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88화
다예프의 대신전은 언제나 그렇지만 매우 조용하다.
무라디안 왕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라와도 같은 성도인지라 거주하고 있는 신관들이나 순례길에 올라 방문하는 허락된 이들이 아닌 이상 방문객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같은 경우는 그 어떤 방문자도 받지 않은 날이었다.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화려함은 전혀 없는 수수함 가득한 장소이지만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과 마주한 대신관, 케들락은 큰 잔을 들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올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말이야, 신전에서 술을 마셔도 되나 모르겠군.”
잔을 다 비워 버린 뒤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는 케들락 대신관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케들락 신관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답했다.
“이제 와서 신벌이라도 받으실 것 같아 두려우신 것입니까.”
“여기서 더 받을 신벌이라는 게 있던가?”
수염이 덥수룩하고 체격이 다부진 노인의 말에 케들락 대신관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과일이 거의 나지 않는 북부인지라, 남부에서 수입한 과일을 이용해 만든 차였으며,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인간의 것이기도 하였다.
“한잔 더 드시겠습니까?”
“아, 되었네. 내가 여기 술을 마시러 온 것도 아니고.”
“한데 이번에는 어쩐 일로 갑작스럽게 이곳에 방문하신 것입니까, 아캄 대족장님.”
케들락 대신관의 말에 아캄 대족장이 말이 없자, 조용히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혹 성녀님을 뵙고 싶어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그 왈가닥 꼬맹이를 만나서 뭐 하려고. 괜히 찾아가 봐야 수염이나 뜯기지.”
“손녀의 애정이지 않겠습니까.”
“그 애정, 두 번만 하면 수염만이 아니라 머리털마저 다 뽑히겠네.”
기겁하는 아캄 대족장의 모습에 케들락 대신관이 작게 웃었다.
“원, 누굴 닮은 것인지……. 쯧쯧.”
“아캄 님을 닮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주 그냥 욕을 하게, 욕을 해.”
아무리 친손녀라도 그것은 정말 싫다는 듯 아캄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며 수염까지 파들거렸다.
이런 아캄의 질색하는 모습에 케들락 대신관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보다 아주 성녀 놀이에 푹 빠져서 제멋대로 굴지는 않던가.”
“공부는 조금 지겨워하시는 듯하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계십니다. 다른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셔서 크게 외로워하지는 않으신 듯합니다.”
“크흠, 그런가. 뭐, 편식하지는 않고? 어디 아픈 곳도 없겠지?”
“뭐든 잘 드시고 아픈 곳이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손녀는 손녀인지라, 조금 걱정된다는 듯, 그는 올 때마다 손녀의 안위를 걱정했다.
매번 듣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케들락 대신관은 그의 이런 걱정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 주었다.
이곳, 다예프도 북부의 끝에 위치한 곳이지만 그보다 더 먼 곳에 위치한 곳에 머물고 있는 아캄 대족장인지라, 어쩔 수는 없는 듯했다.
그리고 성녀이자 자신의 손녀가 이전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아캄 대족장이 웃으며 말했다.
“제 놈들이 말하는 북부 야만인의 아이가 성녀라고 불리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궁금하긴 하군.”
“인간의 눈으로는 진실 따위 알지 못하겠지요.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든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안위와 욕심만이 가득할 터이니 말입니다.”
케들락 대신관의 말처럼, 성녀가 누구인지, 성자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신의 힘을 사용하는 대단한 이가 있다는 그 상징성과 신전들이 그것을 통해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할 뿐이었다.
적어도 이 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대신전과 신전들은 이 성흔을 가진, 신의 힘을 내는 이로 인해서 그 권세가 막강하니까.
“한데 정말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
어떻게 보면 즐거운 담소였지만, 케들락 대신관은 아캄 대족장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온 것임을 믿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러 올 만큼 아캄 대족장이 대표로 있는 대지의 일족이 머무는 그 땅은 가깝지 않았다.
또한 아무리 손녀가 수염을 잡아 뜯는다 해도 보러 가지 않을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캄 대족장은 찻잔을 내려놓은 채 자신을 지켜보는 케들락 대신관의 눈을 마주 보며 잠시 말을 내뱉지 못하였다.
그저 가지고 온 가방에서 파이프와 담뱃재가 담긴 작은 종이를 꺼내 파이프에 담뱃재를 채울 뿐이었다.
“불 좀 빌릴 수 있겠나.”
“예.”
아캄 대족장의 부탁에 케들락 대신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행동 한 번으로 아캄 대족장이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의 담뱃재에 불을 붙여 주었다.
“흠…….”
그리고 몇 번이나 입에 문 파이프를 들이켜자 제대로 불이 붙고 담뱃재가 타올랐다.
그것을 깊게 한 번 빨아들인 후 하얀 연기를 토해낸 아캄 대족장이 케들락 대신관에게 말했다.
“저 먼 남부에서 성흔이 나타나, 참 재미난 일들을 일으키고 있다 들었네만.”
“호오, 그 얼음 대지에서 그런 소문을 다 들으신 것입니까.”
“가끔 술을 팔러 오는 인간들이 있어서 말일세. 그놈들을 통해서 들었네만.”
어지간히 정신 나간 인간들이 아닌 이상 북부의 얼어붙은 대지까지 상행을 나서는 이들은 없었지만, 그런 미친 짓을 저질로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이득만 챙겨준다면 인간은 불구덩이 속이라도 들어갈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캄 대족장의 일족이 던져주는 적당한 광석과 보석을 통한 거래로 엄청난 이득을 거두고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아캄 일족 역시 쉽게 찾을 수 없는 술과 담배를 가지고 오는 이들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간은 싫어도 술과 담배는 좋은,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는 하나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에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사실인가?”
