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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167화 (167/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167화

주안이 마를렌으로 왔다고 해서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은 환영한다는 의미의 파티나 연회를 전혀 열지 않았다.

오히려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였고, 그것을 느낀 여타 다른 가신들도 주안을 찾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뒤에서 가론 자작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이었지만 주안 역시 그렇게 부탁을 드렸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주안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공작성에 마련된 자신의 방과 서재 그리고 가문의 사람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자료실에서 보냈다.

이곳에 온 처음의 목적인 엘 하임 마를렌, 주안의 입장에서는 시조 어르신의 아내이셨던 마를렌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부인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행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겐 이런 주안의 행동이 작은 오해로 보인 듯했다.

마치 주안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근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듯했으니 말이다.

“후우……. 이것도 꽝인가.”

주안의 조용히 책을 덮고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피곤한 듯 눈을 꼬옥 감은 채 눈꺼풀을 매만지며 잔뜩 찌푸렸다.

아무리 눈의 피로를 최소한으로 줄여준다는 세냐 특제 ‘피로야 물러가라, 안경’이었지만, 지나치게 오랜 시간 책만 뚫어져라 바라보니 눈이 피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는 게 나으려나.”

의자에 늘어져 작게 한숨을 내쉰 주안은 방대한 자료를 손수 하나하나 살펴보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려 손을 빌려볼까, 그런 생각마저 해버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주안이 가지고 온 짐 덩이들 때문에 조금 바쁘신 듯하여 얼굴을 보기 조금 어려웠다.

동방 대륙과의 차 무역에 관한 일과 링베르가 공작가를 어떻게 찍어 누를지에 대한 일로 이곳에 모인 가신들과 줄곧 논의 중이었다.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보다 동방 대륙이랑 차 교역이 더 중요해 보였지만 말이야.”

사실 링베르가 공작가와의 일은 정말 단순하게 생각해도 된다는 듯, 단박에 거절하고, 다른 배상과 함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할 생각인 듯했다.

이미 가신들과는 의견이 모였고, 오히려 링베르가 공작가의 행태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들마저 있었다.

가론 노밀 자작에게 그 소식을 들은 주안은 자신과 아버지가 상당히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실감하고는 더더욱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 어쨌든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나 버렸으니…….’

할아버지의 손에 들어간 이상, 주안이 관여할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링베르가 공작가에 대해서는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만이 남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물론 링베르가 공작가가 탐내던 식량은 이미 멀리 날아간 상태였다.

이것은 황가가 나선다 해도 벡브란 전대 공작이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히려 외할아버지가 눈치를 봐야 할 상태인데, 이거 어쩌지…….’

서부 국경을 지키는 링베르가 공작가의 부족한 군량 대부분은 마르티네스 공작령에서 난다.

그리고 이번에 링베르가 공작가의 행태에 단단히 화가 난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신들은 이런 군량로 들어가는 식량마저 끊어버리겠다는 아찔한 의견마저 내놓았다.

‘……그래도 할아버지 같은 어르신이 로마니아 백작님 정도밖에 없으셔서 다행이었지만.’

이런 극단적인 일까진 가지 않겠지만, 당분간 링베르가 공작가는 배가 좀 고플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렇기에 그사이에 끼어버린 황가는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도 달래야했고, 링베르가 공작가의 군량미 문제도 해결해야 했으니, 괜히 링베르가 공작가의 손을 거들었다가 참 피곤해진 듯했다.

‘이거, 외할아버지가 엄마까지 앞세워서 아빠에게 잔소리하면 어쩌지.’

뭔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거대한 두 공작 가문과 황실이 엮인 엄청난 사건으로 보이겠지만 주안의 입장에서는 그냥 집안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스케일이 매우 큰 집안의 가장인 두 할아버지의 소중한 손자라는 점은 참 피곤하고, 매우 난처한 점이었다.

“에휴, 모르겠다. 난 혼도 났고, 이제 반성도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어른들이 알아서 다 하시겠지.”

이미 먼 나라의 일이 되어버렸기에 주안도 더 이상 이 피곤한 일에 엮이기 싫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들을 챙겨 들고 안경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방을 나왔다.

* * *

주안은 머리라도 식힐 겸 공작성 본성에서 나와 바깥을 걸었다.

마땅히 함께 나올 사람도 없었기에 참으로 청승맞아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요즘 세냐는 거의 야행성 동물처럼 밤에 눈이 반짝반짝 해져서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지만, 주안에겐 그게 참 방해되어서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도 주안이나 가문을 위한 일이라 내버려 두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주안의 방에 마련해 준 작은 바구니 침대에서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워랜 경도 피곤해 보이고…….”

주안은 워랜과 솔도 찾아 나섰지만 워랜은 로마니아 백작에게 정말 많이 시달렸는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과의 계속해서 이어진 대련에 완전 녹초가 된 듯했다.

‘역시 서방의 검은 나이를 먹어도 그 체력 하나만큼은 대단해.’

