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64화
“저기, 가론 자작님.”
공작성 내성의 복도를 걸으며, 조용히 울리는 발소리를 뒤로한 채 주안이 앞에서 안내하는 가론 노밀 자작의 곁으로 걸음을 옮겨 그를 불렀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가론 노밀 자작이 곁으로 다가온 주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많이 화나셨나요.”
주안이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표정을 살피며 묻자, 가론 노밀 자작이 잠시 머뭇거리다 버릇처럼 자신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주안 공자님이나 주레인 공자님이 미워서 하는 진노가 아니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가론 노밀 자작의 그 말에 주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시무룩해진 주안이 말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왜 화가 나신 건가요. 제가, 아버지와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데……. 저는 그게 잘 모르겠어요.”
주안은 오면서 내내 생각하였다.
과연 할아버지를 화나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링베르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위체니아를 통해서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할아버지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잔뜩 주눅이 들고 걱정스러워하며, 고민에 빠진 주안의 모습에 가론 자작은 주안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주안이 참 대견하게 느껴졌다.
작년에도 보아서 알고 있지만, 다시 직접 만나게 된 주안은 그때의 그 시절보다 조금 더 성장해 있었다.
아스란 왕국에 다녀오며, 주안이 한 행동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일을 해냈다.
또한 성흔이라는 쉽게 얻을 수도 없다는 그런 힘도 가지고 있다 들었다.
하지만 주안은 그럼에도 자신을 내세우고 돋보이게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더욱 좋게 보는 이유는 바로 더 이상 엄마인 안젤라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그 품에 안겨 있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제대로 해나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무리 황도가 이곳에서 멀다 해도 황도의 소식 정도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이다.
그 정보를 가지고 벡브란 전대 공작에게 전하는 역할이 가론 노밀 자작, 자신이다 보니 어쩌면 주안의 행동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인물도 자신이었다.
“제가 벡브란 님을 대신해 무언가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주안의 모습에 애써 웃으며 콧수염을 매만지던 가론 노밀 자작이 말을 이었다.
“주레인 공작님과 주안 공자님, 두 분께서 링베르가 공작가와 한 거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 그건 저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주안 역시 그 부분은 오면서 위체니아와 록산느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부분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지는 못했다.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벡브란 님이 정말 화가 나셨다면 황도로 찾아가지 이렇게 부르지는 않으셨을 것이니 말입니다.”
“우음…….”
주안을 안심시키기 위한 농담으로 들릴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그러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황도까지 찾아온 게 아니라, 그래도 점잖게 불렀다는 점은 극대노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 주안에겐 왠지 안심으로 다가왔다.
다만, 그래도 분노 상태를 아버지는 마법 통신으로 이미 한 번 겪었다는 것이고 주안은 앞으로 겪을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컸다.
이런 주안의 창백한 안색과 잔뜩 움츠러든 모습에 가론 노밀 자작이 애써 웃음을 참아내었다.
주안이 이제 다 컸다 싶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여전히 아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도 곁에서 함께 있어 드릴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정말요? 같이 있어 주시는 거예요?”
“예, 쫓아내려 하셔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가론 자작님.”
주안에겐 그 어떤 말보다 가론 자작이 곁에서 함께 있어 준다는 그 말보다 더욱 든든한 말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어떤 가신들조차 절대 벡브란 전대 공작의 말을 거스를 수도 없고 분노를 잠재울 수도 없겠지만, 가론 노밀 자작만큼은 달랐다,
이미 사망한 벡브란 전대 공작의 아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은 가론 노밀 자작밖에 없다는 것은 동부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천군만마라도 얻었다는 듯 주안의 표정이 확 밝아졌고, 다시 공작성 복도를 천천히 걷는 그 발걸음에는 더 이상 망설임과 두려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 * *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있는 공작성 가주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주안과 가론 노밀 자작.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나 하인, 하녀조차 없는 조용하고 침묵만이 감도는 이 장소에 주안은 침을 꼴깍 삼켰지만, 가론 노밀 자작은 여유롭게 노크하였다.
“벡브란 님, 주안 공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오랜만에 직접 듣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주안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을 알아차린 주안은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런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 정도였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의 간단한 그 말에 가론 노밀 자작이 집무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는 주안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그리고 주안은 집무실을 가득 채운 새하얀 담배 연기 속에서 무거운 분위로 소파에 앉아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거구의 노인.