아캄 대족장이 조용히 묻자, 케들락 대신관은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제노폴 제국의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아이에게 성흔이 나타났다 합니다.”
“마르티네스……?”
잠시 갸웃하던 아캄 대족장에게 케드락 대신관은 딱히 숨길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마를렌 님의 피가 섞인 인간들이 만든 가문입니다.”
“마를렌 님이……? 아, 그 마르티네스……!”
그제야 아캄 대족장도 마르티네스 가문을 떠올린 듯 소리쳤다.
“하지만 갑자기 왜? 몇 세대, 몇 십 세대가 지나도 나오지 않던 게 지금 이때 왜 나타났단 말인가.”
성흔이 그들에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이들 일족들은 달랐다.
그렇기에 마를렌이 떠난 뒤 인간과 결합하고 성흔을 지닌 채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땐 그들 역시 무척이나 당황하며 자애의 성흔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줄곧 기다렸다.
성흔은 대대로 그 일족에게 대물림이 되니 말이다.
엘프들의 손에서 나타나지 않는 성흔으로 인해서 그들은 마르티네스에게 눈을 돌렸지만 몇 년을, 몇십 년이 지나고, 그 세월이 백 단위가 넘어가자 그들 역시 결국 그곳에서 눈을 떼었다.
자신들이 자리 잡은 이곳 북부와 제노폴은 너무나 멀고 활동하기 힘든 곳이었으니까.
그저 다시 엘프의 자손들에게 그 성흔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결국, 다시 그것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과…….”
“……아미엘 님의 요정들이 나타났다, 겠지?”
“…….”
잔뜩 찌푸린 채 낮게 말을 하는 아캄 대족장의 모습을 보며 케들락 대신관 역시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네들과 요정들은 참으로 친했는데……. 괜찮겠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흠…….”
어떻게 보면 케들락 대신관의 일족도 요정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고, 아캄 대족장의 일족 역시 요정의 피가 조금이나마 흐르는 이들이었다.
하나의 나무에서 태어난 이들로서, 엘프, 드워프, 오크. 그리고 요정.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형제였다.
“잎은 엘프가 되었고, 뿌리는 드워프가 되었으며, 가지는 오크가 되었고 열매는 요정이 되었다.”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하나?”
“저희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 그렇긴 하지.”
지금은 점점 잊혀져 아캄 대족장이 이끄는 대지의 일족들도 아는 이들이 몇 남지 않았지만, 케들락 대신관의 숲의 아이들은 여전한 듯했다.
“그리고 나무를 베고, 잎을 떼고, 가지를 꺾고, 열매를 빼앗아가고, 뿌리를 자른 약탈자에게 복수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집념, 집착이 느껴졌기에 아캄 대족장은 조금 섬뜩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캄 대족장은 애써 태연한 척, 케들락 대신관에게 말했다.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오크의 성흔도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자애의 성흔은 달라.”
“예, 자애의 성흔은 다르지요.”
아캄 대족장의 말에 케들락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분의 안배가 있어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확실한 매듭을 지으려면 자애의 성흔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그 자애의 성흔은 케들락 대신관의 일족, 엘프들을 위해서 전해진 것.
그것을 잃어버린 세월이 아무리 컸다 하나 자신들의 중심은 자애의 성흔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둑은 알아서 터지겠지만, 확실하게 터뜨릴 열쇠는 그 자애의 성흔이니까. 하나 그 아이가 만약 아미엘 님과 접촉한 상태라면 힘들지 않겠나.”
“이미 접촉하였을 것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케들락 대신관의 말에 아캄 대족장이 놀란 눈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꽤나 놀란 듯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 담배를 떨어뜨렸을 정도였다.
“끄응……. 그러면 곤란한 것 아닌가?”
“곤란이요? 어째서 말입니까?”
“그야, 아미엘 님이 지켜볼 터인데 자애의 성흔을 회수하는 것은…….”
하지만 그런 말을 하던 아캄 대족장이 케들락 대신관의 모습에 하던 말을 멈추어 버렸다.
케들락 대신관의 얼굴에는 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참으로 섬뜩한 미소였다.
낮게 가라앉은 차가운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만들 정도였다.
“인간의 편에 서면 아미엘 님도 우리의 적일 뿐입니다.”
“적이라……. 그 적이 되기 싫어 문을 억지로 닫아버렸던 것 아니었나.”
“하지만 문이 다시 열리고 그분이 나타난 이상, 자애의 성흔을 가진 이를 비호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우……. 복잡하구나…….”
아캄 대족장이 떨어뜨린 파이프 담배를 다시 주워 입에 물고 뻐끔뻐끔 피웠다.
“나는 말일세, 나의 선조이신 칸데 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네. 물론 자네들이 한 행동 역시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해. 문을 닫지 않았다면, 아미엘 님은 그곳을 떠나려는 우리를 막았을 것이니 말일세.”
그는 엘프들과 달리 그때의 그 상황을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이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였고, 케들락 대신관을 중심으로 한 숲의 일족인 엘프들에게 협조한 것이니 말이다.
그 역시 자신들을 핍박한 인간이 싫지만,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는 아니기에 케들락 대신관과 같은 증오까지 가진 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미엘 님을 자극하지는 말게. 나는 그 능력을 전해 들었을 뿐이나 그럼에도 참으로 무섭다네. 하나 자네는 아니지 않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무서움은 제가 가장 잘 아니 말입니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애의 성흔은 우리 일족의 대표이셨던 마를렌 님의 것. 아니…….”
케들락 대신관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제 누님의 것을 인간의 손에 계속 둘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게 설령 그의 누나인 마를렌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라도, 이미 인간의 피로 더렵혀진 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