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91화
토미나 록산느만큼은 아니지만, 주안 역시 조금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굳이 마를렌의 공작성에서 지내는 이때,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일찍 일어나는 건 아니다.
이전부터 조금씩 변하려고 노력하던 게 익숙함으로 변했고,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그 시간에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세안을 끝낸 주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식당이었다.
황도의 저택에서 주안을 따라다니던 세라타를 대신해 주안의 곁을 지키던 하인은 주안이 온 것을 식당 안에 알렸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주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모습으로 가장 상석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주안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오냐, 오늘도 늦지 않게 일어났구나.”
“그럼요, 이제 늦잠 안 자거든요.”
할아버지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농담도 건넬 정도로 넉살이 좋아진 주안의 모습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안은 할아버지 바로 근처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기다 할아버지 외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가론 자작님도 함께이시네요.”
“예, 공자님. 웬일로 오늘은 저를 끌고 오시더군요.”
“하하…….”
언제나 한 세트처럼 붙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본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과 가론 노밀 자작이었기에, 오히려 따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더 어색할 정도였다.
사실 주안이 공작성에 오기 전에는 식사 시간까지 늘 함께하던 두 사람이었기에,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저 주안이 오고 난 후 할아버지와 손자를 배려해서 자리를 비켜주었던 것이니 말이다.
가론 노밀 자작, 그가 아니라면 사실 벡브란 전대 공작과 같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할 사람도 없었다.
이런 할아버지의 곁에서 외롭지 않게 자리를 지켜주는 게 주안으로선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을 보며 벡브란 전대 공작이 넌지시 주안에게 말했다.
“뭐, 네게 할 말도 있어서 가론도 부르긴 하였다만. 불편하면 이 자리에서 쫓아내도 상관이 없구나.”
“오랄 땐 언제고, 이젠 또 쫓아내시겠다는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요.”
물론 그것이 친해서 건네는 농담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가론 노밀 자작도 은근슬쩍 웃으며 자신의 멋들어진 콧수염을 매만졌다.
그리고 이런 두 어르신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주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요. 황도로 가기 전까진 이제 다 같이 아침을 먹어도 좋다고 보는데요. 워랜 경도 부를 걸 그랬네요.”
“아직도 잠이나 자고 있을 그딴 녀석은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가론 노밀 자작의 불만 어린 그 말에 주안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워랜의 생활 패턴은 확실히 종잡을 수가 없었기에 어떤 때는 일찍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늦게 일어나기도 한다.
전날에 무엇을 한 것인지에 따라 아침이 달라진다고 봐야 하였다.
그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비율이 확실히 높아졌고, 그럴 때면 늘 명상을 통해 수련에 힘썼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났을 줄 알았는데…….”
어제는 별다른 일도 없었기에 꽤 이른 시간에 잠이 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난다는 새 나라의 새 어린이처럼 행동하던 워랜이었지만, 아무래도 주안이 모르는 사이 또 뭔가를 하느라 늦게 잠든 듯했다.
밤에 몰래 외출했거나 혹은 솔을 괴롭히느라 늦게 잠을 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가론 노밀 자작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어나긴 했습니다. 명상인지 뭔지를 하면서 자고 있을 뿐이지요.”
“그거, 진짜 명상을 하실 수도 있는데…….”
“제가 동방 대륙의 수련에 대해선 그다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앉아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하는 명상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공자님. 게다가 코까지 골면서 하는 명상이 있었습니까?”
“……그러게요.”
확실히 자고 있나 보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잠을 자지, 명상을 하는 척 자는 것은 대체 뭘까.
그러한 모습은 풍신의 곁에서 명상할 때 종종 보이던 모습인데, 그 버릇이 아무래도 풍신이 곁에 없어도 나타나고 있는 듯했다.
그 생각을 하니, 주안은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전에 가론 노밀 자작이 발로 걷어차서 깨우지나 않았을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아마 풍신이 곁에 있었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명상 중에 졸고 있었을 워랜을 과격하게 깨우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가 곁에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전의 워랜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그래도 조금 쉬시는 것이겠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실력을 쌓을 수 있었겠어요.”
“제 자식 놈이지만, 그딴 정신머리로 어떻게 그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인지 정말 의문입니다.”
“그, 으음…….”
순간 가론 자작의 한탄 섞인 한숨에 동의하여 주안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의 말대로, 참 게으른 예전의 워랜도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천재성으로 10대의 시절에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그런데 조금 정신을 차렸다고 순식간에 랭크 7에 오른 뒤 다시 게을러져 가니,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재능이었다.
“어서 빨리 그 녀석의 스승이라는 사람에게 데려다줘야 할 듯합니다.”
“……그 점은 동의합니다.”
주안도 워랜이 더 이상 게을러지지 않길 바라기에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서라도 워랜을 아스란 왕국으로 데려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토미나 록산느 역시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고 말이다.
“뭐, 그 부분에 대해선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아, 예. 할아버지.”