주안은 그런 벡브란 전대 공작을 보고는 큰 반가움과 죄송함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그런 주안을 그저 흘겨보며 조용히 말했다.
“앉거라.”
“……예.”
차가운 그 반응에 주안이 움찔 놀랐지만, 그 말에 따라 조용히 다가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사이 가론 노밀 자작은 환기라도 시키려는 듯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풀고 대화가 제대로 되게 만들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각자의 앞에 놓아 주었다.
미지근해져 버린 차였지만 그것을 따라준 후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대화의 장을 만들고 자리에 앉아 있는 가론 노밀 자작의 모습에, 뻐끔뻐끔 곰방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피워대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가론, 여기 있을 게냐.”
“예, 주안 공자님과 약속해서 말입니다.”
“무슨 약속?”
“벡브란 님이 화를 내면 말려주기로 말이죠.”
“…….”
가론 노밀 자작의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안을 봤다.
그런 할아버지의 눈과 마주친 순간 주안은 마치 육식동물 앞의 초식동물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이런 손자의 모습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
“예, 그래도 조용히 지켜만 볼 것이니, 화만 내지 마십시오. 요즘 혈압도 많이 높아지지 않으셨습니까.”
“흥, 화내다 쓰러질까 걱정이더냐.”
하지만 진짜 그게 걱정이었기에 가론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발끈한 듯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여전한 할아버지와 가론 자작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잔뜩 굳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린 듯했다.
그리고 한동안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는 벡브란 전대 공작과 조용히 차를 마시는 가론 노밀 자작,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주안.
잠시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이내 벡브란 전대 공작이 담배를 모두 다 태운 듯 곰방대를 입에서 떼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말했다.
“주안아, 아니, 주안 마르티네스.”
“……예, 할아버지.”
손자를 부르듯, 주안이라는 다정한말을 내뱉었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지만 금세 다시 정정하여 딱딱하게,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를 대하듯 주안의 이름 전체를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주안 역시 잔뜩 긴장하였다.
“내가 너를 이곳에 부르고, 네 아비에게 크게 호통을 친 이유를 아직 모를 거라 생각한다. 맞느냐.”
“……예.”
가론 노밀 자작도 제대로 몰랐던 일이었기에, 주안 역시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의문을 이젠 조금 풀어주려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이 주안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황도에서 네 아비와 네가 링베르가 녀석과 한 일을 이 할아버지도 모두 들었단다. 하나, 그때의 그 일을 네 입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이 할아버지에게도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주안은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빠짐없이, 최대한 소상히. 그리고 많은 부분을 할아버지와 가론 자작의 앞에서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 그 시작인 링베르가 공작이 황도로 입성하는 것을 본 것에서부터 제이미 링베르가를 만난 일, 혼담과 미네아 링베르가가 저택으로 찾아온 일.
거기서부터 시작된 제이미 링베르가와의 다툼과 쥬도가 다치고, 자신이 대처한 일 등등.
링베르가와 정확히 엮인 그 시점부터 소상히 말을 꺼내어 전달하였다.
벡브란 전대 공작과 가론 노밀 자작은 진지한 주안의 그 표정과 엄숙한 분위기에서 거짓을 섞거나 무언가를 빼고 넣지 않은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론 자작이 전해주었던 황도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한 정보와 비교하며, 모자란 부분을 채워보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듯 벡브란 전대 공작 역시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해서 링베르가 공작님과의 멜파스 시의 거래 조건을 통해서 저희 가문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인지, 할아버지와 다른 가신 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제가 마를렌으로 온 것이에요.”
축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기 위해 주안이 노력하였고, 그 때문에 주안의 말은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가론 노밀 자작은 주안을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이런 주안의 말이 끝나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생각을 정리하듯,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미지근하던 차가 이젠 차갑게 식어 버렸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그것을 한 모금, 두 모금 천천히 입술을 축이듯 마셨다.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을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그가 지금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였다.
“링베르가 녀석과의 거래라…….”
이미 들었고, 주안의 입으로 다시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링베르가 공작의 행동은 그들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간 거래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선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도 일이지만, 그보다 황도의 아들과 손자의 행동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느끼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주안을 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안아.”
“예, 할아버지.”
“이 할애비가 생각하기에 주안이, 너는 가문을, 마르티네스라는 그 이름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구나.”
“예……?”
갑작스러운 그 말에 주안이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