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73화
서방 대륙의 사람들에게 미지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여러 부류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중부와 남부 국가들 출신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똑같이 말할 것이다.
남부 대밀림.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하는 그 땅은 한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정벌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피해를 보고,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곳은 사람을 거부하는 불침의 땅이 되었다.
일부 모험가들은 여전히 남부 대밀림을 탐험하며, 자신들의 모험담을 늘어놓지만, 그들이 고작 남부 대밀림과 대륙의 경계 일부만을 오갔음은 모든 지식인이 알았다.
그리고 이 불침의 땅,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하는 그 땅에는 대륙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정한 주인들이 있다.
남부 대밀림의 패자, 그리고 이 땅의 지배자.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이라고 하였다.
“이곳인가.”
일단의 무리가 남부 대밀림의 입구라고도 할 수 있는 경계면에 발을 들이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선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감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이는 그런 표정을 지운 채 그저 묵묵히 눈 앞에 펼쳐진 대밀림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다부진 체구의 남성, 기사 험멜 경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쟈레스 자작님. 한데 정말 크샤나 후작 각하께서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바라고 계시니 우리가 이곳에 온 것 아니겠나.”
40대의 중년인 쟈레스 자작은 아스란 왕국 귀족파, 속칭 크샤나 후작파에 소속된 귀족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도 크샤나 후작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쟈레스 자작 가문의 기사인 험멜은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렇기에 험멜 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쟈레스 자작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상대는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입니다. 지금 이렇게 들어선 것만으로도 그들은…….”
“경계하겠지. 그리고 잘못하면 나무창에 꿰여 고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것을 아시면서도 가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저희보고 죽으러 가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비록 그들도 아스란 왕국 귀족파에 소속된 입장이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쓰다 버리는 패.
일이 잘되면 좋고 안 되어도 상관없는, 덮어씌울 수도 있으며 아니면 조용히 지워 버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러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이름만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위한 선발대라는 거창한 이름일 뿐, 실상은 가서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아보는 물건일 뿐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험멜 경은 쟈레스 자작의 이러한 행동이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자작의 입장에서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들의 기사와 병사들만 보낼 수 없기에 함께 따라온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험멜의 마음을 알기에 쟈레스 자작도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겠나, 하지 않으면 영지가 위태로울 것이고, 이런 일이라도 해야 남은 이들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차라리 왕실 쪽으로 몸을 돌리십시오. 지금의 왕실이라면 충분히 저희의 힘이 되어주실 겁니다.”
현재 아스란 왕국은 상황이 참으로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노폴 제국 사절단이 오기 이전까지만 하여도 왕실은 그저 허울 좋은 이름만 가진 껍데기였을 뿐, 실권은 모조리 귀족파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노폴 제국 사절단의 방문 이후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유우나 공주와 제노폴 제국 사절단 대표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주안 마르티네스의 미묘한 관계가 알려지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유명무실하던 왕실파가 점차 힘을 받기 시작하더니 귀족파에서도 이탈한 이들이 왕실로 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우나 공주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손님에게 전해주는 인장까지 소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자, 왕실과 유우나 공주에 대한 위협 역시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유우나 공주는 귀족파를 회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부의 반역 세력들까지 유화정책으로 끌어들이며 그들을 달래고 있었다.
게다가 왕가와는 완전히 척진 것으로 여겨졌던 북부의 대표 귀족 슬렌더 백작가와도, 정확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와의 인연을 통해 교류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귀족파의 이들도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가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쟈레스 자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험멜 경,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네. 하지만 우리 영지는, 크샤나 후작 각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의 중심에 위치해 있네. 우리가 돌아선다 해도 왕실이 도와주기 이전에 영지가 위태로울 것이야.”
“하지만…….”
험멜 경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탈한 귀족파의 귀족들은 모두 왕실과 가까운 중남부에 위치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왕실로 붙을 수 있었지만, 귀족파의 우두머리인 크샤나 후작가의 영지 인근에 위치한 귀족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왕실에 붙는 순간 그대로 영지의 위협으로 직결되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크샤나 후작 각하 역시 명령을 받는 입장이니, 어떻게 보면 후작 각하 역시 피해자겠지.”
이런 시기에 같은 귀족파를 버리는 패는 귀족파의 이탈을 더욱 가속화하는 악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민심이 썩 좋은 편이 아닌 귀족파이고 크샤나 후작인데, 자신의 파벌마저 이용하고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최악의 수였다.
이 아스란 왕국에서는 왕가보다 더 힘이 있다는 것이 귀족파의 수장이다.
그런 귀족파의 수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험멜 경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존재가 누구인지 예상한 듯 표정을 잔뜩 굳히며 말했다.
