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74화
“갑자기 그분에 대해서 왜 궁금한 것이더냐?”
뜬금없는 주안의 물음에 의아한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갸웃하였다.
그 역시 아주 오래전 선대 가주들과 직계들에 관해 공부할 때나 짧게 보았던 이름이었고, 사실 힉스 마르티네스 전대 공작에 비해 알려진 것도, 남겨진 것도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이 너무나 사랑한 이였으며, 그 때문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이곳, 이 도시의 이름을 마를렌으로 정했다는 일화가 가장 유명한 이야기 정도일 뿐이었다.
“그게…….”
주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하여도 아직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진실을 숨기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말을 빠르게 생각해 낸 뒤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님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것도 많고,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었지만, 그분의 아내이셨던 마를렌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찾을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조심스레 주안도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술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이제 후계자 수업을 제대로 받고 어엿한 한 사람이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드려야죠.”
“그래, 그렇지……. 한 가문을 이끌어갈 자는 선대를 잊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타 가문에서도 선대에 대한 존경심이 있겠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그게 남달랐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아이에겐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도 바로 초대 공작에서부터 쭈욱 이어지는 가계도와 선대 가주들에 관한 이야기였을 정도였다.
다만, 주안은 이런 가계도를 공부할 만큼 머리도 좋지 않았고 엄마의 품에만 있던 아이였던지라 그런 것을 전혀 공부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공부하였던 것과 가주에게서 배워 나가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주안은 아직 가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가문에 대해 잘 몰랐기에 링베르가 공작가와의 일에서 실수하여 그 이름에 먹칠하고,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것이니 말이다.
이런 주안의 말에 약간의 의구심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주안이 가문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 것인지 벡브란 전대 공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애비가 마를렌 님에 관한 것이나 선대 가주님들의 이야기는 정리해서 주도록 하마. 아, 그리고 선생들도 구해서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후계자 수업은 할아버지에게 받으면 안 될까요?”
“음? 나에게 말이더냐?”
“예.”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좋아요. 지금은 따로 선생님들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배우고 싶어요.”
“허허……. 이 할애비도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도 지금은 너무 바쁘시다는 것도, 그것 때문에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는 것을요.”
분명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강성하고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가문이나,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을 처리하는 것에서는 확실히 복잡함과 많은 변수가 있었다.
단지 거래를 끊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압박과 함께 제재를 가할 것이며 이후 벌어지게 될 링베르가 공작가와의 분쟁에서 황가가 어디에 손을 들어주고 그에 따른 또 다른 일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미 방향은 정해졌다고 해도 차후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많은 회의가 필요했고, 그로 인해 지금 이곳, 공작성에 모인 가신들과 계속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회의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벡브란 전대 공작이 시간을 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렇기에 따로 선생을 구해서 주안에 대한 후계자 수업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안 역시 할아버지가 구한 선생님 아래에서 느긋하게 수업을 받을 입장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수업을 받는 것은 내년쯤, 어머니 출산 이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전까진 할아버지 아래에서 조금씩이지만 가문에 대해서 알아가고 또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가문에 대해서라…….”
사실 후계자 수업이라는 것도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고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가문의 일들에 대해서 알아가며, 가신들이 어떻고, 영지를 운영함에 있어서 모나지 않는 방향을 알려주며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더 키워 이 가문을 흔들림 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니 말이다.
벡브란 전대 공작이 본 주안은 이미 어느 정도 후계자의 기틀은 잘 마련되어 있었다.
심성도 나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재능도 있었으며 세상을 보는 눈도 갖추고 있었다.
모자란 부분은 역시 가문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가신들과의 화합에 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제가 배우고, 그 배움을 실천하고 닮고 싶은 사람은 할아버지인 걸요.”
“허, 허허…….”
주안의 당당한 그 말에 오히려 낯간지러워지고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것은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다.
제 아비를 닮아 유약해 보이는 손자가 이처럼 당돌하게 나서니, 벡브란 전대 공작도 조금은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은 듯 이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을 바라보았다.
“어디 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이더냐? 이 할애비에게 그런 말도 다 하고 말이다.”
“으……. 그런 거 없어요. 저도 용기 내서 말씀드린 건데…….”
싱글거리며 웃는 할아버지의 그 모습에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주안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주안의 이런 모습마저도 벡브란 전대 공작에게는 참으로 좋게 보인 듯했다.
정말이지 아이가 이렇게 달라지고, 이렇게 쑥쑥 커질 수 있나 싶었다.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것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그 실수를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벡브란 전대 공작은 너무나 기뻤다.
“주안아.”
“예?”
