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71화
자리에서 일어난 주안은 도리안의 안내를 받아, 토미와 쥬도와 함께 그의 아내와 하마르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쥬도가 하마르를 만나러 간다며, 집안사람들이 따라오는 것을 말렸다.
다행히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마저도 쥬도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었다.
보통 아이들이 좀 크면 따로 방을 마련해 주었지만, 도리안의 가족은 그게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아픈 하마르를 혼자 둘 수 없어서인지 여전히 함께 지내고 있었다. 물론 하마르가 아직 혼자 방을 쓸 만한 나이가 아닌 점도 있었지만 말이다.
‘도리안 경이 죽을 때까지 전쟁터를 전전한 이유도 아들 때문이라 들었었지.’
이전 삶에서의 도리안은 전장의 하이에나처럼 돈에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그는 기사임에도 천한 일을 마다치 않았고, 항상 어려운 전장의 척후병을 자처했으며, 가장 위험한 전쟁터를 오가며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닌 생존을 최우선시하던 이였다.
기본적으로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의 생존,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으며, 때론 비겁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가 그렇게 지독하게 위험한 전장을 오가며 돈을 벌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으려던 이유가 그의 아들 때문이라는 것은 이전 삶에서 자주 들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비록 그는 전장에서 눈을 감았지만,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나갔다.
전장을 지켜보는 방법이나 혼자 낙오되었을 때의 생존술, 고립되었을 때 해야 할 일 등등을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 그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주안 역시 모른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 해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렇게 미친 듯이 돈을 번 것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 그가 목숨을 다한 뒤 아들의 운명 또한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불쌍한 사람이긴 해.’
주안은 앞서 걸어가는 도리안의 등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그 역시 서방의 검을 다루는 기사였고, 그렇기에 체구가 남달랐지만, 그보다 더욱 듬직하고 커 보였다.
잠시 갸웃하던 주안도 이내 그의 등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저게 아버지의 등인가.’
바로 아버지라서, 아들과 아내를 지키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 거대한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짊어진 그 모습과 도리안의 모습이 매우 비슷해 보였다.
짊어진 것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짊어진 사람의 각오가 중요했으니까.
두 사람이 짊어진 것은 달랐지만, 그 각오만큼은 같았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마를렌에 오기 전까지 주안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저 겉으로만 보고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할아버지와 도리안을 보며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도리안 경. 그런데 하마르는 몇 살이에요?”
“예, 올해로 열 살입니다, 공자님.”
“열 살이라……. 한창 바깥에서 뛰놀고 싶을 나이네요.”
주안의 말에 도리안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몸이 좋을 때면 몰리와 함께 바깥으로 나서기도 합니다. 하마르가 바다를 워낙 좋아해서, 공자님이 몰래 배도 태워주시고 그러셨지요.”
“상단의 상선을 그렇게 몰래 썼다가 나만 혼났지만 말이죠.”
“……혼날 만하셨네요.”
키득거리며 웃는 쥬도의 모습에 주안이 황당해했지만, 그래도 쥬도답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쥬도의 모습을 보니, 그도 도리안의 아들인 하마르를 상당히 좋아하는 듯했다.
조금 새로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게 진짜 쥬도의 모습인지 조금 헷갈렸지만, 주안은 그의 이런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뭐, 그래도 바깥에 한번 나서려면 정말 큰맘을 먹어야 하거든요.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서 말이죠.”
“네? 어째서요?”
갸웃하는 주안에게 쥬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의사나 신관을 대동해야 하거든요. 도리안의 한 달 급여 대부분을 그날 하루에 다 쓸 정도이니까요.”
“돈도 많으신데, 좀 보태시지 그러셨어요?”
“돈이 없어서 안 쓴 것이 아닙니다. 저 아저씨, 아니, 도리안 경도 고집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그런 겁니다.”
“흐응…….”
주안이 버릇없는 쥬도의 말에 은근한 눈으로 지켜보자, 쥬도가 흠칫 놀라며 잽싸게 도리안에 대한 호칭을 정정하였다.
그래도 눈치는 꽤 빨라진 듯했다.
그보다 쥬도의 말을 들은 주안은 도리안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안이 고개를 돌려 도리안을 바라보자, 주안의 시선과 마주친 도리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도련님에겐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 정도는 아버지로서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다 보니…….”
“그래도 쥬도 씨를 이용할 수 있을 때 마구 이용하세요. 그 돈을 아껴서 저축해 두는 게 더 낫죠.”
“……지금 사람을 옆에 두고 이용하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시는 것 아닙니까?”
쥬도가 불평을 내비치며 투덜거렸지만, 주안은 모르는 척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토미와 도리안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뭔가 사이가 몹시 나쁜 형제 같아 보였다.
