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62화
“문책이라…….”
가론 노밀 자작의 말에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이 하얗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곁에 있던 아르베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두 어르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야기에 끼어들어, 가론 노밀 자작에게 잔뜩 물어보고 싶었고, 자리를 박차고 주안을 찾아가고 싶은 심정의 아르베리아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을 끝낸 듯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이 말했다.
“주안 공자가 무슨 큰 문제라도 일으켰나?”
“정확히는 주레인 공작님과 주안 공자님, 두 분과 링베르가 공작가와의 일입니다.”
“황도에서 큰일이 있었던 듯하군. 그 링베르가와 엮이다니 말이야. 한데, 서부에 처박혀 있던 그들이 왜 황도까지 가서 우리 가주님을 혼날 일을 만든 것인지…….”
그래도 주레인 공작이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였기에, 이런 사단을 만들어낸 링베르가 공작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속한 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고 복잡한 일입니다. 물론 링베르가 공작가에 대한 일로 가주님들을 모두 부른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저 부가적인 일일 뿐입니다.”
“결국 그 잘못에 대한 문책과 실수를 바로 잡게 하려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만, 조금 과한 것 같구나.”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벡브란 님이시고, 그 결과를 내는 것 역시 그분의 의지일 뿐입니다. 저희가 나설 일이 아니지요.”
“그래도 조금은 살갑게 대해주시면 좋으실 터인데……. 또 주레인 공작님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벡브란 전대 공작과 주레인 공작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가신들뿐만이 아니라 동부의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좋은 소문이 날 리가 없었다.
적어도 공작가를 이어받은 현 가주가 영지를 내버려 둔 채 황도에서 황실의 일을 돕는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영지의 일도 함께 돌보며 겸하는 것도 아니니, 비정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소문대로 두 사람의 불화가 맞았다.
강한 카리스마로 가문을 휘어잡았던 벡브란 전대 공작과는 달리 유한 성격의 주레인 공작은 늘 이런 아버지를 무서워하였고 두려워하였다.
그에게는 기사로서의 재능도 없다 보니 이런 벡브란 전대 공작만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성격이 모나지 않고 머리도 좋아 다음 대의 공작가를 이끌어가는 것 자체에 전혀 문제는 없던 이였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두 부자의 사이는 결국 아스란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레인 공작도 전쟁을 완전히 반대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전쟁에 가문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의 입장을 내비쳤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그와 반대로 가문의 힘을 끌어내어 아스란 왕국을 징벌하려 하였다.
전쟁이란 결국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게 마련.
비겁하고 이기적이지만, 그 희생자가 자신과 가까운 이가 아니기를 바란 주레인 공작이었지만, 그의 의견은 결국 벡브란 전대 공작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렇게 참전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병사들의 희생 역시 뒤따랐다.
아무리 강성한 군대라도 희생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아스란 왕국만큼은 아니지만, 가문의 사람들도 다수 희생을 당했기에 주레인 공작은 이런 일을 벌인 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데면데면한 부자의 사이는 결국 완전히 틀어졌고, 주레인 공작은 그렇게 황도로 떠나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도, 닮을 수 없다는 것도, 설득을 시킬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기에 선택한 것이 결국 외면이었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주안 공자님의 판단이겠지만, 혹여…….”
“이 일로 주안 공자가 마음이 상해서 주레인 공작 각하처럼 되는 것이 너도 걱정인가 보구나.”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두 부자의 사이가 조금씩 다시 회복되어 가는 것은 좋았지만, 그 이전까지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만이 아니라 손자와도 그렇게 된다면…….
“이제 겨우 가족 같은 좋은 분위기가 되었는데, 어긋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가론 노밀 자작이 걱정하는 것은 마르티네스 공작가라는 가문 그 자체도 있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에 대한 걱정도 매우 컸다.
오랜 세월을 가족과 오래 떨어져 있었던 그였다.
아내도 일찍 떠나 보냈고, 아들과는 친해질 수 없었으며, 그런 아들도 아버지를 떠났다.
게다가 겨우 얻은 손자는 좋지 않은 소문으로 인해서 역시나 이런 벡브란 전대 공작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이런 가족의 냉랭한 관계가 반평생에 걸쳐 이어졌고, 겨우 작년이 되어서야 서서히 가족다운 분위기가 되나 싶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지, 가론 노밀 자작은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이런 가론 노밀 자작을 본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녀석이 벡브란 님 곁에 있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지.”
“저라도 곁에 있어 드려야지요.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십니다.”
살며시 미소를 짓는 가론 노밀 자작의 모습에 덕트 말란체 남작도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그 역시 한 가문의 수장이자, 공작령 남부의 대표라고 불리는 노밀 자작가의 현 가주였다.
그런 그가 오랜 시간 자신의 영지를 비워두고 이렇게 공작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벡브란 전대 공작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함께 전쟁을 겪은 이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벡브란 전대 공작을 단지 존경해서, 무서워서, 그 카리스마에 반해서 따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혼자 전쟁터를 전전하고, 가문의 모든 것을 짊어진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 짐을 조금은 덜어주고, 그 곁에서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대표가 바로 가론 노밀 자작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네가 힘 좀 써야겠구나.”
