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92화
밀리오 경과 자밀 경.
이 두 사람은 이미 랭크 6의 끝에 머물고 있는 실력파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랭크 7의 벽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워랜이나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 아닌 이상, 나름대로 재능이 있다는 이들에게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 역시 이 벽을 끝내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수련만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실전 없이는 그 벽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한 걸음 내디딜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동방의 무사라는 존재에게서 미지의 검을 직접 보고, 겪고, 판단하게 하여 그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벡브란 전대 공작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금세 알아차린 주안에 대해서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이 크게 흡족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안이 검을 전혀 모르는 이였기 때문이다.
검을 모름에도 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것에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위에서 이끌어가는 자는 한 분야에서 재능이 뛰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많은 것을 배우고 다양함을 알고 편견 없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베일 리 준남작님을 보내시는 것은 순전히 워랜 경의 감시만은 아니죠?”
“그 또한 정답입니다, 공자님.”
“하아…….”
사실 베일 리 준남작의 호위는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그는 노밀 자작가의 일등 기사이며 노밀 자작가의 검이다.
아스란 왕국으로 가는 사절단에 포함된 이유는, 순수하게 주안의 호위 총 책임자라는 직책을 맡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며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가 보내어진 것일 뿐, 사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그다지 없었다.
아니, 있다면 역시나 워랜에 대한 감시도 있겠지만…….
“결국 밀리오 경과 자밀 경처럼 베일 리 준남작님도 비슷한 이유겠네요.”
“그 또한 맞습니다, 공자님.”
아무래도 노밀 자작가 역시 워랜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였다고는 하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인물이었기에 가문의 결속력을 제대로 잡아줄 베일 리 준남작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벡브란 전대 공작도 그렇지만 가론 노밀 자작 역시 베일 리 준남작을 호위로 보내는 한편, 그곳에서 함께 동방의 검을 견식하고 겪으며 성장하길 바라는 듯했다.
아무리 워랜이 있다지만, 워랜은 아직도 성장하는 단계이니, 그런 그를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풍신 경이 그것을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는데…….”
“허락을 못 한다면 허락할 수 있는 선물을 안겨줘야지.”
“예? 선물이요?”
뜬금없는 그 말에 주안이 갸웃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과 가론 노밀 자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자가 아스란 왕국의 공주를 지키는 호위라고 하였지?”
“예.”
“그리고 그 공주는 주안이 네게 가문의 인장을 받은 이였고.”
“그렇긴 하죠.”
할아버지의 말뜻을 이번에는 조금 이해를 못한 듯 주안이 갸웃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뭣하면 너와의 결혼을 전제로 거래하여도 되지 않겠느냐. 아니, 이건 거래가 아니라 말 그대로 큰 선물이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그 말에 주안이 흠칫 놀랐지만, 주안은 곰곰이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유우나 공주와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풍신을 가문의 사람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니, 큰 손해는 분명 아니라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그렇게 된다면 그는 주안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워랜이나 토미, 록산느 같은 서방의 검을 배우기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검을 가르치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니 가문에도 큰 이득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용을 종합한 주안은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것이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말에 따를게요, 할아버지.”
“……농담이다, 농담이야. 왜 그렇게 진지해지는 것이냐.”
담담하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겠다는 주안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벡브란 전대 공작인 듯했다.
이전부터 진지한 마음이 있어서 선뜻 허락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안의 표정에는 싫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작게나마 기대하는 모습에 벡브란 전대 공작은 순간 주안이 정말 유우나 공주에게 마음이 있나, 하는 오해마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주안이 할아버지의 그 말에 오히려 아쉽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워하자 두 어르신에게 더 큰 오해를 주고 있었다.
벡브란 전대 공작과 가론 노밀 자작이 서로 눈빛을 교환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르자, 이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가론 노밀 자작이 말을 꺼냈다.
“그보다 저희 가문이야 워랜 녀석을 랭크 7로 이끌어준 답례라고 말들을 좀 보내주면 어떨까 합니다. 한 백여 마리면 적당한 선물이지 않겠습니까.”
“적당함을 넘어선 듯한데요, 가론 자작님.”
백여 마리면 아스란 왕국의 일 년 세수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기에 주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귀족파와의 대립과 아스란 왕국 동부는 반란군이 점령하고 있다 보니, 현재의 아스란 왕국의 재정 상태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세금으로 올라오는 돈도 많지는 않겠지만 노밀 자작가의 말 백여 필이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었다.