* * *
“이곳입니다, 공자님.”
도리안이 자신의 가족이 머무는 방문 앞에 서서 주안에게 말했고, 그 말에 주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안이 조심스럽게 노크하자,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나왔다.
“……여보? 도련님?”
그녀는 곁에 있는 쥬도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이내 반가움으로 변했고, 그 뒤에 있는 주안과 토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도리안의 아내, 몰리인 듯했다.
‘케세니아 출신의 부부라던 게 맞긴 맞나 보네.’
주안은 도리안과 몰리를 번갈아 보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북부의 케세니아 출신답게 옅은 갈색 피부와 어두운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건강미 넘쳐 보이는 여성이었다.
케세니아 출신들은 남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지닌 이들이 많았으며, 매우 험한 산지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아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건강미가 넘쳤다.
게다가 다른 지역보다 동안인 사람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몰리라는 여성도 30대의 중년일 것임에도 그 외모는 상당히 어려 보였다.
어떻게 보면 산골 소녀처럼 매우 건강해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하여, 보는 사람에게 안쓰러운 느낌을 주었다.
“도련님을 만나러 가셨던 거였어요?”
하지만 몰리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도리안에게 묻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쥬도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해준다.
다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남편 도리안이나 쥬도의 표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평소 모습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인 듯싶었다.
“흠흠, 그보다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도리안 경.”
이런 묘한 분위기 속에 왠지 소외된 듯한 기분을 느낀 주안은 분위기라도 환기할 겸 작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제야 주안과 토미를 발견한 몰리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이런 몰리의 모습에 남편인 도리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쪽은 제 아내인 몰리라고 합니다. 몰리, 인사드려. 이분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이신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
“네?”
고개를 갸웃하는 몰리를 본 쥬도가 작게 투덜거리듯 도리안을 대신해 말했다.
“나랑 도리안, 경이 신세를 지고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이셔.”
“주안 마르티네스……?”
여전히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몰리는, 주안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다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한 듯 멍한 눈으로 주안을 바라보았다.
“고, 고고, 고, 공자…… 님?!”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아니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새하얗게 질려 풀썩 주저앉으려고 했다.
그 모습에 주안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해 주었고, 그것은 곁에 있던 도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죄, 죄, 죄송합, 합니다……!”
“으음, 제가 참 무서운 사람이었나 보네요. 보는 사람들마다 무릎을 꿇으시려고 하시네요.”
“그, 그게, 그러니까…….”
하지만 주안은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이 집안에서, 특히 쥬도와 엮인 호위들 입장에선 주안은 무시무시한 대마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공작부인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고, 그 공작부인이 바로 현 황제의 딸이었으며, 그 자리에서 무례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벌을 내린 게 바로 주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쥬도의 전 호위들이 주안을 보면 자연스럽게 몸을 흠칫 떨며 납작 엎드리는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쥬도나 도리안은 강제로 황도까지 끌려간 것이니, 도리안의 아내로서는 주안에게 밉보이면 남편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늦었지만 점심 좀 얻어먹으러 왔는데, 괜찮죠? 쥬도 씨가 몰리 부인의 요리 솜씨가 대단하다고 자랑하더군요.”
“하, 하, 하찮은 솜씨일 뿐입니다, 공자님.”
주안이 몰리를 부축하던 손을 놓자, 여전히 어버버 거리던 몰리는 남편의 품으로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부부 사이가 참 좋아 보이긴 하지만, 주안을 피하는 인상이 강하였기에 주안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공자님.”
“예, 실례하겠습니다.”
그런 아내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다독이던 도리안이 주안에게 방으로 들길 조심스럽게 권했다.
주안도 지금은 몰리에게서 떨어지는 게 낫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냅다 안으로 들어갔다.
토미도 주안의 뒤를 따라가며 몰리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쥬도는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방문 앞에 남겨진 몰리는 자신을 꼬옥 안아주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대, 대체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이 왜 여기에…….”
“쥬도 도련님을 따라 잠시 놀러 온 거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치만…….”
그럼에도 걱정스러워하는 아내의 모습에 도리안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문의 훈련 교관이 된 것도 주안 공자님이 추천해 주신 덕분이라는 거 알잖아. 무엇보다…….”
서로 같은 마을에서 자란 소꿉친구라 그런지, 그가 아내를 대하는 행동은 부부이면서도 마치 친한 친구와도 같았다.
친구이자 사랑하는 아내를 안심시켜 준 도리안은 조용히 아내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며, 주안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하마르를 고쳐주겠다고 오신 것이니…….”
“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몰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남편을 올려다보자, 도리안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조용히 주안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