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79화
“으윽……!”
록산느는 토미의 검을 막는 순간 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 묵직한 힘에 손바닥이 저렸고, 순간 검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채 느낄 새도 없이 막아섰던 토미의 검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뱀처럼 휘어져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록산느는 경악하며 황급히 곁을 옆으로 돌려 그것을 비껴가게 했다.
‘대체 이 아인……!’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토미의 빨간 눈에 록산느는 순간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한 대련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록산느 그녀 본인에겐 이것은 복수전이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한 수 배우는 것 같잖아!’
방금도 그랬다.
옆구리를 향해 오던 토미의 목검이 순간 움찔하여 멈칫거리지 않았다면 그것을 비껴가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날, 봐주고 있어…….’
순간 발끈한 록산느가 거칠게 토미의 검을 쳐 내며 수비에서 공격으로 바꿔 나갔다.
본디 서방 대륙의 검술은 딱딱하고 힘에 맞춘 검이라 매우 직선적이었지만, 그녀는 나름 여성으로서의 유연함을 갖춘 검이었다.
스스로 자신만의, 자신의 몸에 맞는 검으로 발전시킨 그녀의 검은 부드러웠고 때론 강했으며, 토미처럼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는 방식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 너무나 익숙한 토미에겐 록산느의 그 어떤 검도 소용이 없다는 듯 모조리 막혔고, 록산느는 오히려 반격해 오는 토미의 검을 피하기 급급할 정도였다.
‘안 돼. 여기서 또 질 수는…….’
처음, 토미의 제대로 된 실력을 몰랐을 때의 지도해 준다는 헛된 생각은 이미 지워졌고, 방심 따윈 없음에도 순수한 실력으로 이렇게 밀리는 것에 허망함과 절망, 그리고 절박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미 규격 외의 존재라고 생각되는 워랜 노밀도, 동세대의 기사조차 아닌, 아직 한참 어린 이에게 이렇게 제대로 손도 못 쓰고 있으니, 자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검을 잡은 것인지 후회마저 밀려올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록산느는 그러한 절망에 마냥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자존심의 상처 따위보다 절박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록산느의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절대 질 수 없어……!’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지켜보는 이들 중에는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기사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절대 질 수 없어!’
이것은 이제 단순한 대련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록산느의 몸은 어느새 전장의 기사처럼 움직임이 변해갔다.
이 작은 변화에 토미는 순간 록산느의 그 기세에 밀렸다.
애초에 록산느의 검을 견식하고 그 대단한 검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가문인 로마니아 백작가의 검을 배우고자 하던 토미와는 달리 록산느는 진심으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가짐의 차이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였다.
그 작은 차이가 압도해 나가던 토미를 그대로 밀어내더니 두 사람의 검이 어느새 호각으로 변해 있었다.
* * *
“저 아이는 대체 누구더냐.”
나이로 인해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었지만, 군데군데 남은 옅은 붉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풍채 좋은 노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지금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연무장 한가운데, 손녀가 이른 아침부터 대련을 벌인다는 소식에 잠시 나와봤지만, 그는 재미난 구경거리가 아닌 무척이나 신기하고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고는 크게 놀란 듯하였다.
곁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아들인 스타크 로마니아에게 록산느와 대련하고 있는 토미에 관해 물었지만, 자신의 아들 역시 두 사람의 대련, 아니, 토미에 시선을 빼앗겨 아버지의 말까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이해하기에 그는 다른 이에게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루반, 자네는 아나?”
“저 아인 분명 주안 공자님과 함께 있던 아이입니다.”
“주안 공자와?”
가문의 일등 기사이자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을 제외하면 가문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고 할 수 있는 루반 웰링 준남작은 주안과 함께 있던 토미를 한 번 보았기에 누구인지 안다는 듯했다.
“주안 공자와의 관계는?”
“그것이…….”
잠시 머뭇거리던 루반 웰링 준남작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일단 공식적으론 하인이라고 합니다.”
“……하인?”