가론 노밀 자작의 불평은 이해하지만, 마치 주안을 빼앗아간 듯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조금 불만스러웠던지 벡브란 전대 공작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말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가론 노밀 자작도 더 이상 워랜에 대한 말을 꺼내기 부끄럽고 싫었던지, 그저 한숨을 내쉬며 별다른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내 아침 식사가 내어져 왔다.\
큰 식탁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풍성한, 아니, 조금 과할 정도로 많은 종류의 요리에 주안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말 많구나…….’
과소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벡브란 전대 공작이지만, 동부에서 나고 자란 탓에 전통적인 식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요리의 종류가 많다고 해서 요리 하나하나의 양까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기사들은 음식을 많이 먹기도 하고, 그런 생활 패턴에 익숙한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자작이니 그다지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주안만이 아직 이 식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수많은 요리를 보고는 조금 질린 듯했다.
“자, 먹자꾸나.”
“잘 먹겠습니다.”
벡브란 전대 공작이 먼저 식사를 시작하자 뒤이어 가론 노밀 자작과 주안 역시 식사를 시작하였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코스 형식으로 요리가 나오지 않고 한 번에 내온 음식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요리들을 먹기 위해선 곁에서 하인들이 도움을 주어야 하는 형태였다.
그래도 다행히 그것은 주안도 익숙하였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보다 주안아.”
“예?”
꽤 마음에 드는 문어 요리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주안은 할아버지의 부름에 재빨리 입속의 요리를 삼켰다.
“네 부탁대로 스타크 녀석을 만족시켜 줄 만한 녀석들을 뽑아놓았단다.”
“벌써요?!”
“그 성격 급한 녀석을 상대로 시간을 끌 수는 없지 않으냐. 그리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고 말이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어제 점심이 지나고 부탁드렸던 일이다.
벌써 결정을 끝내고, 호위 문제를 해결한 후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바로 말해줄 것이라고는 솔직히 주안도 예상하지 못했다.
주안은 크게 놀란 눈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벡브란 전대 공작은 이런 주안의 시선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때 가론 노밀 자작이 자신의 멋진 콧수염을 매만지며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제가 한 손 거들어서 생각보다 빨리 결정된 것 아니겠습니까.”
“거들면 얼마나 거들었다고…….”
“호오, 그렇습니까? 그러면 저는 이만 빠져도 되겠군요.”
“…….”
능글맞은 그 미소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들고 있던 포크를 가론 노밀 자작의 이마에 정확히 던져 버릴 뻔했다.
뭐, 던진다고 해도 가론 노밀 자작이 순수하게 맞아줄 인물도 아니지만 말이다.
이런 두 어르신의 모습에 주안이 당황하며 잽싸게 끼어들어 말했다.
“그, 어, 어떤 분이 호위로 결정된 거예요?”
잠시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가론 노밀 자작을 노려보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 ‘쳇’ 하고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며 주안에게 말했다.
“밀리오와 자밀을 보내기로 하였다.”
“예?! 밀리오 경이랑 자밀 경을요?!”
“그리고 저희 가문에서 베일 리 준남작과 기병 일개 조를 보내드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베일 리 준남작님까지…….”
베일 리 준남작이야 이전에도 보았고, 그의 실력이나 호위에 관한 능력은 의심할 것이 전혀 없었다.
거기다 노밀 자작가의 기병 일개 조라면 호위만이 아니라 기동력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니,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도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 언급한 밀리오와 자밀.
이 두 사람 때문이었다.
“하지만 밀리오 경이랑 자밀 경은 할아버지의 근거리 호위 기사분들이잖아요. 그분들이 빠진다면…….”
“그 정도 하지 않으면 스타크 녀석이 쉽게 허락해 주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이 동부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고 하면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은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을 언급할 것이고, 젊은 세대라면 아직까진 에밀리 펜버를 언급할 것이다.
물론 그다음 세대……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워랜이 첫 손에 꼽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워랜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이들이 바로 벡브란 전대 공작의 근거리 호위 기사 중 1, 2위위를 다투는 밀리오 경과 자밀 경이었다.
이들은 이제 막 30대에 오른 젊은 인재들이었고, 워랜에 가려져 있다지만 그의 뒤를 잇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차세대 실력자였다.
“조금 허전하긴 하겠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겠느냐. 무엇보다 그 녀석들을 보내야 하는 이유도 있어서 말이다.”
“꼭 보내야 하는 이유……?”
싱긋 웃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 말에 주안이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그 말에 숨은 뜻을 찾은 주안이 놀란 눈으로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설마, 그 두 분에게 동방의 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꾸준하게 견식 시켜주기 위해서 보내시는 거예요?”
“호오…….”
주안이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은 크게 놀랐고, 이내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그 두 분의 실력을 보면 몸을 혹사시키는 수련보다는 다양한 경험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새로운 검, 동방의 검을 직접 그 곁에서 지켜보고 견식 하는 것만이 아니라 검을 나눌 기회도 생길 수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수련은 없을 거잖아요.”
“그래, 정확하다. 정확해.”
벡브란 전대 공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