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66화
주안은 할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와 조용히 혼자 복도를 걸었다.
집무실 근처는 미리 사람들을 모두 물린 상태라 그런지 매우 조용하였다.
바깥의 시끌벅적한 것과는 상반되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마르티네스라…….”
그렇게 복도를 걷던 주안은 문득 창밖에 비친 바다와 수많은 배, 그리고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주안은 이전 삶 속에서의 이 공작성이 싫었고, 바다가 싫었고, 마르티네스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싫어했다.
미움받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과 관여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펑펑 써대는 돈이 나오는 곳이라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엄마의 탓도 있었지만 주안이 그 꼴이 된 것도 자신의 의지로 그 무엇도 하지 않으려던 멍청하면서도 게으른 성격 탓이었다.
이곳에 다시 되돌아오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은 뒤 차근차근 그것을 바꾸어 나갔던 주안이었지만 그것이 조금 잘못된 방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할아버지처럼, 마르티네스가 될 수 있을까.”
단지 가문을 망하지 않게, 그리고 유지시키는 것만이 목표였다면 지금은 할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으며 깨닫게 된 마르티네스라는 그 이름의 무게를 실감하였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바로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이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에 대한 무게였다.
하지만 주안은 그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짊어진 할아버지가 너무나 크고 거대했으며, 그럼에도 닮고 싶어졌다.
꾸지람을 들었지만 오히려 그게 개운했을 정도였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그게 자부심이겠지…….’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그것을 모두 이루어낸 할아버지의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의 무게는 곧 할아버지의 자부심이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그것을 가진 할아버지가 너무나 대단해 보였고, 부러웠으며 그렇기에 어쩌면 주안에겐 새로운 목표가 된 듯했다.
“나도…….”
조용히 창밖을 바라며 주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될 수 있겠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점을 반성해야 하며,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문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 것인지, 이제는 주안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조금씩, 한 걸음씩 할아버지의 그 등을 보고 나아가면 언젠가 자신도 할아버지의 곁에 서도 모자라지 않는 그런 마르티네스가, 주안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주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꼬옥 움켜쥐며 작게 다짐을 하였다.
“우와, 오빠네 할아버지 진짜 엄청 무섭네.”
“응?”
하지만 그런 다짐을 깨는 목소리와 함께 주안의 상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오며 말했다.
“……언제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어?”
“아침부터?”
세냐가 잔뜩 뻗친 머리카락을 손으로 이리저리 매만지며 간단히 답해준다.
그런 세냐의 행동에 주안이 좋은 분위기 속에서 상념에 잠겼던 것을 깨버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나오고 조용히 있어 줬네?”
“저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요? 도저히 끼어들 틈이 안 보이잖아요.”
“……그래도 그 틈을 보고 있었던 거야?”
“네.”
간단한 세냐의 그 말에 주안이 재차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못 말리는 작은 요정 꼬맹이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냐는 조심스레 날아오르더니 주안의 앞 창틀에 내려와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오빠네 친할아버지면, 엘 하임 마를렌의 자손이라는 의미인데 오빠랑은 눈동자만 빼고 하나도 안 닮았네요.”
“으음, 그런가…….”
그래도 한 부분은 닮았다는 게 기분은 좋았지만, 확실히 세냐의 말대로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과 주안이 닮은 부분은 성별이 같은 남자라는 것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인 주레인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주안으로선 조금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선대의 어르신들은 할아버지 같은 분들도 있고,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
“하긴, 인간들은 다들 제각각 특이하게 생겼으니까. 피가 이리저리 섞이다 보면 이런 사람도 태어나고 저런 사람도 태어나고 그러긴 하겠네요.”
“특이하게 생긴 것까진 아니라고.”
주안이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지만, 세냐는 키득거리며 장난 가득 웃어주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걸요. 엘 하임의 엘프들은 모두 여리고 예쁘장하고, 드워프들은 모두 작고 우락부락하고, 오크들은 근육질에 바보들인데, 인간들만은 모두가 다 달라요.”
갸웃하는 주안을 보며 세냐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은 그 외모도, 하는 행동도, 생각도, 취미도,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 모든 게 달랐어요.”
“응? 그건 다 그렇지 않아? 아무리 엘프나 드워프, 오크라 해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다 다를 거잖아.”
“글쎄요. 제가 봤을 땐 다 비슷했어요. 공통적으로…….”
“……인간을 싫어하는 것은 빼고.”
“흐응~ 그러면 엘프들은 더러운 것을 무척 싫어했고, 작물을 키우고 그 작물 중에서 특히 과일들을 매우 좋아했어요.”
“헤에, 그건 나랑 진짜 비슷한데.”
주안 역시 이전 삶에서나 지금의 삶에서나 더러운 것은 매우 싫어해서 목욕을 꾸준하게 하였다.
아무리 빈민의 삶을 살았어도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만큼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챙겼을 정도였다.
게다가 과일 역시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있어도 싫어하는 과일은 없었다.
진짜 엘프의 자손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세냐가 말하는 엘프들과는 닮아 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그럼 드워프들은 어땠어?”
“드워프들은 죄다 술 마시는 거랑, 땅을 파고 무언가 만드는 걸 엄청 좋아했고, 자신들의 예술품을 평가절하당하는 걸 죽는 것보다 더 싫어했어요.”