“그게 제 역할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분들의 도움도 많이 필요합니다.”
“도움이라……. 그럴 게 있다면야 돕겠다만…….”
하지만 실질적으로 무언가 도움을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들 역시 벡브란 전대 공작이 전한 일에 감히 반대의 의견을 내비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 어긋난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간다면 모를까, 벡브란 전대 공작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최소한, 주레인 공작님과 주안 공자님에 대한 비난만큼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 말거라.”
그 두 부자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가론 노밀 자작의 말대로 비난할 일은 없을 것이다.
주레인 공작 역시 가문에 큰 피해를 미치려고 한 일이 아닐 것이며, 더욱이 그가 비록 황실에 몸을 담고 있다 해도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그의 고향이고 집이다.
그가 하려던 일도 결국 가문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니, 비난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의 말에 가론 노밀 자작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남은 것은, 제가 어떻게든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래, 다들 같은 생각일 것이니, 네가 벡브란 님을 잘 봐드려라.”
“그래야지요. 제가 유일한 친구이지 않습니까.”
“큭큭, 그래, 그렇긴 하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지는 가론 노밀 자작의 그 말에 덕트 말란체 전대 남작도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말의 작은 불안도 날려 버리듯, 애써 밝은 모습을 나타내듯 말이다.
* * *
“…….”
퀭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주안.
거대한 공작성과 그 배경의 푸른 바다. 수많은 배가 정박해 있으며, 끝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항구 도시.
바로 마를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힘없이 그런 말을 내뱉으며 주안은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자님은 정말 몸을 쓰는 것에 재능이 없으시군요…….”
“으…….”
안타깝다는 듯 말을 하는 록산느 로마니아의 말에 주안은 앓는 소리만 낼 뿐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주안은 그래도 말을 타는 것을 금방 배웠기에 자신에게도 나름 운동신경이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황도에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변경도시 프로키온까진 나름 여유롭게 갔던 주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안의 배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 배려를 버려둔 채 위체니아와 록산느가 일행들을 이끌자 주안은 처음으로 말 위에서 토할 뻔한 아찔한 경험마저 해버렸다.
온몸이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근육통에 엉덩이는 누가 발로 걷어차기라도 한 듯 쓰리고 아팠다.
신성력을 썼다면 훨씬 수월했겠지만, 주안은 말 위에 앉아 달리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을 모두 소모한 듯, 신성력을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위체니아 양은 멀쩡하시네요.”
다만, 주안에게 핀잔을 주는 위체니아의 모습은 주안과는 달리 너무나 멀쩡했다.
그래도 남자인지라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런 주안의 말에 위체니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야 마법으로 몸을 가볍게, 엉덩이는 아프지 않게 만들었으니 전혀 문제가 없었죠.”
주안과는 달리 말 위에서도 마법을 잘 사용하고 오래 유지도 하는, 정말 재능이 남다른 여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런 위체니아의 말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음에 엉덩이가 안 아픈 마법 쿠션이라도 구해야 할 듯하네요.”
그게 아니라면 달리면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훈련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
하지만 이런 주안의 다짐에 위체니아가 주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도구에 의지하려 하시다니, 실망이에요.”
“그, 그러는 위체니아 양도 마법에 의지하셨잖아요?!”
“마법은 제 능력이고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 역시 저랍니다, 공자님. 하지만 마법 도구는 공자님의 능력은 아니지 않나요?”
“…….”
위체니아의 핀잔에 주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입술을 삐죽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돈은 제 능력인데요.”
“정말 구차한 말씀이시네요.”
“으…….”
변명처럼 내뱉은 그 말에 위체니아뿐만이 아니라 록산느마저 눈초리가 차갑게 변했다.
두 여성의 싸늘한 눈빛에 주안이 잔뜩 주눅이 든 채 몸을 움츠리자 보다 못한 워랜이 나서서 말했다.
“잡담은 그만하고, 얼른 가기나 하죠. 솔, 넌 가서 주안 공자가 도착했다는 걸 공작성에 알려드려.”
“네, 네.”
워랜의 말에 솔이 움찔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앞서 달려가 공작성으로 향했다.
솔은 통통하지만 말을 타는 것에 전혀 무리도 없었고, 힘들어하지도 않으며 말을 너무나 잘 움직였다.
주안이 그런 솔의 뒷모습을 정말 부럽다는 듯 지켜보았지만, 워랜이 이런 주안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며 말했다.
“주안 공자도 정신 차려. 그런 모습으로 공작성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아…….”
워랜의 말에 주안이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피곤한 모습을 신성력으로 전부 지워버린 뒤에 또렷하고 맑은 눈으로 공작성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바로 앞이었다.
할아버지를 마주하고, 수많은 가신을…… 그것도 가주들을 마주하는 장소였다.
주안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재차 신성력을 끌어올려 긴장을 풀어냈다.
주안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자, 일행들이나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주안을 바라 보았지만, 주안은 이런 그들을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주안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할아버지 만나 똑바로 마주하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