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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183화 (183/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183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야?”

워랜이 갸웃하며 묻자, 주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록산느 경이 고개를 숙일 때쯤부터?”

“왜 아무 말 안 하고……?”

“그야, 끼어들 틈을 못 찾아서…….”

어쩜 이렇게 당당하지 못한지,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주안의 모습에 워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주안은 끼어들 틈을 드디어 찾았다는 듯 은근슬쩍 워랜과 토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보다 록산느 경이 재미있는 부탁을 하셨네요.”

“죄송합니다, 공자님…….”

주안의 말에 록산느가 고개를 숙이자, 주안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록산느 경을 탓하려거나 놀리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주안도 여성 기사들이 가진 고민과 어려움에 공감했다.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인 차이는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지라, 신의 멱살을 붙잡고 차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는 이상 좁힐 수가 없다.

서방의 검은 남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검이다 보니, 록산느가 겪는 려움은 모든 여성 기사가 겪는 일이기도 했다.

이것을 없애려면 여성 기사들에게 맞는 검술이 필요하지만, 그런 검술은 동방 대륙에나 존재하지, 이곳에는 없었다.

‘오히려 록산느 경이 이렇게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큰 결심을 한 것이 대단한 일이지.’

재능과 의지가 있음에도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다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은 여성 기사는 결국 그 넘을 수 없는 벽에 막혀 좌절하거나, 억지로 넘으려다 큰 상처만 입게 된다.

그 때문에 여성 기사들은 남성 기사들과는 달리 매우 한정적인 임무만을 받을 수 없고, 대개 같은 여성의 근거리 호위 임무 정도만을 맡을 뿐이었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기사가 되었을 테니, 조금 견디기 어렵겠지.’

어찌 보면 차별일 수도 있지만, 근거리에서 귀족 여성을 보호하는 임무는 사실 남자가 하기 쉬운 일은 아닌지라, 어떻게 보면 그것이 여성 기사들 필요한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들도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마음을 주안 역시 모르진 않았다.

“그보다 그렇게 고개를 숙일 의지가 있으시다면 제가 사람을 소개해 드릴 테니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사람이라고 하시면…….”

갸웃하는 록산느를 보며 주안이 히죽 웃으며 워랜과 토미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두 사람의 스승이 되는 분이시죠.”

“그, 그게 정말입니까?!”

“예.”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록산느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졌다.

하지만 곁에서 듣고 있던 워랜이 은근슬쩍 주안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사부한테 허락은 받은 거야?”

“이제부터 받아야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했어?”

“저도 다 생각이 있거든요?”

주안이 자신만만해 하는 것처럼, 풍신에게 소개해 주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가 진심으로 모시는 유우나 공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주안이었기에, 주안에 대한 그의 호감도는 나름 큰 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유우나 공주를 통해서라도 부탁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말 그대로 소개만 해주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단지 소개해 주었다 해서 그에게 록산느 로마니아를 가르치라는 명령은 내리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풍신 경이 허락해 주면 좋고, 안 해준다면 뭐, 토미한테 맡기면 되는 거죠.”

“예?! 저, 저한테요?!”

“응.”

주안의 말에 토미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주안은 그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이런 도련님의 모습에 토미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하, 하, 하지만 그래도 저도 허락은 받아야…….”

“너한테는 명령을 내릴 거야.”

“너무하세요!”

이건 농담이었지만,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에 토미가 반쯤 울먹이며 소리쳤다.

곁에 있던 워랜이나 솔, 아르베리아는 매우 안타까운 눈으로 토미를 보며 다독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록산느가 이런 주안에게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님…….”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허락을 못 받으면 말짱 꽝이니까요.”

“저에게 그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님도 잡지 못한, 소중한 기회이지 않습니까.”

“으음, 그런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 누구라도 탐낼 만한 기회이긴 했다.

동방 대륙의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무사는 서방 대륙에 방문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것도 검기를 사용하는 무사들은 동방 대륙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들인지라,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통제할 정도였다.

그들의 검은 매우 비밀스러웠고, 서로 각자 다른 검과 비전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철저하게 단속하는 것은 물론, 그러한 실력자들 역시 자신들의 것을 타인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의 비전을 가족이나 자손들에게도 모두 보여주지 않고, 진정한 제자 몇에게만 알려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애초에 그들은 많은 제자를 들이지도 않았으며 정말 재능 있는 이들, 그리고 그 재능 있는 이들 중에서도 비전을 전수할 일부만을 제대로 가르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풍신 경은 우리 입장에선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분이야.’

검기를 사용하는 풍신은 그런 비전을 가진 존재이기도 했고, 단지 안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우나 공주의 곁을 지켜줄 만큼 인성도 바른 인물이었다.

게다가 주안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며, 주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워랜과 토미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니, 주안과 매우 깊은 관계가 되었다 해도 무방하였다.

‘풍신 경과의 인연은 어떻게든 붙잡고 이어나가야 해. 좋은 관계로 끝까지…….’

