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89화
주안은 할아버지가 정리해준 마를렌 마르티네스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를렌 님의 출생지나 과거의 이야기 같은 것은 전혀 없구나…….”
“대체 그 대암흑기라는 게 뭐기에 자료가 이렇게 없는 거예요?”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인간들 역사의 한 부분이 뚝 떼어져 사라져 있다는 것이 세냐로서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 나도 잘 모르지. 그냥 뭐, 전쟁이 엄청 잦았고, 자연재해에 전염병에 아주 세상이 끝장나기 직전까지 갔다는 것 정도밖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시조인 힉스 마르티네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암흑기가 한참 지난 뒤였다.
하지만 세냐는 마를렌의 활동 시기를 그 이전부터 보고 오래된 자료들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주안으로서도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마르티네스 공작가 역시 자리를 잡은 이전의 역사에 관한 부분을 모으고 남겨둘 이유는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오래된 고서들이 몇 권 있었지만,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역사 자료가 이렇게 없다는 건 좀…….”
“어쩔 수 있나. 대암흑기도 대암흑기지만, 사이캄 대제가 대륙을 통일하기 전까진 또 전란의 시대였고 사이캄 대제의 캄파니아 제국이 무너진 후, 마찬가지로 다시 전란이 찾아왔으니까.”
역사를 복원할 틈도 없이 다시 역사가 어그러지고 망가지던 시기였으니, 그때의 역사 자료가 남아 있는 게 오히려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인간들은 정말 싸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네요.”
“하하……. 그렇긴 하지.”
인간으로서 부끄럽지만, 주안 역시 인간들이 정말 사소한 것으로 참 잘 다툰다고 생각했다.
애써 웃어주는 주안의 모습을 보며 세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 마를렌이 저희가 아는 마를렌이랑 동일인물 같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그래?”
그래도 수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듯, 세냐는 작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마를렌의 글씨가 확실해요.”
“설마 연애편지가 아직 남아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가주가 특별히 마법적 처리까지 하여 소중하게 보관한 그것은 가문의 가보처럼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가주만이 출입 가능한 특별한 장소의 비밀 서재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벡브란 전대 공작이 직접 찾아준 것이니 말이다.
“그보다 글씨만 보고도 알 수가 있어?”
“당연하죠. 글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요.”
싱긋 웃으며 세냐가 자신의 몸보다 큰 편지에 정성스럽게 적혀 있는 글을 조심스레 만지며 말했다.
“글에는 감정이라는 마력이 있다고도 하니까요. 여긴 마를렌의 감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어요.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어요.”
“흐응, 근데 그분이 연애편지도 보내고 그러시는 분이셨어?”
“그럴 리가요. 좀 활발하긴 했지만, 이렇게 달달한 내용을 적어 보낼 애는 아닌데…….”
“달달함을 넘어 완전 닭살이던데.”
주안 역시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다, 그녀가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가주를 얼마나 사랑한 것인지, 보는 이가 다 부끄러울 사랑스러운 문장이 가득했다.
왜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가주고 그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보관한 것인지 이해는 하지만 참 팔불출 같았다.
“오빠네 어르신에게 정말 불경한 말이네요.”
“그렇지만 좀 그런 걸…….”
“뭐, 그렇긴 하지만, 어쩜 인간 따위에게 이런 추파를 다 던진 거람. 그것도 다 늙어서 말이에요.”
“늙다니…….”
“늙었죠. 인간들의 나이랑 비교하면 완전 할머니 이상인걸요.”
“그, 으음……. 그런가…….”
확실히 전설에 따르면 엘프들은 매우 오래 산다고들 하니, 그때 그 시절 마를렌의 나이를 대충 짐작한다면 세냐의 말대로 할머니 그 이상을 자랑할 듯했다.
“모든 걸 다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미엘 님의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겠지?”
