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63화
주안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공작성에 금세 퍼져 나갔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가 나와서 주안 일행들을 맞이해 주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였지만, 주안이 기사들과 병사들의 마중을 받으며 공작성으로 향하자 그제야 작년에 보았던 주안의 얼굴을 떠올린 듯 마를렌 주민들은 의외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주안은 그런 마를렌의 주민들의 환영이 영 부담스럽고 할아버지와의 일로 인해 또 실망을 안길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대로를 따라가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인사까지 해주었다.
“우와, 작년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도련님.”
“으응,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공작령 내의 많은 가주님들이 오셨으니, 그분들을 따라 수행원들도 엄청 왔을 거니까.”
가주들이나 직계 가족들은 공작성 내에서 머물겠지만, 마를렌의 공작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수많은 수행원 모두를 다 수용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마를렌 시내의 숙박시설이나 이곳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가신들의 저택을 이용해 분산 수용해 놓은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런 가주들의 이동을 포착한 상단의 관계자나 다른 귀족가의 이들도 무슨 일인가 하여 예의주시하며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와 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니, 안 그래도 북적이던 마를렌 시내는 완전 시장바닥과도 같았다.
“그래도 용케 대로는 길을 제대로 뚫어놓았네요. ……쥬도 형처럼 똑같은 짓은 안 했겠죠?”
“뭐, 이 자식아?!”
토미의 농담에 쥬도가 발끈하며 소리치자 도리안이나 주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하긴. 그래도 가론 자작님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분은 아니시니…….”
“그래, 이 자식아. 무식하고 막무가내였다, 인마.”
쥬도가 으르렁거리며 토미를 노려보았지만, 토미는 그저 능글거리며 쥬도의 거친 곳을 피해 여유롭게 말을 타고 앞서가 버린다.
토미 딴에는 농담으로 주안의 기분을 좀 풀어주고 싶은 듯했고 나름 성공한 듯, 주안 역시 작게 미소를 지으며 투탁거리는 토미와 쥬도를 지켜보았다.
단지 작년에 마를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는 듯 토미와 쥬도의 투탁거림을 보며 위체니아와 록산느가 갸웃할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이곳은 사람만 좀 많아졌을 뿐 변한 건 없어 보이네요.”
“뭐, 멀리서 봤을 때 배가 좀 많아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워랜의 말에 위체니아가 슬쩍 주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렇죠. 배가 참 많아졌죠. 누구 덕분에 말이에요.”
“하하…….”
왜 배가 갑자기 많아진 것인지, 주안 역시 너무나 잘 알기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를렌의 거대 항구에 정박한 배 중 비어 있는 상선들도 꽤 있을 것이었다.
그 상선들은 이번에 건조되어 동방과의 무역을 준비 중인 마르티네스 공작가 소속의 상선들일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주안으로 인해서 해군의 군선이 아닌 다수의 상선이 건조되었다.
그 상선들은 곧 동방 대륙으로 무역을 위해 떠나게 될 것이다.
위체니아의 말을 듣고는 조심스레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상선 건조나 목재 수급, 인력도 대부분 공작령 북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죠?”
“예, 그것 때문에 아주 바쁘죠. 아버님도 사실 벡브란 전대 공작님의 명령만 아니셨다면 움직이시진 않으셨을 거예요.”
“으음, 그렇군요. 제가 괜한 일들을 드린 듯하네요.”
“아뇨,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최근 선박 건조 의뢰가 거의 없어서 가문의 조선소가 거의 정지된 상태였거든요.”
소벡 백작 가문에는 거대한 조선소가 존재했으며 주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해군용 군선을 만들던 장소이기도 했다.
때때론 거대 상선도 건조했지만, 배라는 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자와 기술도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창 동방 대륙과의 무역이 활발할 땐 이 조선소에서 불이 꺼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밤낮없이 돌아갔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거대 상단들이 어지간한 상선들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세브로 군도나 바다를 끼고 있는 북부의 왕국들에서도 배를 건조하기 시작하자, 소벡 백작가로 향하는 물량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때문에 최근에는 건조보다는 보수와 수리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주안이 제안한 동방 대륙과의 차에 관한 무역 제안으로 인해서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영지 내에서 놀던 인력들도 다시 제대로 된 일들이 생기고, 타 가문과도 연계해서 일을 진행하니 바쁘긴 하지만 영지에는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단지 소벡 백작 가문의 조선소만 운용되는 게 아니라 근처에서 목재를 수급하기 위해서 또 다른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그런 그들이 사용할 도구들을 위해서 다시 대장간들에 불이 들어갔으며, 광산이라거나 여러 인력을 다수 끌어다 쓰니 공작령 북부만이 아니라 공작령 전체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나의 거대 사업으로 인해서 부가적으로 필요한 일들이 다수 생겨나니, 그렇게 발생한 일들은 결국 공작령 전체를 움직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뭐, 일을 잔뜩 준 공자님에 대해 불평할 수도 있지만, 감사하기도 해요.”
그리고 이런 일 중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이 북부였고, 그 북부 중에서도 소벡 백작 가문은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안이 잔뜩 준 일거리는 힘들긴 해도 영지를 부유하게 하고 있으니, 위체니아는 주안에게 꽤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더 바빠질 거예요. 조선소만이 아니라, 차 재배라거나 관리도 공작령 북부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거든요.”
“하아, 일이 너무 많아도 좋은 건 아닌데…….”
아무리 영지를 부유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해도 그게 필요 이상으로 많아진다면 힘들고 괴롭게 된다.