루반 웰링 준남작의 그 말에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 황당하다는 듯 그와 토미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요즘 하인은 집안일을 보지 않고 검술 훈련이라도 받는다던가?”
“이, 일단 공식적인 것일 뿐 비공식적으론 주안 공자와 각별한 사이인…… 친구라고 합니다.”
“친구?!”
오히려 그게 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루반 웰링 준남작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좋지 않게 변했다.
그것을 느낀 듯 루반 웰링 준남작이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 그보다 제가 알기로는 저 아인 황도 저택에 머물고 있는 피터 경의 제자라 알고 있습니다.”
“피터라…….”
하인이라거나 주안의 친구라는 헛소리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말인지라 루반 웰링 준남작에게 호통을 치려던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기세가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루반 웰링 준남작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토미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검에서 느껴지는 저 힘은 답답한 황실 근위대의 검의 기세이긴 하다만…….”
그럼에도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듯 토미의 움직임과 검에서 느껴지는 그 기세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것은 마치…… 워랜의 검과도 비슷하지 않나.”
“확실히 워랜 경의 검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과 워랜의 대련은 수많은 이가 보았고, 곁에 있던 루반 웰링 준남작 역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던 이였다.
랭크 7에 오른 워랜과 같은 랭크 7에 오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대련은 그것을 지켜본 모든 기사에게 큰 공부가 되었던 대련이었다.
그는 로마니아 백작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사인 만큼, 로마니아 백작가의 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온전히 워랜만 지켜보며 그의 검술에만 집중하였기에, 보다 자세히 워랜의 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워랜 그 아이의 검도 있지만, 피터의 검도 있어……. 저건, 두 가지의 검이네.”
“예? 두 가지의 검이라니요.”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말에 루반 웰링 준남작이 의아해했지만, 그것은 그만이 아니라 은근슬쩍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말을 듣던 많은 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의 뜻을 이해한 루반 웰링 준남작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설마…….”
그리고 그에게 확신을 주듯,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 그가 목표로 하던 검 말일세.”
그 말 한마디에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을 주시하던 이들의 눈빛이 변하며 토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토미에 대한 시선은 놀라움과 경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사라고 하면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을 모를 수가 없었고, 제국의 일반 백성들도 황제의 동생은 모른다 해도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 누구인지는 다 안다.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님이라니…….”
루반 웰링 준남작 역시 토미를 보며 나지막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워랜이 나타나기 전까진 최연소 랭크 7의 기사이자 제국을 넘은 대륙 제일 검으로 모든 기사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이가 바로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검.
서방의 검을 버리고는 동방의 검을 배우겠다면 모든 것을 놓은 채 떠난 인물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서방의 검을 버린 그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그와 나름 친분이 있는 이들은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 왜 자신의 검을 놓고 동방 대륙으로 떠난 것인지 알기에 이해하고 있었다.
검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던 그에게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선 평생을 받쳤던 서방의 검을 버려야 하였던 그 심정과 동방 대륙으로 떠나 새로운 검을 배운다는 각오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를 잘 아는 이들은 떠나는 그를 응원하였고, 언젠가 다시 돌아 와주길 바라는 마음을 간직한 채 그를 배웅하였다.
그러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었고, 루반 웰링 준남작 역시 그 곁에서 함께 지켜보며 응원하였던 이였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아직까지 서방 대륙의 제일 검이라고 하면 바스티아노 백작이 아닌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라고 하는 이들은 많았으며, 그만큼 그는 수많은 기사에게 존경받던 기사 중의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 중의 기사가, 대륙 제일 검이라 불리던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목표로 하던 검을 가진 사람이, 아직 어린아이라니…….
것에 루반 웰링 준남작뿐만이 아니라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눈에 본능적으로 탐욕이 스쳐 지나갔다.
“백작님. 이게 사실이라면…….”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었고, 이미 답을 루반 웰링 준남작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저 검에 대해서 착각하였다 해도 이미 랭크 4에 오른, 이제 곧 랭크 5에 도달할 것이 확실한 록산느를 저렇게 상대하는 이상 그 재능은 확실했다.