“결국 제노폴입니까.”
“……링베르가 공작가에서 요청이 들어왔다고 들었네만,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겠지.”
“빌어먹을…….”
제노폴 제국에 악감정이 없다면 이상하겠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고 인간이기에 이게 인과응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나이가 든 중년 이상의 이들에게나 해당이 되지, 아직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험멜 경의 분노 어린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짓던 쟈레스 자작이 말했다.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자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네. 설령 우리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자네들 가족들만큼은 가문에서 책임을 져줄 것이네.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할 수 있다네.”
“자작님…….”
그는 분명 좋은 귀족은 아니지만, 적어도 귀족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저지르던 그런 이는 아니었다.
그저 흔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가끔 불법도 저지르며, 때로는 힘든 영지민들을 위해 구휼 정도는 해주는 그러한 귀족 말이다.
그렇기에 쟈레스 자작을 따르는 기사나 병사들이 나름의 충성심을 가질 수 있었고, 이곳까지 따라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족들을 책임져 준다고 말하는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영지를 떠나기 전 개인 자산을 쪼개어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의 가족에게 모두 전달했다.
살아 돌아와도 그것은 그들의 몫이었고, 만약 이곳에서 사망한다면, 가족들이 평생 가지지 못하였을 많은 땅과 재산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그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슬슬 들어가세. 우린 이것만 전하면 되니, 최대한 빠르게 가서 끝내고 돌아오도록 하지.”
“예, 자작님.”
적어도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과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만 전해 주면 된다고 하니, 그나마 살아날 아주 작은 희망 정도는 있었다.
다만,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 중에 바깥 주민들의 글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 * *
저녁이 되어 공작성으로 돌아온 주안은 벡브란 전대 공작의 부름으로 인해 저녁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곳에 온 후 단둘이 식사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주안은 살짝 긴장했지만, 식당으로 들어온 벡브란 전대 공작은 이런 주안을 보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입을 열었다.
“주안아,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예, 할아버지.”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잠시 갸웃하다가 주안을 보며 말했다.
“……네 머리 뒤에 빛나는 그건 대체 무엇이냐.”
“그게…….”
주안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흡 하고 잠시 숨을 참은 뒤 집중하였다.
잠시 후 주안의 등 뒤에 있던 후광이 점차 사라지더니 이내 주안의 왼손의 성흔으로 빨려 들어갔다.
참으로 신기한 그 광경에 벡브란 전대 공작도 잠시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주안의 몸을 비추던 후광이 사라지자, 주안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아, 아무것도 안 저질렀어요.”
마치 장난꾸러기 손자를 보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안을 바라보자, 주안 역시 매우 억울하다며 항변하였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머리 뒤로 후광이 비치는 바람에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부분까지 할아버지에게 다 설명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일 하다가 왔는데…….”
“뭐, 그건 들어서 안다만…….”
주안이 침울해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주안이 오늘 바깥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는 모두 전해 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대견하였기에 칭찬도 해줄 겸 시간을 내어 같이 저녁을 먹으려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말이다.
주안이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잘 대해주는 것은 그 성격 탓도 있었지만, 천성이라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너무 유한 성격에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쉬워 보여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도 그게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성격이기에 주안의 곁에 있는 이들이 주안을 진심으로 잘 따르는 것이고, 벡브란 전대 공작이 할 일은 그러한 주안의 본연의 모습을 지켜주면서,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자긍심과 자부심 그리고 책임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네가 치료해 주었다는 그 아이는 괜찮아졌느냐?”
“잘 모르겠어요. 내일도 가서 살펴보고, 그게 안 된다면 잠시 공작성으로 데리고 와서 제 곁에서 돌봐주고 싶기도 해요.”
“흐음, 이곳에 말이더냐.”
“예……. 괜찮을까요?”
주안이 조심스레 할아버지에게 묻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끄덕여 주었다.
“이제 도리안도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것도 중요한 훈련 교관이니, 그 정도 배려는 나의 허락이 아니더라도 네 마음대로 하여도 괜찮단다.”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는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의 권한과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나마 가론 노밀 자작 정도만이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진행한 후에 허락을 받는 형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주안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 준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자신을 많이 믿는다는 증거이기에, 주안은 할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실망만 시켜드린 것 같아서 불안하였지만,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용서해 준 듯하였기 때문이다.
주안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며,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저 한 가지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음? 무엇을 말이더냐.”
식사가 나오기 전, 따뜻한 차로 목을 축이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 주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주안은 잠시 그런 할아버지를 보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마를렌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 부인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음? 마를렌 마르티네스 님을?”
예상치 못한 그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큰 의문을 느끼며, 주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