주안은 이 편지 외에도 몇 가지 남은 마를렌에 대한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가주가 남긴 것들을 따로 분류해 놓았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자료들이었기에 아미엘에게 보여주고, 그녀의 판단에 맡길 생각이었다.
그녀가 원하던 마를렌이 왜 떠난 이유까지 찾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주안의 선조가 마를렌임이 거의 확실하였고, 그녀의 단편적인 삶은 엿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아, 맞다. 이런 연애편지가 남아 있다면 초상화도 남아 있지 않으려나.”
“네? 진짜요?”
“응, 대부분 역대 가주 어르신들의 초상화만 남아 있긴 한데, 선대 공작 부인분들의 초상화도 간간이 남아 있었거든.”
단적인 예로 주안의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도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계속해서 기억하기 위하여 유명한 화가까지 초대해 함께 있는 그림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팔불출 가득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가주들은 이런 식으로 아내의 모습을 남겨두었다.
“아무래도 초상화나 그림은 여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에게 물어봐서 보러 가도 되겠지.”
“굿잡. 좋은 생각이에요.”
“……세냐 네가 그림을 잘 그렸다면 이런 수고는 별 필요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
“뭐예요?”
크악~ 하고 입에서 불을 뿜을 것만 같은 세냐의 모습에 주안이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웃어주며 그런 세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초상화 같은 게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던가, 아니면 어떻게 똑같이 만들어서 아미엘 님에게도 보여드리자. 좋아하실 거야.”
“우음…….”
주안의 말대로 이런 마를렌의 자필 흔적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생전 모습을 담은 초상화 같은 게 남아 있다면 아미엘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을 세냐 역시 알기에 주안에게 발차기나 깨물기 같은 것을 하지 못하였다.
그 배려를 알기에,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워프 게이트는 거의 다 만들었지?”
“네, 이미 한 번 만든 것이라, 연결하는 것만 해놓으면 되니까요.”
“헤에, 그건 다행이네.”
“다행이요? ……오빠, 혹시…….”
“응? 왜?”
주안의 말에 세냐의 표정이 요상해지더니 매우 안쓰러운 눈으로 주안을 바라본다.
그 행동이 조금 언짢았기에 주안이 세냐의 통통한 볼을 콕콕 찔러주었다.
“……엄마 보고 싶어서 빨리 만들어지길 기다렸던 거예요?”
“…….”
잠시 세냐를 빤히 바라보는 주안.
그리고 이런 주안을 매우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세냐.
“……아냐.”
“생각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고 생각되진 않으세요.”
“그, 그냥 걱정되어서 그렇지. 혹시 나 없는 사이에 엄마가 아프거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휴, 정말. 매일 통신도 하시잖아요. 게다가 우리 마냐랑 아냐도 있어서 전혀 걱정 안 해도 된다고요. 무슨 일이 있으면 아미엘 님을 부르라고도 했으니까요.”
“으응, 그건 정말 고맙긴 한데…….”
이런 부분은 매우 믿음직스럽긴 하였지만, 주안은 여전히 엄마가 걱정스러웠다.
요 1년, 자주 집을 비운 탓도 있었지만, 엄마의 임신이 주안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고 자꾸 그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황도의 저택을 지키는 믿음직스러운 기사들과 병사들이나, 엄마인 안젤라를 잘 보살피는 하인들과 하녀들, 거기다 바로 곁에서는 조금 수다스럽지만 친구 같은 소니아도 있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피터도 있었다.
세냐의 말대로 마냐와 아냐도 있었기에, 사실 황성만큼이나 안전하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무엇보다 오빠 때문에 거기 있는 사람들은 아플 일도 없을 건데요.”
“그런가…….”
그 말대로 저택은 대신전보다 더욱 성스러운 장소가 되어버린 탓에 병든 이가 찾아와도 깨끗하게 나아서 돌아갈 만큼 신성력이 충만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도 신성력을 잔뜩 불어넣는 만행을 저지른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좀 과한 일이긴 했지만, 주안은 그렇게 해야 정말 안심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내일 저녁이나 늦어도 모레면 완성이 되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정말? 그건 좋은 소식인데.”