워랜 노밀.
그와 비견되어도 절대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만이 아니라 토미를 지켜보는 모든 이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둘씩, 대련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자리를 벗어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바쁘게 자신들의 가주를 찾아갔다.
* * *
“토미 녀석, 큰일 났네.”
“네? 큰일이라니요?”
워랜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솔이 갸웃하였지만, 워랜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에는 자리를 벗어나고 있는 기사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었고,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눈빛이 변한 것을 모두 보았기 때문이었다.
“토미가 이기고 있는 것 아니에요?”
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솔의 눈에는 토미가 록산느를 압도해 나갔다. 지금은 조금 주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솔의 눈은 정확하였고, 의외라는 듯 아르베리아가 자신의 통통한 동생을 보며 말했다.
“워랜 경의 곁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너도 검을 보는 눈이 나름 생긴 듯하구나.”
“그, 그런가요.”
형인 아르베리아에게 칭찬을 받아서 그런지 솔은 통통한 솔의 볼이 만져주고 싶을 만큼 발갛게 변하며 좋아했다.
“으억……. 왜, 왜, 그러세요.”
그리고 이런 것을 놓치지 않는 워랜이 솔의 통통한 볼때기를 붙잡고 죽죽 늘려주었다.
“아니, 너무 좋아해서 괜히 괴롭히고 싶어지잖아.”
“성격 진짜 이상하세요!”
“내 동생한테 뭐 하는 짓인가, 워랜 경!”
아무리 오래 함께 있었어도 워랜의 이 이상한 성격은 정말 적응이 안 되는 솔이었고, 이런 워랜의 행동에 아르베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발끈했다.
그래도 동생은 동생인지라, 그런 동생을 괴롭히는 이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보다 내가 큰일이라고 한 건, 토미가 이제부터 엄청 피곤해질 것이기 때문이야.”
“피곤해져요?”
솔의 통통한 볼때기를 죽죽 늘려주다가 아르베리아의 잔소리가 뒤따를 것 같아서 그런지 금세 그것을 놓아준 워랜은 토미를 흘겨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솔은 갸웃했지만, 아르베리아는 그 말뜻을 깨달은 듯했다.
“확실히 저 재능을 탐내는 가문이 한둘이 아닐 것 같기는 하네.”
“작년에 우리 아버지도 토미를 탐내다가 피터 경과 엄청 신경전을 벌였다 들었는데 말이야.”
아르베리아는 그러한 사실을 처음 듣는 듯했지만, 워랜은 참 지긋지긋하다는 듯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토미 쟁탈전 시즌 2가 되겠구만.”
“……토미가 불쌍하네요.”
“업보야, 업보.”
워랜이야 노밀 자작가의 후계자라 혼담 외에는 딱히 그를 어떻게든 엮으려는 이는 없었지만 토미는 달랐다.
평민에, 소속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그것도 성년도 아닌 아이였으니 어떻게든 구슬려서 코를 꿰려는 이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응?”
안타까워하는 워랜과 솔을 뒤로한 채 아르베리아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 그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워랜과 솔이 갸웃하며 아르베리아를 보자, 아르베리아가 그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한 채 말했다.
“토미를 얻으려면 먼저 넘어야 할 산이 있지 않나. 작은 산이긴 하나, 매우 험난한 산이 말이야.”
잠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갸웃하던 워랜이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산이 하나 있긴 하지. 집착이 엄청 심한 산이.”
“네? 그게 뭐예요?”
솔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워랜과 아르베리아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린 채 토미와 록산느의 대련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착은 우리 공자님도 심한데……. 과연 토미를 빼앗아 갈 수 있으려나.”
워랜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솔도 왜 이 두 사람이 즐겁게 웃은 것인지 이해해 버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토미를 꼬시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불쌍하여 작게 합장해 주는 배려까지 보여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