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65화
“제가, 가문의 이름을 가볍게 생각해요……?”
주안이 떨리는 눈으로 할아버지를 보며 말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은 차분한 눈으로 주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무거운 침묵 후 벡브란 전대 공작이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링베르가와의 그런 거래는 있을 수 없었겠지.”
“하, 하지만 할아버지. 그 거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무엇보다 다른 곳도 아닌 멜파스를 놓고 저희와…….”
“할아버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구나.”
주안이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황급히 말을 꺼냈지만 베브란 전대 공작은 그런 주안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거래의 이득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주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링베르가 따위에게 끌려다니며 그놈의 의도대로 휘둘린 것에 너와 네 아비에게 화가 난 것이다.”
“…….”
그 날카로운 할아버지의 눈에 주안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질 만큼 오싹한 느낌을 받아야만 하였다.
분명 주안에게 할아버지는 무서운 존재다.
이전 삶 속에서도 자신을 보면 늘 호통만 치던 할아버지였기에, 지금의 삶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변한 만큼 할아버지도 변했기에 무섭지만 다정한 그런 할아버지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할아버지는 주안의 할아버지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벡브란 마르티네스.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전대 가주이자 현재도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마르티네스 그 자체였다.
주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그 눈에서 가족이 아닌, 가문의 주인을 보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벽과 두려움에 몸을 잔뜩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잘못을 주안 공자님과 주레인 공작님에게 돌리시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벡브란 님.”
다행히 가론 노밀 자작은 벡브란 전대 공작이 진심으로 분노를 드러낼 때 도와주겠다는 주안과의 약속대로 조심스레 나서며 벡브란 전대 공작을 말려주었다.
이런 가론 노밀 자작의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은 작게 혀를 차며 주안에게 말했다.
“그래, 그 모든 잘못을 너희 부자에게 지우는 것도 가혹하긴 하겠지. 따지고 보면,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잘못이 커.”
“할아버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주안은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할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그 후회와 외로움이 전해져 왔다.
“네 성격이 네 아비와 어미를 닮아 유하다는 것을 잘 안단다. 하지만 한 가문의 수장이 단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마냥 좋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단다.”
벡브란 전대 공작은 주안에게 그렇게 말을 해주며 곰방대에 다시 담뱃재를 채워 넣은 뒤 불을 붙였다.
“때론 냉정해질 필요가 있고, 손가락질을 받을 일도 해야 할 때도 있고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 굽히지 말아야 할 일과 물러서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단다.”
조용히 담뱃대를 입에 물고 뻐끔뻐끔 피워대는 할아버지의 그 모습에 주안도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었다.
자신 역시 황도에서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가문을 위해서 애를 썼다고.
링베르가에 공작가에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정말 구차한 변명일 뿐이라고 느꼈다.
“너와 네 아비는 링베르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내어준 듯하구나. 너도 그렇고, 네 아비도 그렇고. 빈틈이 너무 많았어.”
“내어 준 것은 없어요……. 링베르가 공작님은 저희와 거래를 하고자 하였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거래도, 저희가 받지 않아도 되는…….”
“애를 쓴 거야 이 할애비도 들어서 잘 안다만, 주안아. 그것은 애를 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다.”
그리고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벡브란 전대 공작이 손자인 주안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링베르가와의 거래라……. 좋은 말이지. 황제 폐하까지 나서서 조율하였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마. 하지만 말이다, 너희는 너무 황도에, 황실의 법도에 물든 듯하구나.”
“예? 그게 무슨…….”
주안이 그 말뜻을 몰라 갸웃하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래는 동등한 조건일 때 할 수 있는 것이란다.”
“…….”
“똑똑히 기억하거라, 주안아. 아니,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 주안 마르티네스.”
벡브란 전대 공작은 주안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동등한 입장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오만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의 말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곁에 있던 가론 노밀 자작 역시 미소를 지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주안은 이 두 어르신의 말에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 할아버지, 그 말은 황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불경한 말로 들린다면, 너는 마르티네스라는 이름보다 제노폴의 이름에 더 가까운 듯하구나. 너의 어미의 영향인 것인지, 아니면 황도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 것인지…….”
작게 혀를 차는 벡브란 전대 공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실도 우리와 동등한 조건의 거래를 하기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지, 우리가 아래로 굽히고 들어가지 않는단다.”
“하, 할아버지!”
주안은 결국 너무 놀란 나머지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완벽한 황실에 대한 반역이었고,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마조마한 주안의 모습에 오히려 벡브란 전대 공작은 아들을, 그리고 손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매우 후회스럽다는 듯했다.
“잘 듣거라, 주안아.”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고 지금이기에 주안이라는 다음 대의 마르티네스의 이름을 받을 후계자에게 똑똑히 새겨주듯 말했다.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황가의 동반자이고, 동맹이지 결코 아래의 신하가 아니다. 황가도, 링베르가도 우리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맞추어줄 이유는 없다.”