투덜거리는 주안을 보며 벡브란 전대 공작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할애비가 하는 일이 이해되지 않고 그러한 일로 다투고 네게 호통을 친다 해도, 너는 너의 아비처럼, 너만은 이곳을 등지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주안은 조금 화난 듯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에요. 정말 그랬다면 매해 찾아오는 일도, 집에서도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주안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미묘한 관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본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게 아닌, 그저 대하기 매우 어려워하는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젊었을 땐 두 사람의 사이를 어긋나게 만든 일로 인해서 소원해졌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 역시 할아버지를, 마를렌을, 마르티네스 가문을 버리고 가진 않을 거예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그러한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주안은 당당하게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지금의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할아버지처럼 되고, 할아버지처럼 가문을 잘 이끌어가는 거니까요.”
“주안아…….”
“그러니 오래오래 사셔서 제가 힘들 때 응원도 해주시고, 실수했을 땐 호통도 치셔서 바로 잡아주셔야 해요, 아셨죠?”
주안이 하얀 이를 드러낼 정도로 밝게 웃으며 하는 그 말과 그 행동, 그리고 주안의 모습에 벡브란 전대 공작은 무언가 복받쳐 오는 감정을 느껴야만 하였다.
이전까지의 벡브란 전대 공작은 주안이 똑바로 서서 올곧게 나아가는 그 모습을 보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지금 눈을 감는다면, 너무나 큰 미련이 남아 영혼이 되어 이곳을 떠돌 것만 같았다.
지금은 그저 주안이 제대로 커서, 이 가문을 이어받고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며 주안의 아이를 한 번쯤 품에 안아준 뒤에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 * *
주안은 할아버지와의 저녁 식사 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특이한 점은 주안의 손에는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그 속에는 작게 잘라놓은 샌드위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야식이라기엔 방금 저녁을 먹었기에 매우 이상했지만, 이것은 주안의 것이 아니라 슬슬 일어날 때가 된 세냐를 위한 식사였다.
일단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그 부분은 할아버지를 믿고 기다리면 되겠지만, 주안은 세냐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주안은 가장 먼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바구니의 속, 푹신한 천으로 침대와 이불, 베개로 만들어진 세냐 전용 침대에서 자고 있는 작은 요정 꼬맹이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세냐~ 세냐.”
“우응……?”
다행히 세냐도 슬슬 일어날 때가 된 시간이라 그런지 주안이 흔들어 깨우자 금세 눈을 뜨고는 느긋하게 일어나더니 이내 길게 하품과 함께 기지개도 쭈욱 켠다.
그 모습을 본 주안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세냐의 식사로 가져온 샌드위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은 뒤 작은 접시 위에 샌드위치 하나를 두었고, 그 옆에 작은 찻잔을 놓고는 주스도 따라주었다.
이런 주안의 행동을 바라보던 세냐가 갸웃하며 말했다.
“……성불하실 때가 되셨어요?”
“무슨 소리야?”
“왜 후광이 비치는 건데요.”
“윽…….”
조금 방심했더니 또 주안의 몸이 빛나고 후광이 비치고 있나 보다.
그것을 깨달은 주안이 잽싸게 집중하자 신성력의 빛이 다시 주안의 왼손, 성흔으로 쏙 들어간다.
그 신기한 모습에 세냐가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밖에서 무슨 사고를 치셨기에 성흔의 신성력이 이렇게 강해진 건데요?”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어……. 대체 이 성흔이 왜 이러는 거야? 너 혹시 아는 거 없어?”
“흐음, 글쎄요.”
다른 누구보다도 이 성흔과 밀접한 세냐에게 지금 이 알 수 없는 일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던 주안이었지만, 세냐도 딱히 아는 게 없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세냐는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카락을 정리 후 가볍게 날아올라 주안이 잘 차려놓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와 주스가 담긴 작은 찻잔 앞으로 내려왔다.
“우웅~ 여긴 주스가 나름 맛있어서 참 좋네요.”
“뭐, 동방 대륙의 과일이나 세브로 군도에서 나오는 열대 과일들이 자주 들어오는 곳이라서.”
직접 재배와 생산은 하지 않아도 남부의 아스란 왕국보다도 더욱 다양한 과일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바로 이곳, 마를렌이라고 보면 되었다.
물론 보관이 너무나 까다로워서 엄청 비쌌지만, 그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소비는 귀족들이 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과일을 좋아하는 요정들, 특히 세냐는 세브로 군도의 과일로 만든 주스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한 주스가 작은 찻잔에 담겼다 해도 세냐가 마시기에는 매우 어려워 보였지만, 세냐는 간단하게 손짓 하나만으로 마법을 발동해 작은 크기의 물방울처럼 뭉친 주스를 떠오르게 만든 뒤 자신의 입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 신기한 행동을 보며 주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법을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