“응, 모두가 장인들이라고 전설로 전해졌는데, 그게 진짠가 보네.”
실제로 현재의 특별한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건에 대한 자존심이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그 자존심만큼이나 완벽을 기했다.
저 먼 동방 대륙의 도자기 장인들 같은 경우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엄청난 명작도 장인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망치로 깨버릴 정도였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고 강한 자존심만큼이나 자신들의 물건에 완벽함을 추구하던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오크는? 달란트 부족을 오크라고 했잖아. 그들은 어땠어?”
달란트 부족을 아직 이종족인 오크들이라 확실히 믿지 못하는 주안이지만, 세냐에게 넌지시 그렇게 묻자 세냐는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오크들은 씻는 걸 엄청 싫어했죠. 완전 더러워요. 게다가 좋아하는 건 뭐, 일단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가리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다 처먹었다니까요.”
“……너, 오크 싫어하는구나.”
“네.”
수백, 혹은 수천 년이 지났을 것임에도 싫어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듯, 세냐는 깔끔하게 답하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세냐의 말에 주안도 공감할 수밖에 없던 것이, 달란트 부족은 확실히 잘 씻지 않는다.
그렇다고 냄새가 나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좀 찝찝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먹성 역시 매우 좋았고, 딱히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었던 그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드워프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타고난 전사이자 장인들이기도 했고, 가죽공예품에 한정되어 있지만 의외로 예술가이기도 했다.
노래도 좋아하고 춤도 사랑하는, 무언가 즐겁게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다들 비슷했다고?”
“그렇죠. 하지만 인간들은, 먹을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물건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또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다양하죠.”
“뭐, 그렇긴 하지.”
사람들은 모두가 다 다르다는 세냐의 말처럼, 사람들은 모두가 같을 수가 없었다.
주안이 세냐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셋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지어낸 이야기일 정도로 사람들은 모든 게 다 달라. 욕심이 많은 만큼, 생각하는 것도 많고 그래서 다들 다른 삶을 살아가거든.”
“네, 맞아요. 아미엘 님도 그러셨어요. 인간들이 강성한 이유는 그 욕심 때문도 있지만, 그 욕망에 맞춰서 끝없이 자신들을 변화해 나갔기 때문에 이종족들을 밀어내고 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이종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졌던 요정들이지만, 그렇기에 요정들은 이종족들의 좋지 못한 부분과 싫어함에도 인간의 좋은 부분을 인정하고 있는 듯했다.
이종족들은 하나의 가족, 형제자매처럼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고 그렇기에 끈끈한 유대감과 그것을 통해 서로 닮아갔지만 결국 그것은 발전하지 못 하는 정체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반대로 인간은 가족이라 해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욕심을 부리는 자들이 있을 정도로 뭉치지 못할 때는 모래알과도 같았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의미 없이 다투는 야만적인 이들이었지만 그렇게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가진 만큼 생각의 시야는 매우 넓었기에 끝없이 욕망에 대한 갈구로 변화해 갔기에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이종족들은 너무 정체되어 있었어요. 현실에 안주해 있었고, 자신들의 능력에 치우쳐져 있었고, 그렇기에 변하지 않고 현재를 고수했으니까요.”
“변하지 않는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어. 조금씩이라도 발전해 나가야 세상은 움직이는 거니까.”
인간은 이 발전을 대부분 전쟁이라는 야만스러운 일을 통해 진행시켰고, 여전히 피를 보는 전쟁뿐만이 아니라 정치라는 전쟁, 생존이라는 전쟁, 삶이라는 전쟁을 지금도 끝없이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오빠는 이종족의 가족에 대한 집착이랑 인간들의 발전이라는 욕망, 두 가지 모두를 가진 거 같아요.”
“두 가지의 장점이 다 있는 거라면 좋은 거겠네.”
“뭐, 나쁘진 않죠. 적당한 욕심 역시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세상에 욕심이 없는 존재란 없다.
그것은 지나치면 독이 되겠지만 선을 지키는 욕심, 욕망은 그 사람의 좋은 밑거름이 된다.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욕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욕심,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심 등등.
그것은 올바른 욕심이자 욕망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치열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주안은 조금은 그 치열한 삶 속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싶었다.
“나도 이제 조금은 제대로 된 욕심을 내어 보고 싶어.”
“충분히 욕심쟁이로 보이는데요? 주변 사람들을 지나칠 정도로 챙기는 거 보면, 사람 욕심은 대단했잖아요.”
“응, 그랬지. 그래도 조금 더, 이제는 내 주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처럼 가문의 모든 사람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 거야.”
“헤에, 그거 엄청 욕심쟁이 같은데…….”
“그래도 노력해야지. 할아버지가 한 것처럼, 가문의 어르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되어 봐야지.”
주안이 미소를 짓자, 세냐가 흠칫 놀라며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하지만 이내 거세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금세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작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뭐, 열심히 해보세요. 응원 정도는 해드릴게요.”
“응, 고마워. 그리고 세냐도 열심히 해. 나도 응원해 줄게.”
“웬 응원?”
주안이 싱긋 웃으며 세냐에게 그렇게 말하자, 세냐가 이유를 몰라 갸웃했다.
그러자 주안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세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워프 게이트 만들어야지.”
“으…….”
그제야 주안의 응원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듯, 세냐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잔뜩 찌푸렸다.
지금은 주안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게 세냐였고, 그것을 깨달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