아침부터 워랜을 상대로 검을 휘둘러 대던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워랜과는 달리 쌩쌩한 모습으로 회의에 참석한 상태였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해도 천생 무골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인지라 워랜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런 로마니아 백작으로 인해서 워랜은 기사들에게 참 인기 많은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 인기가 죄다 대련신청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을 거절했지만, 오히려 제대로 된 실력자들은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이 일부러 대련을 시키는 바람에 그것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어르신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워랜 경도 정말 안 됐어.’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야 순수한 호승심에 의한 것이었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은 가문을 위한 이유가 컸다.

단순히 워랜이 지나치게 젊은 랭크 7의 기사라는 것보다, 워랜의 검이 바로 동방의 검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흔치 않은 동방의 검을 직접 맞댈 수 있으니, 대련만으로도 여러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기사들에겐 굉장한 이득으로 다가온다.

이런 점 때문에 두 어르신은 나름 동부에서 실력 있는, 가신들을 따라온 기사 중에서 추려 그들에게 동방의 검이자 랭크 7이라는 기사의 검을 동시에 경험시켜 준 것이었다.

“토미나 데리고 오랜만에 순화에나 갈까.”

할아버지의 생신에 맞춰 마를렌에 내려올 때, 일 년에 단 한 번 맛볼 수 있는 고급 음식점, 순화는 여전히 주안에겐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였다.

작년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제대로 가지 못 하였기에 매우 아쉬웠다.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긴 지금이 아니면 영 기회가 없을 듯했다.

“으음, 그런데 지금 가도 먹을 수 있으려나.”

문제는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하는 순화인지라, 주안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주안의 권력을 이용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에휴, 그냥 시장에 가서 물고기 요리나 먹을까…….”

공작성에서도 얼마든지 화려한 요리를 먹을 수 있겠지만, 주안의 목적은 애초에 맛있는 것을 먹는 게 아니라 바람을 쐬는 것이었으니까.

혼자는 외로우니, 산책 겸 군것질을 위한 나들이에 토미나 찾아서 데려갈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미는 이곳에 와서도 대부분 연무장이나 근처 정원에 있기에,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응?”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주안은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낯익은 이들의 모습에 주안의 뚱한 표정이 바뀌었다.

“야, 토미!”

“어? 도련님……?”

지나치게 눈에 띄는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토미였기에 멀리서도,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주안이 토미를 부르며 쫄래쫄래 달려가자, 그런 주안의 모습을 본 토미가 애써 웃어주었지만, 정말이지 이 거대한 가문의 후계자답지 않은 털털한 그 모습에는 가끔 적응이 안 되는 듯했다.

토미에게 앞에 도착한 주안은 토미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에 갸웃하며 말했다.

“응? 쥬도 씨도 있으셨네요.”

“……다 와서 절 알아보시는 겁니까?”

“네, 눈에 안 띄는 평범한 외모라서요.”

“으…….”

주안이 히죽 웃으며 던진 농담에 쥬도가 살짝 인상을 썼다.

물론 농담임을 알지만, 평범한 외모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유행에 신경 쓰던 청년이었는데, 어쩜 황도로 간 뒤에는 오히려 더 평범해졌다는 것을 본인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만큼 황도는 화려했고 모든 것이 다 빛났으며, 또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이들마저 죄다 반짝이며 꾸미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래서 차마 반박은 못 하겠고, 그렇다고 화도 낼 수 없는 도련님인지라 속으로 분을 삭일 수밖에 없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연무장이나 정원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실은 쥬도 형이랑 같이 도리안 경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거든요.”

“어? 도리안 경을?”

주안이 갸웃하자 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안은 현재 공작성에 머물고 있지 않았고, 주안의 배려로 인해 그는 지금 자신의 가족이 있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토미의 말에 주안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도 돼?”

“네? 도련님도요?”

“응, 잠깐 산책이나 좀 할까 싶었는데, 잘됐네.”

어차피 도리안의 집이라고 하면 마를렌 시내일 것이니, 마침 잘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한 번쯤 도리안 경의 가족, 특히 아프다는 그 아들을 보고 싶었으니 잘된 일이지 싶었다.

이런 주안의 말에 토미보단 오히려 쥬도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음, 아버지가 엄청 부담스러워 하실 텐데.”

“……도리안 경의 집에 가는데 쥬도 씨의 아버지가 왜 부담스러워 하신다는 거예요.”

“그야 저희 저택이 도리안의 집인걸요. 같이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쥬도 씨도 돈 많은 집의 도련님이셨지.”

“뭐, 주안 도련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있는 집이긴 하죠.”

그래도 마를렌에선 잘나가는 상단의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이곳에 저택이 있는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함께 지내면서 본 쥬도의 모습에, 그가 있는 집 자식이었다는 것을 요즘 자주 까먹는 듯했다.

그 때문인지 쥬도도 오랜만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잘난 척하였고, 이런 쥬도의 모습에 토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주안은 그런 쥬도의 행동에 그저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같이 가도록 해요. 나가서 밥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쥬도 씨네 집에서 먹으면 되겠네요. 손님 대접은 괜찮게 해주시겠죠?”

“……손님치고는 너무 당당하신데요?”

“황도에서 의식주를 책임졌던 값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이, 예이.”

히죽 웃는 주안의 그 말과 행동에 쥬도가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는 주안이 고마운 듯했다.

이건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상단에게도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편하게 식사하러 오는 것만큼 좋은 관계임을 보여줄 방법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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