그는 이런 실력과 인성, 인복만으로도 정말 중요한 인물이지만, 주안은 이전 삶에서 토미를 서방 대륙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랭크 8이라고 할 수 있는 실력자로 키운 그의 능력을 더욱 높게 쳤다.

아무리 토미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곁에서 지도해 주는 인물이 어정쩡하면 그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젊은 나이에 그만한 실력을 보일 수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그 능력, 오히려 풍신 경은 그게 더 뛰어날 거야.’

만약 록산느 로마니아가 풍신에게 배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제대로 된 가르침이 아니라도, 수박 겉핥기식 기초라도 배울 수 있다면, 록산느와 마찬가지로 서방의 검에 큰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여성 기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동방의 검은 본디 가볍고 부드러우며 빈틈을 노리는, 그들의 왜소한 체구만큼이나 이곳 여성들에게도 잘 맞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가문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록산느를 통해 그 검이 입증된다면,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여성 기사들에게도 한 줄기 빛이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되지 않고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몸에 잘 맞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실력은 쌓을 수 있는 서방의 검이기에, 근육은 자연스레 붙으며 몸은 조금씩 커진다.

그리고 그것은 민감한 시기의 여성들에겐 정말 치명적인 일이었다.

비록 기사로서 삶을 바쳤다 해도 말이다.

* * *

새로운 희망을 얻은 록산느와 헤어진 뒤, 주안은 워랜과 토미, 그리고 솔과 아르베리아와 함께 간단한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이렇게 함께 모이는 일도 별로 없었는데,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딱히 차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워랜은 간단한 물만 홀짝이다 주안에게 물었다.

“주안 공자, 진짜 사부에게 록산느 경을 소개해 주려고?”

“예, 그럴 거예요.”

“쉽게 허락하실 양반이 아닌데…….”

“……워랜 경처럼 달려들지 않으면 풍신 경도 사람답게 대할 분이시거든요?”

워랜은 풍신이 실력 있는 동방 대륙의 무사라는 것을 알자마자 냅다 달려들어 검을 휘둘러 댔고, 그러다 시원하게 맞고 굴렀다.

주안은 적어도 그런 일만 없었다면, 워랜이 보다 쉽게 풍신에게 검을 배웠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지금이야 풍신에게 호되게 정신수양이다 뭐다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서 좀 나아졌다지만, 워랜은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였다.

이런 주안의 핀잔에 워랜에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거,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사부도 얼마나 성질이 나쁜데.”

“워랜 경을 상대하려면 그런 성격도 필요하다 생각하는데…….”

“날 너무 나쁘게만 보는 것 같다?”

“설마요. 우리 마르티네스 가문의 자랑이자 언젠가 대륙 제이 검이 될 분에게 제가 어떻게 나쁘게 본다는 거예요.”

실실 웃는 주안의 그 밉살 가득한 모습에 순간 볼때기를 죽죽 늘려주고 싶은 워랜이었지만, 이내 주안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며 갸웃했다.

“그런데 웬 제이 검? 제일 검이 아니라?”

“제일 검은…….”

주안이 히죽 웃으며 곁에서 주스를 맛있게 홀짝이는 토미를 보다가 어깨동무하며 확 끌어안았다.

“우리 토미가 될 거니까요.”

“예, 예?”

“오호라……. 그러면 그 제일 검의 검 솜씨 좀 볼까?”

“예?!”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워랜이 토미를 노려보자, 토미는 손에 꼬옥 쥐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그리고 이런 주안과 워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르베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착한 아이를 괴롭히면 재미있습니까? 적당히 하십시오, 공자님. 그리고 워랜 경.”

“쳇.”

“흥.”

“휴우…….”

주안은 아쉽다는 듯 작게 혀를 찼고, 워랜은 콧방귀를 뀌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토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르베리아를 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할 정도였다.

틈만 나면 토미를 괴롭히는 이 두 사람은 정말 지겹지도 않은 듯했다.

“그보다 공자님, 그러면 록산느 경이 풍신 경을 만나러 아스란 왕국까지 가야 할 것인데, 로마니아 백작가에서 그것을 허락해 주겠습니까?”

“허락을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스타크 로마니아 경이 계신다 해도, 록산느 경은 로마니아 백작 가문의 유일한 자손입니다. 혹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벡브란 전대 공작과 마찬가지로 로마니아 백작 가문은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 여전히 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년이 된 로마니아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스타크 로마니아는 후계자일 뿐, 기사로서의 작위 외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의 딸이 록산느 로마니아였으며, 현재의 로마니아 백작가는 삼대째 외동이라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집안이었다.

대대로 쭈욱 외동이나 마찬가지인 마르티네스 공작가만큼은 아니지만, 이것은 귀족으로서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잘못해서 대가 끊어져 버리면 가문이 그대로 무너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베리아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 정정한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나 스타크 로마니아 경이 있다지만, 만약 록산느가 외지로 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문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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