“흠……. 그러면 우린 식량이라도 지원해 주도록 하지. 안 그래도 링베르가 녀석들에게 들어갈 식량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잘되었구나. 그것을 아스란 왕국으로 돌리면 되니 말이다.”
“……너무 과하세요.”
링베르가 공작가에 흘러 들어가는 군량미 대부분은 이곳 동부,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나오는 식량이었다.
그것을 아스란 왕국으로 돌린다면 쪼개진 아스란 왕국의 왕가의 편에 선 귀족들과 그 영지의 이들이 배가 터져라 먹어도 남아돌 것이 분명했다.
지나치게 스케일이 큰 두 어르신의 모습에 주안은 황당했지만, 별것 아니라는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의 모습을 보니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주안이 느껴 버렸다.
“그리고 그건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부담이라……. 왕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려는 그 공주가, 과연 이것을 부담으로 받아들이겠느냐.”
“그건…….”
싱긋 웃으며 주안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벡브란 전대 공자.
그리고 이런 할아버지의 말에 주안이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유우나 공주라면 부담을 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팔아서라도 가문과 왕국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던 여장부였다.
그런 여성이 가문과 왕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부담스러워 마다할 것이라고 주안 역시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리고 주안은 이런 유우나 공주의 성격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주안은 유우나 공주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자세히 말해준 일은 없었다.
이런 주안의 의문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힐긋, 가론 노밀 자작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주안은 위체니아 소벡이 해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정보력의 핵심.
가론 노밀 자작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 두 어르신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주안을 바라보자, 그 눈빛에 주안은 순간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이전 삶까지 합하면 주안, 자신은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아무 의미 없이 살아가만 가던 삶과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과의 삶의 무게 그 자체가 달랐다.
겪어온 것도, 보고 배워온 것도, 느껴온 것도 모든 것이 달랐다.
그리고 이런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두 어르신의 모습에 주안은 두려움과 함께 부러움도 같이 느꼈다.
자신의 어깨에는 아직 너무나 가벼운 짐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자신도 누군가를 지켜주고,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을 끝없이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두 어르신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인지, 주안은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
‘이분이 나의 할아버지이시고, 이 분이 나의 조력자이시니까.’
이 두 사람은 주안에게 누구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 * *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하루 일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벡브란 전대 공작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주안에게 말했다.
“그보다 주안아. 그 의문의 랭크 8이라는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줄 수 있겠느냐?”
“아, 메데아 대족장님 말씀이세요?”
이미 황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전해 들은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지만, 링베르가 공작가와 워랜에 대한 이야기와는 달리 남부 대밀림에서 나타난 의문의 랭크 8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주안이 그와 잘 아는 사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이전에 알려고 해도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에 대해서 가론 노밀 자작 역시 궁금하였던 것인지 주안에게 말했다.
“그 부분은 저 역시 좀 궁금하긴 하군요. 아무리 저라도 남부 대밀림의 사정까지 다 알 수는 없어서 말이지요.”
“그건 네 녀석이 허술해서 그런 것이겠지.”
“하하, 그렇군요. 제가 허술하였군요. 허술한 저는 이제 그만 은퇴하는 게 낫겠습니다.”
“……내가 미안하구나.”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지만, 잽싸게 사과의 말을 꺼내는 벡브란 전대 공작의 모습에 주안은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가론 노밀 자작이 일을 그만두겠다는 것은 굉장한 협박이 되는 듯했다.
그만큼 그가 하는 일은 많았고 그가 없다면 마를렌 뿐만이 아니라 공작령 전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예, 그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농담으로 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지 않으냐. 일을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말란 말이다.”
“제 후임이나 빨리 좀 구해주십시오. 이제 흰머리도 나기 시작했는데, 언제까지 제가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똘똘한 녀석이 없단 말이다. 똘똘한 녀석이.”
“이러다 정말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해도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 같습니다.”
투덜거리는 가론 노밀 자작의 그 말에 주안은 흠칫 놀라 버렸다.
‘……진짜 그러셨는데.’
정말 자랑하는 콧수염마저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가론 노밀 자작은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부단히 일을 봐왔다.
그렇기에 은퇴를 바라는 그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기에 주안은 안타까워하며 나중에 건강해질 수 있도록 신성력을 잔뜩 불어넣어 주기로 다짐할 정도였다.
……주안 역시 그가 없으면 안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