당당한 벡브란 전대 공작의 그 모습에 주안은 흠칫, 놀라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서도, 그렇다고 황제인 외할아버지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그 모습에 주안은 멍하니 친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기에 네가 해야 했던 것은 링베르가와의 거래가 아니라 요구였다.”
“요구……?”
주안의 작은 중얼거림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곰방대를 다시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후 하얀 연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링베르가였으며,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도 링베르가였으며, 용서를 구걸해야 하는 것도 링베르가였다. 하나 너와 네 아비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벡브란 전대 공작은 주안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었고, 이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사납고 위험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링베르가 놈에게 오히려 내줄 것을 생각할 뿐이고, 대가를 주고 용서를 구걸할 뿐이고, 하찮은 땅덩어리 하나에 고민하는 너희는……!”
참아낸다 했지만, 기어이 참지 못한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비싸디비싼 동방 대륙의 곰방대를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움켜쥐어 찢어버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마르티네스의 수치나 다름이 없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실망스럽다는 그 눈에 주안의 안색이 무척이나 창백해졌다.
직접적으로, 너무나 직설적인 그 말에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안에게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화를 내고, 매를 드는 것보다, 가문의 수치라는 그 말이 주안에게 더욱 큰 상처이자 큰 고통이었다.
가문의 수치…….
그것은 주안이 이전 삶 속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듣던 말이었으며, 조롱을 당했던 말이었다.
가문을 말아 먹은 희대의 마마보이.
그렇기에 가문의 수치이자 마르티네스 최악의 존재로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되기 싫어서 노력하였고,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였지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주안으로선 절망에 가까운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거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너와 네 아비가 해야 했던 것은 그딴 하찮은 거래가 아니라 요구다! 잘못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잘못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고, 잘못에 대한 처벌도 요구해야 했다. 하나 너흰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의 그 말들이 주안의 가슴을 찔러 왔지만, 그 말대로 주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주레인 공작을 탓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고 이끌어 갔던 것은 주안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주안의 잘못이 맞았다.
그리고 주안은 할아버지의 말대로 링베르가 공작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끌려갔고, 그 무엇도 요구하지 못했다.
그가 말을 하는 대로 가문을 욕보인 제이미 링베르가를 풀어주었고, 그가 제시한 땅에 욕심이 나서 거래에 응했으며, 아무런 사죄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한마디로…….
‘바보도 이런 바보도, 멍청한 녀석도 없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많은 것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이미 이전 삶 속에서 수도 없이 해왔고 겪은 일들인데, 또다시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렸다.
바뀌려고, 바꾸려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했던 그 노력은 모두 허사였던 것처럼 주안은 결국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그런 멍청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나란 녀석은 정말…….’
화도, 분노도 낼 수 없을 만큼 참 미묘한 기분이다.
‘어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거지.’
이런 주안이 큰 고민과 자책감에 빠진 모습에 가론 노밀 자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자신의 손자가 그런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에 오히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주안에게 말했다.
“무엇을 잘못하고,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깨달았느냐.”
“……예.”
주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벡브란 전대 공작은 걱정보다 주안을 오히려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실망하지 않을까, 다시 무서워하지 않을까, 제 아비처럼 이대로 마를렌을, 마르티네스 공작령을 떠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 모든 것은 벡브란 전대 공작의 기우인 듯했다.
그렇기에 벡브란 전대 공작은 자신의 손자에게 조금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 가슴에 똑똑히 새기거라. 우리 마르티네스가 어떤 가문인지, 시조 어르신이 어떤 마음으로 마르티네스를 만들어낸 것인지 말이다.”
주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삶에서야 그딴 것 알 게 뭐냐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이번 삶은 달랐다.
적어도 가문의 시조,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이 이 마르티네스라는 거대 가문을 만든 이유는 주안도 알고 있었다.
대암흑기 이후, 혼란한 대륙에서도 유일하게 안전하던 동부로 몰려든 수많은 유민을 위하여.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으로 뭉친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서였다.
혼란한 대륙을 바로잡으려던 제노폴과는 뜻이 맞아 함께하였을 뿐이다, 그 아래가 아닌 곁에서.
그리고 신하가 아닌 동반자로서 함께 하였을 뿐 마르티네스는 처음부터 제노폴 제국의 신하가 아닌 동맹이자 동반자였다.
그렇기에 동부는 마르티네스의 지역으로서 독립된 땅이나 마찬가지인 자주권을 가지게 된 것이니 말이다.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의 말처럼, 마르티네스는 그 누구의 아래에도 있는 가문이 아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벡브란 전대 공작은 당당한 모습으로 손자에게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우리 마르티네스의 이름을 잊지 말거라. 그리고 너의 어깨에 짊어진 마르티네스의 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거라.”
할아버지의 그 말에 주안도 그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자신은 가문을, 마르티네스 공작가문을 너무나 몰랐다.
그렇기에 이제는 할아버지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 큰 실망을 하게 된 것인지 이제는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이런 주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변한 것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도, 두려움도, 실망도 존재하지 않는 그 맑고 푸른 눈동자에는 실수를 깨닫고 그것을 뉘우치며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진정한 후계자의 눈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