“……엄마 볼 수 있어서요?”
“엄마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데 말이다.
“이 워프 게이트가 만들어진다면, 어쨌든 집과 이곳 공작성, 그리고 아미엘 님이 계시는 세계수까지 모두 한 번에 갈 수 있잖아.”
“뭐, 그렇긴 하죠.”
“그러면 그만큼 활동 폭도 매우 넓어진다는 의미니까. 이곳에서 할아버지에게 후계자 수업을 꾸준히 받을 수도 있고, 또 그냥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도 함께할 수도 있지. 아미엘 님을 보러 언제든 갈 수 있고 말이야.”
“흐응, 그냥 한 곳에서 같이 살면 훨씬 편하지 않았어요?”
세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주안이 서류들을 정리하며 싱긋 웃어 주었다.
“사람들에겐 다 복잡한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도 언젠가 다 같이 살날이 오겠지.”
“참 복잡한 사정이네요. 가족들이랑 같이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인간들은 정말 이상해요.”
“하하, 좀 그렇지.”
요정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었고, 함께 사는 것이 익숙한 이들이었지만 인간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이면서 독립된 존재들이니까. 성장하면서 부모님 품을 벗어나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살아가거든.”
“우음……. 무지 어려운 말이네요.”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
주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냐를 손바닥 위에 올라오게 만든 뒤 걸음을 옮겨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주안은 자신의 침대 위에 올라가 자신의 베개 옆에 놓인 세냐 전용 침대 바구니 위에 세냐를 올려준 뒤 그대로 푹신한 베개를 베고 누웠다.
“함께 살아가기에는 제각각 사정이라는 게 있지. 간단히 말해서, 일의 문제도 있고 결혼의 문제도 있고…… 의견 충돌도 있고 말이야.”
“그러면 오빠도 언젠가 독립할 거예요?”
“글세, 그건 잘 모르겠네. 나는 독립이 아니라 아마 여기서 살지 않을까 싶은데. 가문을 이어야 하니까.”
“가문을 잇는다, 라……. 인간들은 왜 그렇게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아미엘 님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서, 자신의 삶과 자유를 거기에 바쳐야 하는 거니까.”
“아미엘 님이랑…….”
주안의 말에 세냐도 곰곰이 생각에 빠졌지만, 이내 조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빤 누구를 보호할 만큼 전혀 미덥지 않은데…….”
“흥, 아직 배우는 중이니까, 몇 년 만 지나면 나도 멋진 남자가 될지, 누가 알아.”
“꿈 깨는 게 좋겠는데요.”
“쳇…….”
꿈 정도는 꾸게 해주면 어디 덧나나.
주안은 작게 투덜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불 꺼드릴까요?”
“응? 세냐 너도 자려고?”
“오늘은 조금 일찍 자죠, 뭐. 슬슬 밤낮을 바꿀 때도 되었고요.”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거였구나.”
“흐흥~ 당연하죠.”
대단하긴 한데 정말 부럽지 않은 능력이라 주안은 조금 떨떠름했다.
저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세냐의 모습도 조금 그랬지만 말이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네에~”
세냐가 조용히 마법 등을 응시하다 자신의 날개를 환히 밝혔다.
그러자 손도 대지 않은 마법 등의 불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진짜 신기한 능력이란 말이야.”
“마법은 모두 다 신기한 거랍니다~”
세냐의 날개는 여전히 반짝이며 빛을 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세냐도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으니, 그 빛도 이내 잠잠해졌다.
그런 세냐를 보던 주안은 이내 작은 숨소리를 내며 금방 잠에 빠진 세냐의 모습에 작게 웃어주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세냐. 잘 자.”
손을 뻗어 세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준 뒤, 주안 역시 조용히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