이런 위체니아의 한숨에 주안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 확정은 아니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결국, 차 재배에 잘 맞는 땅이 필요한 것이니, 그게 서부가 될 수 있고 중부나 남부도 될 수 있죠.”
“서부와 중부는 이미 곡창지대로 미어터질 지경이고 남부는 차 재배하다가 말이나 양, 소가 다 뜯어 먹어버릴 걸요.”
“으음, 그건 그렇긴 하네요.”
위체니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주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공작령 중부와 서부는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어 딱히 다른 것을 재배할 필요도, 자리도 없었다.
그렇기에 링베르가 공작이 이 곡창지대에서 나는 엄청난 식량을 탐낸 것이니까.
그리고 남부는 말 그대로 목초지대라 말과 양, 소 등을 가두어두지 않고 풀어놓고 키웠기에 잘못하면 위체니아의 말대로 차 재배지가 초토화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만일의 일일 뿐이고, 어차피 관리를 잘한다면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을 주안도 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남부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런 것도 있지만, 공작령 남부의 분들은 조용히 차나 재배할 분들은 아니시니까요.”
“쿡쿡, 그렇긴 하죠.”
주안의 말에 위체니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과묵해 보이던 록산느 마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거, 자유분방한 인종들이라 참 미안하게 됐수다.”
다만 이런 이들의 모습에 공작령 남부 사람인 워랜이 작게 투덜거릴 뿐이었다.
남부의 사람들은 그 기질이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유유자적해서 조용히 차나 재배하고 있을 위인들은 절대 아님을 다들 알고 있었다.
워랜은 그 정도가 심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워랜과 비슷한 성향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 * *
공작성 안으로 주안이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주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예의를 갖추며 조용히 고개를 숙여 주안을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이들 중 주안에게 제대로 인사해 주는 것은 작년에 주안을 보았던 이들뿐이었다.
그저 주안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는 이들도 많았다.
‘낯이 익은 사람들도 있고, 기억이 안 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한때 주안은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정식으로 물려받았던 이였고, 주안 마르티네스 공작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안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봉신 가문들의 현 가주들이나 그들의 가족을 제대로 모른다.
아무리 지금의 삶을 다시 산다고 해도, 한 가문의 가주로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낯이 익은 이들은 작년에 보았던 가신들이었고, 일부는 아스란 왕국으로 함께 외교사절을 떠났던 공작령 남부 귀족들의 후계자들 정도뿐이었다.
‘휴이 경 곁에 있는 분이라면, 역시 훼스턴 가문의 가주님이시겠지.’
그리고 이런 주안을 맞이하는 이들 중 그래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공작령 남부 귀족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유독 주안의 눈길이 가는 이들이 몇 있었다.
주안 자신을 심할 정도로 반짝이고 부담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칭 삼인자를 꿈꾸던 휴이 훼스턴이었다.
그의 곁에는 여전히 함께하는 호위기사인 로첸 산타나 경도 있었지만, 또 한 명, 나이 지긋한 중년의 모습에 주안은 그가 바로 현 훼스턴 자작가의 가주임을 직감했다.
게다가 그들의 곁에는 디로 남작가의 스테반 디로, 로리앙 남작가의 인베드 로리앙, 스테나 남작가의 쉐인 스테나 등등.
함께 아스란 왕국으로 향했던 남부 귀족들이 모여 있었고, 그런 후계자들의 곁에는 여지없이 가주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그들의 주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매우 호의적이라는 점은 주안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아, 가론 자작님.”
주안이 말에서 내리자 그런 사람들 틈에서 가론 노밀 자작과 먼저 이곳으로 와서 소식을 알렸던 솔, 그리고 그의 곁에는 아르베리아와 처음 보는 나이 지긋한 노인도 함께였다.
이런 이들을 보며 주안이 표정이 환해지며 가론 노밀 자작에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오시는 길 많이 힘드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주안이 힐끗, 그의 곁에 서 있는 덩치도 크고 자신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을 보자, 가론 노밀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분은 말란체 남작가의 전대 가주이셨던 덕트 말란체 님이십니다.”
“아…….”
그제야 솔과 아르베리아가 그 곁에 서 있던 것이 이해된 듯 주안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님. 주안 마르티네스라고 합니다.”
“호오…….”
주안의 이런 인사에 젊은이들은 주안의 그 행동을 대단히 좋게 보았고, 중년의 가주들 역시 놀란 듯하였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이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짊어질 후계자가 가신들 집안의 어른을 잘 대해준다는 것이 보기 좋은 듯했다.
하지만 반대로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은 오히려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며 말했다.
“벡브란 님이 왜 걱정하시고, 분노하신 것인지 조금은 알겠군.”
“예?”
“아니네, 들어가 보게. 벡브란 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말일세.”
주안이 의아한 눈으로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을 보았지만, 그는 그저 주안을 지켜보다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러자 가론 노밀 자작이 나서며 주안에게 말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자님.”
“아, 예.”
가론 노밀 자작의 그 말에 주안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공작성의 내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론 노밀 자작은 오직 주안만, 다른 일행들에겐 따라오지 말라는 듯, 워랜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워랜이나 위체니아, 록산느도 그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뒷모습을 보며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예의가 발라도 너무 바르군. 허허, 이거 참……. 전대 공작님의 걱정이 태산 같으시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예의가 바르면 좋은 거잖습니까.”
“좋지, 좋은 것이지.”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주안 공자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가 고개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숙이면 안 되는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베리아와 솔은 이런 할아버지의 말이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