러한 것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들이라 더욱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할아버지.”
“음? 어이해서?”
“그들은 저희와 달리 그 삶 자체가 경쟁이고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며 생존을 건 사투이니까요.”
“흐음…….”
대륙의 역사 속에서 뛰어난 실력자들이 가장 많이 나왔던 시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전란의 시대였다.
하루만 지나도 몇 개의 나라가 없어지고 다시 생기기를 반복하던 그땐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라도 검을 들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그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이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한 생존경쟁에 참여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수도 없이 많은 실전 경험을 쌓고, 생명을 건 사투를 벌이고 결국 살아남은 이들은 엄청난 실력과 명성을 얻었다.
약한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평화로운 저희 대륙의 상황 속에선 절대적인 강자가 나오기는 어려워요.”
이전 삶 속의 토미 역시 그랬다.
전란의 시대가 낳은 천재였으며 절대자였다.
수많은 생명의 고비를 넘나들며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토미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실력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안은 그 고독한 천재가 절대자에 오른 후 얼마나 쓸쓸한 생을 살아간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절대자가 나오지 않는 현시대를, 현재의 대륙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그저 서로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 그런 것일 뿐이에요. 오히려 그러한 강자가 나오지 않은 게 현재의 대륙에선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잖아요.”
무언가를 희생하여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주안은 그 절대적인 힘을 포기해서라도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이런 주안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걱정스럽다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주안을 지켜보았다.
물러섬 없는 그 모습이나 거짓 없는 그 눈동자는 매우 훌륭하였지만…….
“힘이 없다면 그러한 평화도 쉽게 깨어질 수 있단다, 주안아.”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 하지만 한 사람의 강한 힘이 아니라 뭉쳐진 다수의 힘이 저희 대륙의 힘이잖아요.”
고독한 절대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인 강함.
주안이 추구하는 힘이란 그런 것이었고 그것을 이해했다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분과 대립하기보단 친분을 다지고 저희 편으로 만드는 것도 평화를 향한 지름길이죠. 꼭 대립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확실히 최선은 힘을 가진 이를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지.”
꼭 시기하고 질투하며 음해하고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이 가까운 사이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이 평화로운 시대를 하찮은 이유로 깨뜨릴 수는 없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이를 슬프게 만드는 것인지는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주안이었으니 말이다.
“그분을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이라 해서 폄하하고 아래로 보시면 안 된다고 봐요. 그분은…….”
“……충분히 대우받을 존재다, 이 말이더냐.”
“예…….”
주안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할아버지를 보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 말거라. 그런 하찮은 감정에 휘둘릴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으니 말이다.”
“……정말입니까?”
“시끄럽다, 이 녀석아.”
가론 노밀 자작의 딴죽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잔뜩 찌푸린 채 한 소리 하였다.
그리고 이런 두 어르신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주안을 보며 미지근해진 차를 한 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은 벡브란 전대 공작이 말했다.
“무엇보다 네 손님이 아니더냐. 그게 누구든 우리 가문의 손님이라는 것이고 손님이라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것이니 말이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이 일은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오히려 가문에도 큰 이득이 되었으며 그러한 존재가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명성은 크게 올라간다.
이러한 결정을 한 주안을 혼내는 것이 아닌 오히려 지지해주고 칭찬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초대한다면 황제 폐하에게 먼저 소개시켜 드릴 것이더냐.”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해요. 황성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바스티아노 백작님도 잔뜩 기대하셔서요.”
주안의 손님이자 가문의 손님이기는 하나 워낙 엄청난 거물인지라 황제에게 먼저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 때문에 황성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려는 논의가 오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른 가문에서도 분명 눈독을 들일 것이다. 가능성이 없다 해도, 괜히 찔러보는 녀석들이 나올 것이야.”
황성에서 이미 파다하게 퍼진 이 소문은 중앙 귀족들을 통해서 이미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 것이다.
분명 남부 대밀림으로 가서 귀찮게 하는 존재들이 나올 것을 벡브란 전대 공작도 예상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괜히 화만 돋을 수 있다는 것이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주안은 이런 할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제가 초대를 드렸어요. 오시는 날짜만 잡으면 되는 일이라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음? 벌써 말이더냐? 대체 언제?”
“그게…….”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직접 가서 초대하였습니다’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주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뭇거리는 모습에,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벡브란 전대 공작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손자가 가끔 보면 이러한 이상한 비밀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었지만, 악의나 음흉한 비밀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면 황도의 저택에서 직접 맞이할 생각이구나.”
“예, 남부 국경까지 가서 직접 만나서 모시고 올 생각이에요.”
“호오. 하긴. 제국에 들어오면 귀찮게 달라붙는 날파리들이 잔뜩 있을 것이니 확실히 그게 낫긴 하겠구나.”
남부 국경까지야 어떻게 눈에 띄지 않게 올 수 있겠지만 제국에 들어서는 것은 비밀스럽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숨기고 들어온다면, 그리고 그것을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돕게 된다면 분명 어떤 이유로든 트집을 잡으려는 이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무척 귀찮은 일이었기에 차라리 대규모로 사람들을 보내 맞이해 주고 당당하게 들어오는 게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그게 보기에도 좋았고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 가문과 그자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이니, 좋은 판단이구나.”
주안은 그 부분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단번에 그 의도를 파악한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다.
아니, 가론 노밀 자작 역시 주안을 대견하게 보는 것을 보니 그 역시 주안의 말을 듣고 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듯했다.
‘정말이지, 못 당해내겠어.’
단지 주안이 환영하기 위해 간다는 것을 듣고 그 의도를 정확히 알아낸 두 어르신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이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거, 로마니아 백작을 데리고 나도 황도로 찾아가고 싶어질 정도야. 조만간 며느리 그 아이도 출산할 터이고 링베르가 녀석 일로 황제 폐하에게도 말씀드려야 하니 말이야.”
“시간을 한번 만들어보는 게 좋겠군요.”
웬만해서는 이곳, 마를렌과 마르티네스 공작령을 떠나지 않는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지만 메데아 대족장의 일이나 안젤라의 출산, 더해서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들이 잔뜩 겹쳐져 있기에 한 번쯤 황성에 찾아가야만 하였다.
무엇보다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로 황제 폐하를 직접 만나 그에 대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입장을 아들이 아닌 벡브란 전대 공작, 자신이 직접 전하는 게 무게가 있고, 담판을 지을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가론 노밀 자작 역시 그 뜻을 이해하였기에 벡브란 전대 공작의 황성으로 가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를 데리고 가고, 인원을 얼마나 해서 언제 가야 할지 서로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두 어르신을 보며 주안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을 하였다.
‘워프 게이트……. 그걸 말씀을 드리는 게 나을까.’
어차피 황도의 저택과 공작성을 이어주는 워프 게이트가 만들어지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두 어르신에게는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일단 완성이 된 후, 아미엘 님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고 말씀을 드리자.’
이전에도 주안은 이 워프 게이트를 조금 더 폭넓게 다루어보자는 생각을 하였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독단적인 생각이었을 뿐, 아미엘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아미엘은 조금 곤란한 눈치를 보였고, 그로 인해서 주안 역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신의 것도 아니고 아미엘의 것이었고, 인간을 신뢰하기 어려운 그녀에게 주안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것에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일 역시 지금 당장 할아버지와 가론 자작에게 말하는 것보다 먼저 아미엘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구한 뒤에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할아버지도 편하게 황도의 저택을 오가실 수 있으시겠지.’
단지,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조금…… 아니, 매우 곤란해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